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음악과 함께, 스스로 음악이 되어
[클래식 산책] 음악과 함께, 스스로 음악이 되어
  • 한정원(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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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음악과 인간의 음악

사람들이 머문 자리에는 늘 음악이 있었다. 보이는 모습이 때로 달랐을 뿐 음악은 마치 숨쉬는 공기처럼 어떤 형태로든 우리 곁에 늘 그렇게 있어왔다. 물론 음악은 사람 없이도 그 자체로 존재해왔다.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매미가 울고 새들이 지저귀는 높은 노랫소리 등도 스스로[自] 그러하게[然] 존재했던 음악이지 않은가.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음악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로 연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존재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 역사가 열린 시점부터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음악’이 있었다고 말이다. 물론 초창기의 음악은 긴 세월 동안 일종의 구전(口傳) 방식으로 이어져왔다. 이전 세대가 부르는 노래를 주의 깊게 듣고 외워 다시 부르고 표현하여 전수해온 것이다. 이후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제례 의식이 반복됨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 기록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 후로 음악은 악보나 가사같은 기록 형태로 진화하게 된다.

악보의 기술과 음악의 발전은 매우 긴밀한 관계에 놓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이미 악보가 생겨났다. 초기 기록은 어떤 소리가 나는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기억과 표현 기교를 남기기 위한 보조적 역할에 머물렀다. 9세기 들어 사람들은 가사를 적고 그 위에 갈고리나 막대 모양의 표식을 추가함으로써 표현 방법을 좀 더 구체화하였고, 조금 지나서는 원하는 음높이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선을 그려 넣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서기 900년 직전에 쓰여진 음악 편람Musica enchiriadis에서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현대적 기보법을 처음 선보인 인물은 서기 1000년경 살았던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이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사 겸 음악 교사였던 그는 악보에 오선 구조를 도입하여 정확한 음높이를 표기하였다. 그 후로는 악보 위에 리듬과 하나 이상의 선율을 동시에 어떻게 표기하느냐의 문제가 큰 관심사로 대두하였는데, 그러한 흐름 위에서 1600년경에 지금과 같은 완전한 악보가 탄생하게 된다.

 

시공을 초월하는 음악의 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싶다면 이른바 ‘바로크 시대’로부터 218년간의 음악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승용차 안에서 라디오로 듣는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이 이때 만들어졌고, 듣는 이들도 이러한 선곡에 대해 큰 불편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는 노래의 길이는 대부분 3, 4분가량인데, 이 정도의 시간을 음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노래를 부르는 이의 목소리와 함께 현악기와 관악기, 기타나 전자음악 악기들이 쉼 없이 소리를 내야 한다. 짧은 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부드럽지만 때로 긴장감 어린 표현이 요구되기도 한다. 또는 후렴구를 두어 함께 부르며 언어만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고조된 감정을 전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알게 모르게 많은 음악을 접하면서 살아간다. 간혹 음악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 행복해하거나 중요한 순간을 함께 지낼 때, 소중한 기억과 함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런 음악이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런 아릿한 추억의 선물이 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17번을 들으면 몇 년 전 작고하신 옛 스승님과 음반 녹음 작업을 함께 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하얗게 세다 못해 노리끼리하게 변해버린 머리에, 꾸부정하게 피아노 의자에 앉아 두꺼운 안경 너머로 깨알처럼 작은 글씨의 오케스트라 총보를 보시며 마치 피아노 악보가 쓰여 있는 듯 거침없이 연주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빠른 리듬의 체르다스Czardas를 들을 때면 고마웠던 친구들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오래 전 모교에서 있었던 연주회에서 내 순서에 앞서 무거운 그랜드피아노를 옮기느라 기운이 소진하여 관객석 맨 앞 좌석에 널브러져 있던 친구들 모습이 생각나 빙그레 웃곤 한다. 연주장을 들어서면서 무대에서 나만이 볼 수 있었던 그 광경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짙은 고마움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모두 음악과 함께, 스스로 음악이 되어 살아온 순간들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우리는 음악을 만날 때 어떤 순간이 함께 떠오르기도 하고, 영원한 기억으로 새겨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심어준 수많은 작품들이 길게는 몇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끊임없이 리뉴얼되며 살아 숨쉬고 있다. 모든 음악은 이처럼 시공을 초월함 힘으로 서로 통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가 현재 즐기고 있는 음악 역시 과거 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깊은 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존재함으로써 고마운 그 무엇

당신의 삶이 음악과 함께 하여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가감 없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음악은 언제나 나의 삶을 풍요롭고 빛나게 하며,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화시켜주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넓고 깊은 눈을 가지게 해준다고 말이다. 또한 음악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깨닫게 하는 선명한 순간을 선사하기도 한다. 음악이란 그렇게 존재함으로써 고마운 그 무엇이다. 슈베르트는 친구 쇼버의 시로 쓴 <음악에 붙여An die Musik D.547>에서, 음악과 함께, 스스로 음악이 되어 살아온 자신의 날들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사랑스런 음악이여 삶의 거친 회오리가 나를 삼키려던
그 너무도 많은 잔인한 시간에
너는 나의 가슴에 따뜻한 사랑의 불씨를 지피고
나를 더 나은 세계로 이끌었는가.


이따금 탄식이 너의 현에서 흘러나와도
너의 달콤하고 성스러운 화음은
행복한 천상을 나에게 열어주었어라
사랑스런 음악이여, 너에게 감사한다!

 

 

* 《쿨투라》 2019년 11월호(통권 6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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