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쳐 비평] 집을 찾아서: 〈스위트홈〉 시즌1
[서브컬쳐 비평] 집을 찾아서: 〈스위트홈〉 시즌1
  • 양진호(영화평론가, 본지 에디터)
  • 승인 2021.04.2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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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1. 격리

  재개발 반대 현수막으로 가득 찬 돌담 옆에 담쟁이 덩굴처럼 계단이 감겨 있다. 계단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는 소년이 화면에 작은 곤충처럼 잡힌다. 곧 클로즈업된 소년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가 들고 있는 모니터가 몸의 절반을 가린다. 세상을 향한 유일한 통로가 바로 그 검은 창인 것처럼. 소년은 이사 올 아파트 앞에서 멈칫한다. 경비원이 사용하던 예초기의 칼날이 돌에 부딪혀 부러지며 날아오는데, 간신히 소년을 비껴가 표지판에 꽂혔기 때문이다. 경비원이 다가와 사과를 하지만 소년은 처음부터 넋이 나가 있었고, 경비원이 말을 걸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소년과 경비원은 낡은 아파트의 아랫부분에 조그맣게 잡힌다. 마치 아파트가 굽어보는 작은 세상에서 개미 두 마리가 잠시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아파트에는 세상과 온전하게 연결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아이를 잃은 뒤에도 빈 유모차를 계속 끌고 다니는 여자, 가부장 콤플렉스 때문에 매일 아내를 때리는 남자, 배다른 오빠와 둘이 살면서도 오빠의 돌봄을 거부하는 여고생,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 히키코모리 소년 차현수. 그들은 헐려 나갈 개미굴 같은 곳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주민들 간의 정상적인 의사소통은 없다. 그들은 각각 자신이 몸을 두고 있는 방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서로 공유되는 시·공간이라고는 엘리베이터 앞이나 계단 정도밖에 없다.

Ⓒ넷플릭스

  동명의 작품인 김칸비(스토리)·황영찬(작화)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스위트홈〉은 한국적 소재 중 하나인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물신(fetish) 역할을 하는 아파트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설정해놓았다. 만약 이 아파트가 강남 한복판에 놓인 거대하고 말끔한 공간이었다면 그들의 증상은 이 이야기에서처럼 괴기스럽게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주민들이 나누는 대화는 사회적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보증물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의미가 비어 있는 기호 가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개발 지역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 ‘그린홈’의 주민들은 다른 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 가능한 사회적 위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화는 그저 비어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스위트홈〉은 이 비어 있는 부분에서 무엇이 튀어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그래서 그린홈 아파트 주민들의 ‘격리’는 우연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기호 가치가 전부인 사람들은 기호 체계가 오염되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잃지만, 그린홈의 주민들은 ‘비어 있는 것’ 속에서 생존의 의미를 찾아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2. 변신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괴물로 변한다. 그런데 그 욕망은 순수한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되고 싶었던 것’ 혹은 ‘이루고 싶었던 것’과 결부된다. 즉 사회적 시선에 의해 형성된 욕망이라는 것이다. 육상 선수였던 사람은 사슴 다리처럼 생긴 다리를 갖고, 대머리였던 사람은 온몸이 털로 뒤덮이고, 운동 중독이었던 사람은 헐크 같은 몸을 갖는다. 그들은 결핍된 요소들에 의해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들의 내면에 분한(ressentiment)을 키웠다. 그들의 욕망은 본래 사회와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것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얻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졌을 때 욕망은 분노로 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 능력을 얻지 못하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그것으로 자신의 온몸을 뒤덮고, 결국 ‘본능’에 가까운 형태로 변신한다. 이것은 ‘이성vs본능’ 구도로 이야기를 펼쳐 나갔던 많은 SF 판타지 서사, 이를테면 〈도쿄 구울〉이나 〈X-Men〉 등의 경우와 비교된다. 이런 작품들에서 대부분 ‘본능’ 쪽에 있는 인물들은 그들의 능력을 실험을 통해, 혹은 태생적으로 갖게 되거나 혹은 전염(감염)에 의해 얻게 되어 ‘생물학적으로’ 인간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스위트홈〉의 괴물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즉 타자의 시선에 의해 생겨난 결핍감의 결정체로서의 욕망에 의해 능력을 얻게 된다. 이것은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덴티티〉(2016)의 주인공인 ‘케빈’의 경우와 비슷하다. 케빈은 어머니의 학대로 인해 정신 분열 증상이 나타나 자아가 23개로 분열되는데, 그동안 전혀 나타나지 않던 스물네 번째의 자아가 그를 지배하면서 괴물이 된다(〈스위트홈〉에서처럼 외형이 변하진 않는다). 그리고 그는 스물네 번째 자아의 능력을 통해 현실 세계를 공격한다. 이 두 작품에서의 괴물은 괴물이 되지 않은 인간과 출발 지점이 같았다. 즉, 괴물화는 어떤 과학적 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사회와의 관계가 무너지면서 나타난 증상이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그리고 이 괴물화의 반대편에 있는 증상이 ‘직업(정신)’이다. 아파트 입구를 봉쇄하고 1층 상가에 있는 보육원에 모인 그린홈 아파트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직업(혹은 직업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취미)의 특성을 활용해 괴물들과 맞선다. 소방대원인 서이경과 군인인 이수웅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타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발현시키고, 사고로 다리를 잃은 기술자 한두식은 아파트 주민들이 괴물과 싸울 수 있도록 무기와 방패를 만들어준다. 평소 검도를 연마해오던 국어 교사 정재헌은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해 정신 무장을 하며 장검으로 괴물의 목을 베고, “흙수저 주제에 의대에 갈” 수 있었을 만큼 생존을 위해 자신을 극도로 이성적인(냉정한) 인물로 만든 이은혁은 그 판단 능력을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활용한다. 또 베이시스트인 박규영은 주인공 차현수가 힘들어할 때 통기타로 음악을 들려주며 그를 위로한다. 그 외에 많은 인물이 괴물들에 맞서 직업적 능력을 발현시킨다. 그런데 이들의 능력이 증상인 이유는, 그것이 사회의 입장에서는 ‘초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직업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잘 돌아가게 만들면 될 뿐인데, 그들은 현실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재난 앞에 노출된 무력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 직업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온전히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이 괴물이 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직업을 방패로 꺼내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아’라는 집을 잃은 이들 중 누군가는 새집으로 ‘괴물’을 선택했고, 다른 누군가는 ‘직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3. ‘진화’ 혹은 ‘고립’될 자유

  그런데 이야기의 주인공인 차현수는 이 두 형태의 집을 모두 거부한다. 그는 학교에서 왕따가 되었고 가족들을 사고로 잃었다(그전에 이미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사회적 연결고리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그는 자살하려고 했지만, 괴물의 등장이라는 예상치 못했던 사고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에게는 직업도 취미도 없었으며, 온라인 게임도 오직 현실 도피를 위해 할 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현수 역시 괴물로 변할 뻔했지만, 옆집 아이들을 노리는 괴물에게 자신의 ‘눈’이나 다름없는 모니터를 던지기도 하고 국어 교사(라기보다는 검사) 정재헌에게 보호받기도 하며, 또 옥상에서 자살 시도를 하기 직전에 발레 연습으로 자신의 눈을 돌린 이은유와의 관계가 좋아지며 현수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밀려난 어떤 인물들보다도 그는 절박한 상태였다. 다른 괴물들은 자신의 결핍감을 몇 가지로 집중시킬 수 있었지만, 현수의 경우에는 일상을 구성하던 요소 중 대부분이 파괴되어 어떤것으로도 그걸 회복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보다 살아남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웠”던 그에게 있어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기적적으로 경험한 소중한 감정들도 그의 ‘존재의 집’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넷플릭스

  그는 망설임 혹은 버팀을 통해 절반은 괴물, 절반은 사람인 상태에 머문다. 그 불안한 상태 때문에 1층에 남아 있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하고 동정받기도 한다. 〈스위트홈〉 시즌 1의 후반부에는 그런 현수에게 또 다른 반인반괴(伴人伴怪)의 인물이 찾아오고, 그는 현수에게 자신들의 상태를 ‘진화’라고 이야기하며 “늑대는 토끼와 살 수 없어”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현수는 자신과 함께 떠나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립’, 즉 인간과 괴물 모두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는 선택을 하려고 한다. 시즌1의 서사는 현수의 선택이 완전히 어떤 지점을 향하지 못하는 곳에서 끝난다.

  〈스위트 홈〉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집’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것은 물리적인 집이기도 하고, 정신적인 집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본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집을 찾아 헤맨다. 자본은 그런 우리에게 끊임없이 ‘인간적인 것과 결별’하라고 명령한다.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국가, 사회, 학교 등은 이미 무너졌으므로 ‘그린홈’ 아파트에서 버티지 말고 빨리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속삭인다. ‘영끌’ ‘빚투’를 통해 어떻게든 집을 가지려고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 작품은 “당신의 진정한 ‘집’은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 있다. 그 질문은 흠잡을 데 없는 서사, 훌륭한 특수효과, 한국 사회에 대한 적확한 알레고리 등을 통해 재현된 게임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한줄기 빛처럼 뚫고 들어온다. 여전히 집 바깥으로 나서기 어려운 코로나19라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잠시나마 차현수가 되어 진화 혹은 고립될 자유를 느껴볼 수 있다.

 


양진호
1985년 서울 출생.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9 《쿨투라》 영화평론 신인상 당선.

 

* 《쿨투라》 2021년 4월호(통권 8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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