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엑시트', 쓸모없음의 쓸모가 안긴 위무의 힘
[영화 월평] '엑시트', 쓸모없음의 쓸모가 안긴 위무의 힘
  • 김시균(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 승인 2019.09.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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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엔터테인먼트

1.

‘단언컨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어조가 더 솔직하다고 느껴져서다. 이를 테면 한 영화를 보고나서 ‘단언컨대, 이 영화 대박날 거야’라고 단정해버릴 경우, 현실이 그와 반대로 흘러갈 때에 엄습하는 민망함이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몫이다. 대중의 취향과 기호는 끊임없이 변모하는 유기체에 가까우므로, 나의 판단의 명석함을 과신해 ‘단언컨대’라는 수사를 들먹인다는 건, 실상 오만한 교설이기 십상이다. 그러니 조금은 주저하듯이, 이리저리 미로 속을 헤매이듯이, 주어진 텍스트를 분석하고 그 안의 미덕을 추출해 낸 다음 흥행의 귀추를 조심스레 관측해보는 것이 과문한 필자의 성정엔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엑시트>(감독 이성근)의 경우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부끄럽게도 필자가 소속된 신문사 리뷰 기사에다 ‘단언컨대’라는 확언을 들먹인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기사는 나갔고, 배는 이미 떠나버린걸. 영화 기자들에게 개봉 전 대중 영화 흥행 점치기는 하나의 게임으로 간주된다. 요컨대 타율이 높으면 대중의 눈높이를 잘 아는 기자로 평가받을 수 있다(그것이 자평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게 흠이지만···). 만약 ‘저 영화 최소한 오백만은 볼 거야’라고 확언했다가 정말 오백만 선에서 그친다면 어딘가 좀 멋져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반대로 ‘백만도 못 간다’고 예견했는데 천만 명이 본다면 그보다 더 멋쩍은 경우도 드물 것이다(주변에 이런 사례가 꽤 있다).

자랑 하나 하자면 필자도 타율이 썩 나쁘진 않았다. 일례로 <내부자들>(2015)이 ‘칠백만 명 정도는 보겠네’라고 무심코 전망했더니 정확하게 맞춘 적(누적 관객 707만명이 봤다)이 있다. 당시 영화 기자 초기였으니, ‘ 초심자의 행운’이 작용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이후에도 <부산행>(2016) <택시운전사>(2017) 천만, <신과함께 1·2>(2017·2018) 쌍천만, 최근 <기생충> 천만 달성 등을 시사회 이후 호기롭게 확언했었고, 다행히 그대로 맞췄더랬다(뻥이 아니다). 그러나 상반기 <극한직업> <알라딘>의 대흥행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 뒤로는 되도록 흥행 점치기를 자제하고 있다. 모름지기 가만 있으면 절반은 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엑시트>를 보고 기어이 ‘단언컨대’라는 상투어를 써버린 것이다. 모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상영관을 빠져 나와 ‘단언컨대, 대박나겠군’ 하며 홀로 뇌까려버렸다. 그러다 마주한 투자·배급사 관계자의 “어떻던가”라 는 물음엔 “족히 500만명은 더 보겠는데”라고 단정하기까지했다. 이 무슨 뻔뻔한 자신감인지···. 한데 말이다. <엑시트>는 그럴 만한 영화였다(8월 20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 기준 <엑시트>의 누적 관객수는 765만 8444명이다. 업계에선 900만 정도를 최종 스코어로 예상한다). 그럼, 어떤 점에서?

2.

영화가 시작되면 한 청년이 열심히 철봉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 만년 백수 용남(조정석)이다. 잔근육으로 무장한 탄탄한 신체가 꽤나 멋져 보이려던 찰나, 잠시 멈춰선 그의 스마트폰 화면에 문자 메시지가 뜬다. 내용은 취업 불합격 통보. 이를 보는 그의 표정은 ‘어디 한두 번인가’라는 듯 체념조다. 그런 그를 향해 저 멀리 그늘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 한 분은 손가락으로 ‘따봉’을 펼쳐보이고, 시선 우측에서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다. 그 중 한 명인 조카 지호(김강훈)는 삼촌이 창피한 듯 애써 못 본 체하며 공터를 빠져나간다.

<엑시트>의 출발은 경제적이다. 주인공에 관한 정보가 첫 신에서 거의 다 드러난다. 만년 백수이고, 주변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이며, 잘 하는 것이라곤 매달리는 운동뿐이라는 것. 요컨대 그는 이 땅의 쓸모 없는 뭇 청춘의 대변자다. 쓸모가 없으니 보이지 않는 그림자 또는 유령처럼 취급 당하는 게 일상이다. 그 쓸모의 전모란 번듯한 직장의 있고 없음 하나로 판가름난다. 게다가 가족들에게 얹혀 살고 있기에, 그 처지의 안타까움이 여실하다. 이렇듯 <엑시트>의 세계란 한국 사회의 불우한 청년 현실을 핵심적으로 훑고 간다. 극 초반은 앞선 철봉 신에 이어 용남이 집에서 마주하는 일련의 설움과 한두 시간 거리 웨딩홀에서 치러지는 어머니 현옥(고두심)의 왁자한 칠순 잔치다. 그사이 용남이 툴툴대는 아버지 장수(박인환)와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웨딩홀까지 가게 되는 전말이 플래시백으로 짧게 설명 된다. 그 전말이란 대학교 산악 동아리 시절 흠모했던(그러나 가차없이 차였던) 후배 의주(임윤아)와 재회하기 위함이다.

의주는 먼저 취업해 해당 웨딩홀 부점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 또한 웨딩홀 특유의 중노동에 지 질한 점장의 추파를 감내해야 하는 시름 많은 을이다. 용남은 오래간만에 만난 그녀에게 “IT 회사 과장으로 일하고 있어”라며 거짓말한다. 이 물론 금세 들통날 것이지만. 칠순잔치가 치러지는 웨딩홀 공간은 한국 문화의 축약판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절묘한 공간 선택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디테일한 한국적 풍경이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다. 은연중 서로의 직장과 경제력으로 서열을 메기려는 속물적 풍토나 노래방 기기를 들여와 한밤 중 고래고래 노래 부르는 광경, 여남은 음식을 “이게 다 돈”이라며 비닐봉지에 싸가려는 어머니 현옥의 행실 등등···. 여하한 풍경 속 백수 용남은 있지만 있지 않은 존재처럼 취급당하며, 바쁘게 홀을 오가는 의주를 곁눈질 하는 것으로 소일한다.

서사가 본궤도에 오르는 건 <엑시트>(탈출)가 벌어지는 대사건 직후부터다. 어느 미치광이 화학자가 도심 복판에 유독가스를 살포해 버리고, 이에 웨딩홀에 있던 가족과 친인척들은 사위로 퍼져가는 가스를 피해 대탈출을 도모한다.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였던 용남의 쓸모가 의외의 빛을 발하는 건 그가 이 재난 사태의 구조대로 전격 나서면서다. 철봉 운동과 대학교 산악 동아리 시절 다진 탄탄한 암벽 등반 실력이 200% 발휘된다. 그런 그의 곁엔 마찬가지로 훌륭한 암벽 등반 실력을 지닌 후배 의주가 있다.

<엑시트>의 서사는 마치 게임처럼 진행된다. 하나의 사건을 해소하면, 또다른 사건이 줄줄이 이어진다. 가히 첩첩산중인데, 그 생존이라는 난망한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야 하나 그 사이 장애물에 자꾸만 가로막히는 식이다. 흥미로운 건 그 장애물을 해결하는 데 쓸모 없어 뵈던 사물들이 제나름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는 것이다. 요컨대 <엑시트>는 쓸모 없는(듯한) 사람(용남)뿐 아니라 쓸모 없는(듯한) 사물들 하나 하나가 저마다의 쓸모를 이루어내는 기이한 역설을 연출한다. 이것을 ‘쓸모 없음의 쓸모’ ‘쓸모 없음의 역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요컨대 <엑시트>의 크나큰 재미는 바로 이 역설에서 산출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CJ엔터테인먼트

3.

기억나는 대로 복기해보자. 스멀스멀 올라오는 유독 가스를 피해 일가족은 옥상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옥상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경멸스런 점장에 따르면 열쇠는 1층에 있으나 내려가려니 이미 늦은 상태다. 이에 무리에서 벗어난 용남은 웨딩홀 통유리를 깨고 반대쪽 난간으로 넘어가서는 옥상 위로 직접 올라가려 한다. 그러나 유리는 보기보다 완강하다. 이에 주변을 기웃대던 그의 시선에 일련의 사물들이 포착되는데, 그건 바로 벽면에 도열된 크고 작은 상패들이다. 그는 묵직한 상패 하나를 양손에 들어 집어던져서는 통유리 박살에 성공한다.

‘쓸모없음의 쓸모’는 이제 한층 더 본격화한다. 누군가 여남은 술병들을 넣은 가방을 게워내 용남은 로프 같은 생존형 기물들을 대신 욱여 넣는다. 의주 또한 와이어 로프 연결고리와 함께 웨딩홀 안내판에 쓰이던 분필 조각들을 손수건으로 감싸 그에게 건네준다. 그중 분필 조각은 용남의 손이 미끄러지지 않는 가루로써 톡톡히 기여할 것이다. 용남이 놀라운 맨몸 운동 실력을 발휘해 웨딩홀 벽면을 아슬아슬 올라가 옥상에 마침내 당도한 이후에도 사물들의 쓰임은 이어진다. 그 쓰임이란 비단 탈출을 위한 실용적 용도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 자체 유머 소재로도 적절히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엑시트>의 가장 재밌는 대목 중 하나인 예의 그 ‘따따따, 따따, 따, 따따따’ SOS 신을 상기해보자. 시점은 용남의 목숨 건 기지로 일가족 모두 옥상에 오르는 데 성공한 직후다. 캄캄한 하늘 위로 구조 헬기가 보이지만 목놓아 외친들 소용이 없다. 바로 그때, 의주가 용남의 사촌 동생 용혜(신세휘)의 스마트폰 액정불빛에 착안해 모두에게 스마트폰 손전등을 켜보라고 주문한다. 그러고선 이를 전부 머리 위로 들어 SOS 구호을 외치라 는 것이다. “따따따! 따따! 따! 따따따!” 정황상 도무지 웃지 않고 못 배길 이 재기 넘치는 장면은 사촌동생 용수(용민)와 용민(유수빈)이 노래방 기기를 홀에서 가 져옴으로써 다시금 좌중을 자지러지게 만든다. 양손 가득 움켜진 마이크로 용수가 목놓아 이처럼 소리치는 것이다. “사알려~ 주세요! 따따따, 따따···!”(그 순간 용수의 일그러진 표정이 가히 압권이다)

 

4.

여하튼 쓸모 없어 뵈던 사물들(가방, 로프, 분필, 노래방 기기, 스마트폰 손전등 등)의 예상 밖 쓸모에 힘입어 일가족은 무사히 헬기로 구조된다. 다만, 용남과 의주는 제외다. 명목은 무게 초과이고 실질은 아직 러닝타임이 한참 남아서다. 본 게임은 지금부터인 것이다. 그래서 다종다기한 사물들 쓰임에 두 남녀는 계속 의존하게 된다. 살갗에 유독가스가 스치면 화상을 입기에, 분홍빛 쓰레기봉투를 제 온몸에 감싸 테이프로 양껏 둘러서는 양손에 샛노란 고무장갑을 낀다. 그런 다음 유효 시간이 십여 분뿐인 방독면을 써 웨딩홀 바깥으로 냅다 뛰쳐나가는 것이다. 그 뒤에도 피트니스센터의 크고 작은 아령들, 사람 광고가 새겨진 등신대 등이 두 남녀 탈출을 위해 사용된다. 이렇듯 <엑시트>는 쓸모 없는 존재와 쓸모 없는 사물들의 역설적 쓸모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 땅에 뭇 잉여로 간주되는 이들이 기실 나름의 가치를 지녔다는 메시지를 은연중 전한다. 어쩌면 <엑시트>를 향한 대중의 환호엔 이로 인한 위무의 힘이 적잖이 작용했으리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극중 사물들은 다채로운 공간들과 함께 한국 사회 표면을 이루는 기표로써 작용한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 기표가 점점이 쌓여 작금의 한국 사회의 그럴 듯한 점묘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로지 육체미에만 사활을 거는 듯한 한국인들로 인해 여느 때보다 활황기를 맞은 피트니스센터, 예나 지금이나 직장인 회식 1번지인 삼겹살 식당, 밀물과 썰물처럼 인파가 오가는 지하철 그리고 각 공간에 놓인 기물들의 숱한 이미지, 거대한 마천루와 낮은 상가 건물 옥상의 높낮이 대비, 백수들의 값싼 여가 생활 성지인 피씨방과 야밤까지 불야성을 이루는 사교육 학원, 돈 좀 있는 일반인에게 장난감  대용으로 쓰이는 각양각색 드론들, 그중 하나에 부착된 카메라로 용남과 의주의 탈츨 모습을 마치 게임처럼 생중계하는 반윤리적 뉴스 보도, 그 보도를 유튜브로 생중계하는 인기 유튜버들(대도서관과 그의 아내 윰댕, 슈기가 특별 출연했다), 주인공 남녀가 발로 밟고 올라가는 커다란 영덕 대게 모형···.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점이 나열되는 각종 사물과 공간과 인물들과 매체 이미지들이 촘촘한 그물망처럼 엮여 한국 사회의 ‘지금’을 직시하는 대로 이행한다는 사실은 <엑시트>가 이뤄낸 하나의 성취로 다가온다. 그리고 여기, 스타 캐스팅이 아님에도 스타들 못잖은 존재감과 톡톡 튀는 개성을 만발한 조정석과 임윤아 듀오의 호연, 주어진 재료를 적절히 버무릴 줄 아는 신인 감독 이성근의 세련된 연출감이 십분 발휘 되었으니, <엑시트>에 대해 ‘단언컨대’라는 말로 호기 한 번 부린들 어떻겠냐는 것이다.

 

 

* 《쿨투라》 2019년 9월호(통권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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