[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가수 조용필
[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가수 조용필
  • 장재선(시인, 문화일보 문화부장)
  • 승인 2019.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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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멈추지 않는

장재선

우리 친구 열 명 중 일곱은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시드러운 길을 걸어왔따
그의 노래 열 중 일곱은
외워 부르며
쓸쓸한 시간들을 견뎌 왔다

그의 노래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그를 아는 사람도 없다
이 나라의 가왕으로 살아온
세월의 뒤편에서 노을을 벗한
적막을 누가 알겠는가

신은 그에게 노래를 주고
사랑하는 이를 뺏어
시련에 들게 했으나
그는 바람의 노래를 멈추지 않고
꽃이 지는 이유를 구하고 또 구했다

40을 맞으면서 무서웠고
50에도, 또 60에도 두려웠으나
언제나 새롭게 살아지더라는

여기 오늘 우리의 신화
아픔 없이 어찌 탄생이 있으련만

70에도 우리 곁에서
신생을 꿈꾸며
노래 부를 것을 믿는다면
그를 모른다고
진짜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가수 조용필을 만난 것은 ‘러브 인 러브 LOVE IN LOVE’ 콘서트 때문이었다. 2010년 봄이었다. 당시 그는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대규모 콘서트를 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공연의 부제는 ‘소아암 어린이를 위한 사랑 콘서트’였다.

공연에 앞서 그가 소속사를 통해 기자들을 불렀다. 저녁을 함께 먹자는 제의였다. 서울 예술의전당 인근 식당이었다. 그때 그는 환갑을 맞은 나이였으나 훨씬 젊어 보였다. 소속사 말대로 조촐한 저녁 자리였는데, 기자들은 밥상을 앞에 두고도 연신 질문을 퍼부었다. 물론 그가 준비하고 있는 콘서트에 관한 것이었다.

조용필은 특유의 소박한 말투로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 어떤 말을 하다가는 민망한 듯, 수줍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토록 오랜 세월 스타의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에게 어찌 저리도 질박한 모습이 남아 있을까. 나는 경이를 느꼈다. 옆자리에 앉은 후배 기자에게 내 느낌을 속삭였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저 선생님의 매력이죠.”라고 했다. 평소 누구 앞에서나 까불대기 좋아하는 후배가 연예인에게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흥미로웠다.

조용필은 기자들과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그만 밥을 먹자고 했다. 콘서트의 자세한 내용은 무대에서 보여 주고 싶다고.

한동안 말없이 밥을 먹던 그는 뭔가 마음에 걸렸는지 소속사의 실장을 불러서 상의를 했다. 그런 후에 그 콘서트에서 세계 최초로 시도했던 ‘무빙 스테이지’ 등에 대해 설명했다. 6m 높이까지 공중으로 떠올라 객석 쪽으로 이동하는 무빙 스테이지뿐만 아니라 관객석 전체에 둘러지는 아레나 LED 영상, 360도 서라운드 스피커의 사운드 등.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다 보니 대규모 콘서트의 성패를 가르는 무대와 음향 효과에 대해 그가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찾아 온 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 절로 느껴졌다.

조용필은 애주가로 유명했으나 이날은 맥주 한 잔만 마셨다. 무대 장치 때문에 해외 전문가들이 와 있어서 회의를 해야 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는 자신이 30여 년 간 골초였으나 노래 부르는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과감히 금연했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술은 못 끊겠다며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에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게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40이 되는 것을 걱정했어요. 과연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40이 돼도 그 이전과 똑같더라고요. 50이 오는 것도 두려웠지만, 막상 돼 보니 역시 이전과 같았어요. 60이 돼도 마찬가지에요. 그 나이가 되면 또 새롭게 살아지더라고요.”

ⓒYPC 프로덕션

조용필은 6·25전쟁이 난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에 기타를 끼고 살았던 그는 1968년 경동고를 졸업한 후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를 만들어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1969년 미 8군 무대에 데뷔했고, 1971년 최이철, 김대환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해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그룹 활동을 접고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앨범》을 발표했다. 번안곡 〈님이여〉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최초 레코딩 버전이 들어있는 데뷔 앨범이다. 책 『대중음악가 열전』에서 조용필을 가장 앞에 올린 바 있는 음악평론가 최성철은 “이 앨범이 가왕 조용필 역사의 첫 바퀴를 굴렸다.”고 평했다.

이후 그룹 ‘25시’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8인조 브라스밴드인 ‘조용필과 그림자’를 만들어 서울고고 클럽에서 연주를 했다. 26세가 되던 1975년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나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시골 마을이었던 우리 동네의 아주머니들이 어느 집에 모여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합창으로 불렀던 모습이 암암하다.

그런데 조용필은 가수로서 인기를 얻자마자 대마초 파동에 휩쓸려 공백기를 갖게 된다. 밴드 시절에 대마초를 피웠던 것이 빌미가 돼 방송 출연 금지를 당했던 것. 그는 대마초 연예인 해금 조치가 있었던 1979년에 지구레코드 전속이 됐고, 이듬해인 1980년 정규 1집 《창밖의 여자》를 발표했다. 〈단발머리〉, 〈한 오백년〉 등이 실린 이 앨범은 당시 150여 만장이 팔리며 그를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때부터 함께한 밴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은 지금도 그의 음악을 분신처럼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이후 《촛불》, 《미워 미워 미워》, 《못찾겠다 꾀꼬리》, 《산유》, 《눈물의 파티》, 《눈물로 보이는 그대》, 《허공》 등의 앨범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 음반 들은 크게 히트하며 조용필 오빠 열풍을 이끌었다. 각 앨범의 타이틀곡이 아니라도 숱한 노래들이 전국을 휩쓸었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잊혀진 사랑〉, 〈비련〉, 〈친구여〉, 〈고추잠자리〉, 〈생명〉,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등.

조용필은 1986년 일본에 진출해 앨범 《추억의 미아 1》을 내놨다. 이 앨범은 현지에서 100만 장 이상 판매됐고, 그해에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듬해 9집 앨범 《사랑과 인생과 나》를 발표 했다. 여기서 〈마도요〉,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등이 히트했다.

이렇게 국내외에서 1980년대 최고의 가수로 활동했으나, 그는 1983년 비공개 결혼식을 올린 후 5년 만에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과정은 여러 가지 구설을 낳았다. 그러나 진중한 성격인 그는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고 뮤지션의 길에 매진했다. 

가정 생활의 불행을 딛고, 그의 음악은 피어났다. 1988년에 나온 10집은 당초 더블 앨범으로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용필의 바쁜 스케줄 탓에 두 장으로 나뉘어 내게 됐고, 먼저 나온 《Part 1》이 10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최성철에 의하면, 이 앨범은 88서울올림픽의  화려함만큼이나 눈부신 사운드와 편곡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서울 서울 서울, 모나리자, 목련꽃 사연 등은 음악 생활 20년을 맞는 조용필의 프로듀싱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면서 우리 가요의 세계화 가능성을 열었다. 이듬해 발표한 11집 《Part 2》는 실험성과 대중성이 공존하는 앨범이다. 19분 30초에 달하는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는 전자를 대표한다면, 타이틀곡 Q는 후자에 속한다. 〈Q〉는 그가 10년 동안 인연을 맺고 있던 지구레코드사와의 결별을 암시하는 노래라고 한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조용필은 199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음반을 펴냈다. 12집 추억 속의 재회는 자신의 팝록과 젊은 뮤지션들의 새 스타일을 함께 구현한 것이다. 사운드가 이전보다 강렬하고 무거워졌다는 평을 들었다. 타이틀곡과 함께 해바라기 등의 노래가 히트했다.

1991년에 발표한 13집 《The Dreams는 라틴 계열의 리듬을 사용하는 등 새로운 감각을 선보였다. 탁성을 절제하는 보컬의 변화도 한 특징이었다. , 장미꽃 불을 켜요 등이 이때 나온 노래다. 베아트리체를 담고 있는 14 《Cho Yong Pil 14은 1992년에 발표했다.

조용필을 세대를 뛰어넘어 전 연령층의 사랑을 받았다. 이는 그가 록, 발라드, 트로트, 민요 등 전 장르를 아우르며 새 음악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의 창조성, 융합성은 가왕歌王이라는 별칭에 걸맞은 것이었다. 음악 방송 등에서 그는 늘 마지막무대를 장식했고, “조용필은 맨 끝에 나온다.”는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1992년 초 서태지가 등장하면서 세상은 온통 테크노, 하우스, 힙합 등 랩댄스 물결에 휩싸인다. 때마침 40대를 맞은 조용필은 방송 활동에서 멀어진다. 대신 그는 관객을 직접 만나는 공연 쪽에서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1993년 부산 해운대콘서트에서 동원한 10만 명의 관객은 한국 가요 사상 최다 관객으로 기록돼 있다.

이듬해인 1994년에 발표한 앨범 《Cho Yong Pil 15는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가왕으로서는 이례적 참패였다. 그는 잠시 휴지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으나1997년 16집 《Eternally Cho Yong Pil 16을 내놓고 건재를 과시했다. 명작 〈바람의 노래〉를 품고 있는 앨범이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YPC 프로덕션

이듬해에 17집 《Ambition》을 내놓고 조용필은 또 5년의 휴지기를 갖는다. 2003년에 나온 18집 《Over The Rainbow》는 모든 곡에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동원했다. 이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인 멜로디로 서정을 극대화한 작품이 〈진〉이다.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 안진현을 떠올리며 만든 곡이라고 한다. 그는 1993년 재미교포 사업가인 안진현을 만나 이듬해에 결혼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활동했던 두 사람은 두 나라를 오가며 애틋하게 사랑을 쌓았다. 그러나 신이 그들의 사랑을 시기라도 한 것처럼 안진현은 심장병을 얻어 2003년 1월 타계했다.

조용필은 아내를 잃은 아픔을 견디며 이해에 데뷔 35주년 기념 공연을 강행, 사상 최초로 서울 잠실올림픽 주경기장 공연을 전석 매진시킨 주인공이 됐다. 2010년엔 같은 곳에서 이틀간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또 한 번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조용필은 63세이던 2013년에 19집 앨범 《Hello》 를 들고 대중 앞에 섰다. 기존 음악적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와 실험으로 가득 찬 앨범이었다. 여기 수록된 10곡은 발라드, 팝에서 프로그레시브, 일렉트로닉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60대 가왕의 음악적 혁신과 도전에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수록곡 〈바운스〉 열풍으로 전국이 ‘바운스’ 됐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전국 13개 도시에서 스물두 번의 공연을 펼쳐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018년에 음악 인생 50주년을 맞은 그는 ‘땡스 투 유Thanks To You’라는 제목으로 7개월 동안 대규모 전국 투어 공연을 펼쳤다. 5월 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시작으로 대구, 광주, 의정부, 수원, 대전, 창원, 인천, 구미, 부산, 서울 앵콜 등 10개 도시를 오가는 대장정이었다. 이 기간 25만 명에 달하는 관객이 그의 노래에 울고 웃었다.

그의 노래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의 각다분한 삶을 쉼 없이 보듬어줬다. 우리는 복고와 첨단을 아우르는 그의 노래를 통해 무섭게 변하는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었다. 2017년에 1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택시운전사〉에 삽입된 노래 〈단발머리〉가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그걸 알려줬다.

그는 명실공히 한국 대중음악계의 신화다. 그 신화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이 있다. 나는 기억한다. 작가 최인호가 1980년대 어느 날 신문에 ‘20세기가 저물 무렵 조용필도 늙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던 것을. 그 조용필이 21세기 에도 늙지 않고 새로운 음악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당대인들과 교감하고 있다.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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