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이준기란 이름의 꽃
[드라마 월평] 이준기란 이름의 꽃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1.01.07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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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비밀의 숲>의 황시목 검사는 새로운 캐릭터의 탄생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인간적인 교감과 휴머니즘을 특장점으로 삼는 한국 드라마에서 ‘무감정’을 내세운 주인공이라니! 가히 드라마 캐릭터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20년 한국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네 편의 드라마에서 ‘무감정’ 캐릭터가 주연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비밀의 숲>의 황시목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고문영을 통과하며 존재감을 확실히 하다가 <악의 꽃>의 도현수에 이르러 매혹적인 꽃을 활짝 피운다. 방영 시기가 가장 늦은 <앨리스>의 박진겸이 옆길로 새는 듯한 모양새이긴 하지만 2020년을 ‘무감정’ 캐릭터의 해로 정의하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범죄수사와 로맨스, 스릴러와 SF 등 다양한 장르에서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감정’ 캐릭터의 스펙트럼ㅣ은 현재 계속 넓어지는 중이다.

 

  <비밀의 숲>의 황시목
  2020년 기준 한국 드라마에서 악을 소탕하는 방법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악의 대척점인 ‘선’을 통한 정공법, 둘째, 선을 위해 악인이 되어버린 괴물을 활용한 정반합 변증법. <비밀의 숲>의 시즌1을 하드캐리한 이창준 검사는 정경유착과 적폐 청산을 위해 악의 소굴 깊숙이 들어가 자폭하는 대표적인 변증법형인물이다. 선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비극적 현실 인식이 만들어낸 이 시대의 희생양. 그리고 세 번째는 이도 저도 안 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악인보다 더 강력한 악인을 내세우는 ‘이열치열’법이다. 드라마 <나쁜 녀석들>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도저히 인간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냉철한 판단 아래 탄생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무감정’ 캐릭터다. 인간에게 인간성을 제거한 비인간적인 인간, 정의 구현을 위한 AI형 인물의 출현이다. 앞서 언급한 세 유형은 모두 선과 악의 테두리 안에서 뜨거운 심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네 번째 ‘무감정’ 캐릭터는 감정도 없고 공감 능력도 없다. 수술 때문에 감정이 제거된 황시목은 검사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의를 구현한다. 사명감이 아닌 직업의식, 이름하여 차가운 정의다. 그가 추구하는 정의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사고 체계 밖에 존재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해 두려움도 없는 그는 성역 없이 불의를 파헤친다. 2020년 시즌2에 이르러 그의 차가운 정의는 밖이 아니라 안, 즉 범죄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과 경찰로 향한다. 수사권을 두고 정경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그는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 경찰과 검찰 모두에게 칼날을 겨눈다. 수사권 방어를 위해 사건을 조작한 우태하 부장검사는 그의 집요한 수사 때문에 이창준 검사가 자살한 거라며 그를 제지하려 하지만, 그는 감정동요 없이 그대로 수사를 밀어붙인다. 이쯤 되면 황시목을 살아있는 인공 로봇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고문영
  황시목의 무감정 캐릭터가 부정부패로 얼룩진 한국사회를 구원해낼 강인한 ‘히어로’라면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고문영은 어린 시절부터 사이코패스 엄마의 강압적인 가르침과 엄마처럼 너도 괴물이 될 거라는 아버지의 저주를 들으며 자란 불쌍한 ‘어른이’에 불과하다.

  사랑도 우정도 모른 채 “감정 없는 깡통”으로 외롭게 살던 고문영은 문강태와 문상태 형제를 만나 타인과 교감하는 법을 배우며 함께 어울려 산다. 그들과 유사 가족을 형성한 그녀는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주입된 부정적인 자아상을 버리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극 중 그녀의 무감정 캐릭터는 감정 없음의 부재(不在)가 아닌 가능성으로서의 빈칸, 즉 회복하는 인간으로서 희망과 꿈을 상징한다.

  고문영은 문강태에 묻는다. “내가 왜 애야?” 그러자 문강태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한다. “애지, 이쁨받고 싶은 게 보여.” 고문영을 따듯하게 품는 연인 문강태가 괜히 정신병원 보호사란 직업으로 설정된 게 아니다. 영혼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사람이겠는가. 상처받은 슬픈 영혼 고문영에 의해 무감정 캐릭터는 비범한 영웅의 얼굴에서 평범한 우리의 얼굴로, 카타르시스의 대상에서 영혼이 아픈 우리의 페르소나로 전환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 로맨스가 필요해.

 

  <악의 꽃>의 도현수
  <악의 꽃>의 도현수는 배우 이준기의 신들린 연기에 힘입어 감정 없음의 ‘무(無)’에서 감정이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 그 안에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무한(無限)’으로 확장되는 놀라운 캐릭터 진화를 선보인다. 황시목에서 시작해 고문영을 거쳐 도현수에 이르기까지 무감정 캐릭터의 다양한 모습이 도현수 한 사람 안에서 모두 담겨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쓴 도현수는 진짜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황시목 검사처럼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무섭게 질주한다. 언론사 기자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아파트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리기도 하고, 연쇄살인범을 만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담보로 인신매매 조직과 협상하기도 한다. 거침없는 행동력으로 그는 경찰보다 먼저 연쇄살인범을 잡는 데 성공한다.

  진짜 범인을 추적하는 한편 그는 잃어버린 자신의 감정도 찾고 사랑도 배워나간다. 고문영에게 연인 문강태가 있다면 도현수에게는 아내 차지원이 있다. 자신의 모든 상처를 감싸 안는 그녀에게 도현수는 자신의 지난 과거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으며 “난 널 사랑해. 넌 나보다 더 이상한 사람이야. 지원이 네가 내 인생에서 가장 설명 안 되는 부분이야. 비현실적이야”라고 애틋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사이코패스 부모에 의해 공감력이 부족한 무감정 인간으로 길러졌지만 연인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도현수는 고문영과 닮았다.

  <악의 꽃>의 도현수는 ‘차가운 정의’ 황시목과 ‘상처받은 영혼’ 고문영에 머물지 않고 야만과 비인간 시대의 ‘고독한 순교자’로 거듭난다. 드라마 초반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영악한 사이코패스로 그려진다. 하지만 정작 이용당하는 것은 그다. 마을 이장은 그가 사이코패스라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려 그의 아버지가 남긴 돈을 가로챈다. 무감정인 그는 억울해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누나 대신 마을 이장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두려움에 떠는 누나를 다독인다. “나는 원래 그런 거 모르니까 괜찮아 .”

 

  감정이 없어서 냉정하고 잔혹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낌없이 자신을 내려놓는 그의 모습에서 이제껏 우리가 말한 감정과 공감력,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인지 반성하게 된다. 어쩌면 모든 희로애락에서 초연한 도현수야말로 타인과 사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고결한 순교자가 아닐까. 금속공예가인 도현수의 공방 이름은 ‘샛별이 머무는 공간’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못생긴 대장장이가 있는데, 모두가 그를 싫어하지만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비너스, 금성, 샛별,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가 머무는 공간. 극 중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온갖 괴롭힘에 시달리는 상처투성이 도현수를 따뜻하게 품은 아내 차지원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무표정한 얼굴에 가려진 도현수의 순결한 마음처럼 화려한 외모 때문에 이준기의 뛰어난 연기력이 그동안 과소평가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절제된 그의 눈빛하나, 손짓 하나, 그리고 숨결 하나에 삶의 모든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무(無)에서 무한(無限)으로 확장되는 경이로운 삶의 아이러니가 그의 작은 얼굴에서 꽃피우는 걸보고 있노라면 고단하고 남루한 우리의 삶이 언제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는지 깨달을 수 있다. 드라마 종영 후 배우 이준기는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진행했고, 드라마의 깊은 여운을 간직하고 싶은 30여 개국 출신 팬들이 집결했다. 그 안에는 코리안 김민정도 있었다. 오, 이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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