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영원한 신데렐라, 오드리 헵번의 귀환
[영화 월평] 영원한 신데렐라, 오드리 헵번의 귀환
  • 김시균(매일경제 기자)
  • 승인 2020.07.1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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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드리 헵번 특별전, 고전의 부활

  고전(古典)은 보지 않아서 고전인가. 보는 일 자체가 고전(苦戰)이어서 고전인가. 그런데, 이 무슨 시답잖은 농담인가. 아니다. 시답잖지도 않고, 농담은 더더욱 아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고전 영화도 제대로 상영만 한다면 언제든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5월 극장가는 여제 오드리 헵번(1929~1993)이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 시간이었다. 헵번의 20~30대 시절을 수놓은 고전들이 되살아나 코로나19가 드리운 어둠의 장막을 잠시 걷어냈다. 헵번의 전성기를 장식한 1950~60년대 작품들이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와 독립극장 벽을 허물며 한달여 상영된 것이다. 신작들이 부재한 코로나 사태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60~70년 된 고전들이 도합 100개 이상 스크린에 내걸린 건 이례적이다.

  상영작은 여섯 편이었다. 헵번의 최고 출연작 중 하나인 <로마의 휴일>(감독 윌리엄 와일러·1953)부터 <사브리나>(감독 빌리 와일더·1954), <화니 페이스>(감독 스탠리 도넌·1957), <티파니에서 아침을>(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1961), <샤레이드>(감독 스탠리 도넌·1963), <마이 페어 레이디>(감독 조지 큐커·1964)까지다.

  그중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한동안 박스오피스 20위권 내에 안착하며 신작 독립·예술 영화 못잖은 성적을 기록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로마의 휴일>은 지난달 8일 기준 누적 관객수 2만 1362명을, <티파니에서 아침을> 또한 2만 5260명을 모았다. 개봉 2주차만에 모두 5만명 가까이 봤던 것이다.

  불씨를 당긴 건 역설적이게도 멀티플렉스였다. <CGV 오드리 헵번 특별전>이라는 이름으로 헵번의 대표작 6편을 엄선한 기획전이 CGV 50여개 극장(CGV아트하우스 18개, 일반 CGV 상영관 32개)에서 열렸고, 일부 예술영화관에서도 그녀 대표작들을 동시에 내걸었다. 일례로 건국대 KU시네마테크가 CGV와 같은 6편을 틀었다면, 광화문 씨네큐브에서는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4편을, 아트나인에선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3편을 만날 수 있었다.

  CGV아트하우스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운 시기에 다른 예술관들과의 상생을 도모하자는 취지로 동시 상영을 협의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기획전 반응이 이정도로 괜찮을 줄은 내부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고전 콘텐츠도 잘만 기획하면 충분히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음을 확인한 경우”라고 덧붙였다.

〈로마의 휴일〉ⓒ파라마운트 픽쳐스

  세기의 여인, 불멸의 아이콘

  “그녀는 크고 짙은 눈과 큰 입을 갖고 있었고, …(중략)… 쾌활하고 생기가 넘쳤다. 목과 팔은 가늘었고, 어깨는 가냘펐으며, 가슴은 약간 부풀어 있었다. 이것이 아름다운 나타샤의 모습이었다. 순수함과 매혹의 작은 기적.”

  헵번이야말로 나타샤의 현현(顯現)이었던 걸까. 톨스토이가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그린 나타샤의 이미지처럼 헵번에게 완벽히 들어맞는 묘사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킹 비더가 연출한 영화 <전쟁과 평화>(1956)에 나타샤로 분한 적 있는 그녀는 그야말로 “순수함과 매혹의 작은 기적”이었고, “시대를 초월한 스타일의 표본”(스테파니아 리치)이었다.

  그녀는 동시대 배우 마릴린 먼로와는 극점을 이뤘다. 먼로가 풍만한 곡선과 관능의 눈길로 당대 최고의 섹스 심벌에 올랐다면, 낮은 가슴과 가녀린 몸매를 지닌 헵번에겐 귀족적 우아함과 순수미가 있었다. 당대무수한 여배우의 운명이었던 성적 대상화와 관음의 덫에서 그녀는 저 멀리 비켜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회상하듯, “그녀에게는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에게서도 사랑받고 존중받는 재능”(위베르 드 지방시)이 있었다.

  전기 작가이자 영화평론가 알렉산더 워커는 그런 그녀의 스타덤이 “외모와 분위기, 그리고 개성이라는, 다른 사람은 얻기 어려운 특별한 세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가능해진 것”이라고 쓰는데, 이 말인즉 그녀 아우라를 어느 한 요소로만 환원할 수 없음을 짐작게 한다. <사브리나> <하오의 연정>에 헵번을 출연시킨 빌리 와일더 감독은 헵번이 “날 때부터 배우 자질을 타고난 존재”였다며 이처럼 상찬한 바 있다.

“오드리 헵번이 그렇게 되기로 믿으면 그렇게 되었다 …(중략)… 그녀는 남자를 어떻게 껴안아야 하는지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그와 사랑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말한 것과 느끼는 것을 실제로 끌어냈다.”

〈사브리나〉ⓒ파라마운트 픽쳐스

  <로마의 휴일>로 시대의 얼굴이 되다

  어떤 영화는 배우의 얼굴로 기억된다. <로마의 휴일> (1953)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영화만큼 그녀의 싱그러운 매력과 활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도 드물다.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 그리고리 펙이 함께했고, 거장 윌리엄 와일러가 연출했지만, <로마의 휴일>의 진정한 매력이란 어디까지나 헵번 그 자체에 있었다.

   헵번에겐 <로마의 휴일>이 첫 주연작이었다. 발레 댄서이자 뮤지컬 배우이기도 했던 그녀가 영화배우 길을 쭉 걷게 된 것도 이 영화의 전세계적 히트 덕분이었다. 하지만 테스트용 필름을 보기 전까지 파라운트사는 선뜻 캐스팅을 결정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영화의 성공 여부가 여주인공에게 달려 있었던지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던 탓이다. 가뜩이나 테스트용 필름을 찍을 당시 와일러는 로마에 있었고, 이로 인해 테스트 직후에도 카메라는 계속 돌려져야만 했다. 헵번 몰래 있는 그대로의 그녀 매력을 최대한 확인했어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이와 비슷한 재밌는 일화가 있다. 극중 헵번이 반은 웃고 반은 놀란 표정이 되어 펙에게 꺅 소리를 지르는 대목이다. 그 유명한 진실의 석상 장면이다. 극중 펙이 석상의 입 안에 정말로 손이 물린 듯이 장난을 치자 화들짝 놀란 헵번은 “오, 이런 짐승!”이라고 말한다. 훗날 무수히 회자된 이 귀여운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의 저 말이 대사가 아닌 실제 반응이었음을 깨닫는다. 날 것 그대로의 생동감이 너무나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헵번의 전기를 쓴 워커는 이 장면이 그녀가 촬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선 자연스레 한 말을 와일러가 카메라를 계속 돌려 몰래 찍은 것이었다고 알려준다. “테스트 필름에 이어 두 번째로 쓴 작전”이었던 것이다. <로마의 휴일>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영국 공주 앤(헵번)과 미국인 신문기자 조(팩)의 우연한 만남과 짧은 동행에서 비롯한 로맨틱한 사랑이 펼쳐진다. 이야기는 왕궁의 규율과 예법에 짓눌린 앤이 궁 바깥으로 탈출하면서 본궤도에 오르는데, 공주 앤과 배우 오드리 사이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앤이 오드리이고 오드리가 곧 앤이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바깥으로 나와 자유의 공기를 들이쉬는 앤은 그 누구에게서도 구속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이제 스스로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며 로마의 거리를 홀로 누빌 때 느끼는 달콤한 기쁨, 한 미용실로 들어가서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말괄량이 단발 소녀처럼 잘랐을 때의 예의 그 천진한 미소, 오토바이에 펙을 태워달리며 놀라 흥분하던 모습 등은 과연 오드리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싶어진다.

  극의 결말은 멜로드라마의 통속성을 얼마간 거스른다. 때는 앤이 제 나라 대사관 인근으로 도착한 택시 뒷좌석에서 조에게 작별을 고하기 직전이다. 어느 한 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서민의 손이 가닿지 않는 궁정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이제 막 연인이 된 듯했으나 사회적 의무감은 둘을 기어이 갈라놓는다. 이별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앤이 택시에서 내리기 직전, 앤은 조의 입술에 마지막 키스를 건넨다. 세미 실루엣으로 촬영된 이 화면은 이루어질 수 없는 두 남녀 간 욕망과 애끊는 슬픔을 매우 세밀하게 포착해낸다.

  이윽고 시일이 흐른 뒤 열린 앤 공주의 기자회견장. 앤과 조가 마침내 재회하는 이 짧은 순간에 헵번은 마치 몇 년의 세월이 지나가버린 듯 성숙해진 느낌이다. 이제 막 데뷔한 이 눈부신 스타의 미래를 이보다 더 정확히 암시해준 순간은 없을 것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파라마운트 픽쳐스

  반세기 동안 사랑받다

  헵번의 전성기는 1950~1960년대였다. 5월 특별전에서 선보인 6편 모두 그녀가 20~30대에 출연한 대표작이다. 이중 순수한 소녀 이미지에 불과했던 그녀가 조금 더 성숙해진 현대판 신데렐라로 변모한 <사브리나>, 꿈에 그리던 춤의 귀재 스탠리 도넨과 함께 스탭을 맞추었던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가 그녀의 20대 작품을 이룬다. 이후 헵번은 마치 럭셔리 TV 광고처럼 새벽녘 텅 빈 뉴욕 5번가에 홀로 모습을 드러낸 오프닝 신과 그녀 자신이 창가에서 부른 테마곡 ‘문 리버’(Moon River)로 화제를 모은 <티파니에서 아침을>, 파리를 배경으로 스물다섯 살 위인 캐리 그랜트와 경쾌한 세미 판타지풍 영화를 선보인 로맨틱 어드벤처 <셔레이드>, 헵번 없인 상상도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대작 뮤지컬이자, 사진작가 셰실 비튼이 말하길 “<로마의 휴일>에서 나온 공주가 이제는 성장해서 여왕이 된 것 같은 희한한 느낌”을 주는 <마이 페어 레이디>가 그렇게 탄생한다. 이후 <어두워질 때까지>(1967)를 기점으로 그녀의 배우 활동은 사실상 끝이 난다. 1970년대 이후로는 이따금씩만 출연했을 뿐이다.

  스타의 후광에 가려져 덜 알려졌지만, 헵번은 당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고생한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영국 국적의 아버지와 네델란드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녀의 유년기는 시대만큼이나 불우했다. 양친은 일찍이 이혼했고, 열 살부터 열여섯 살(1939~1945)까지 그녀에겐 늘 굶주림이 함께하곤 했다. 나치의 점령지가 된 모국 네덜란드는 가난과 추위, 기아가 일상이었다. 거리엔 죽은 이들이 널브러졌고, 헵번 자신도 영양실조 및 빈혈, 황달 등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맨 바 있다. 가녀린 그녀의 몸매가 이 시기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다.

  이런 경험들에 바탕해 헵번의 말년은 타인을 위한 헌신에 바쳐진다. 유니세프 대사를 자임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간 것이다. 그녀가 소싯적 익힌 6개 국어(영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는 이 시기 아프리카 빈민국을 누비면서 크나큰 힘이 되는데, 실제로 현장엔 통역이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훗날 그녀의 딸 숀 헵번 페러가 회고하듯, 어머니 헵번의 말년이란 “자제의 삶, 타인을 존중하고 휴머니티를 희망하는 삶을 유지해온 내적인 미의 확장”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헵번이 스크린 안과 바깥으로, 삶의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오래 사랑받은 비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녀가 사망한 1993년 1월 이후 2020년 지금의 한국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 《쿨투라》 2020년 6월호(통권 7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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