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탐방] 기형도문학관
[문학관 탐방] 기형도문학관
  • 최창근(극작가 겸 연출가)
  • 승인 2019.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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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을 채우는 영원한 청춘의 언어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기형도문학관을 소개하는 팸플릿에 나와 있는 시인이 남긴 시작詩作 메모(1988.11)의 한 구절이다. 경기도 광명시 오리로 268.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의 시인 기형도의 집. 빈집을 채우는 영원한 청춘의 언어가 빼곡하게 자리 잡은 이곳은 2017년 11월에 문을 열면서 개관식과 개관식 축하공연을 은성하게 가졌다.

  기형도문학관은 3층으로 된 단아하고 아담한 하얀 크림색 건물이다. 1층 전시실엔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조감도가 펼쳐져 있다. 유년시절과 안양 지역의 문학동인 ‘수리시’에 참여했던 문학청년시절 그리고 등단 이후 ‘시운동’ 동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와 신문기자로 일하던 시기의 일상이 작품 발표 연도와 생애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겹쳐져 있고 등단작인 「안개」와 대표작인 「빈집」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그런가하면 시인을 추억할 수 있는 지인들의 인터뷰와 평문 그리고 후배시인들이 낭송한 기형도의 시들도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다.

  2층엔 자유롭게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는 북 카페와 한국을 대표하는 수 많은 시인들의 시를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도서공간이 구비되어 있다. 이 작은 공간은 비 내리는 저녁이나 눈 내리는 밤이면 고즈넉하게 시를 읽으면서 명상에 잠길 수 있는 환상의 장소이기도 하다. 문학관이 아침에 문을 열고 저녁에 문을 닫기 때문에 출입할 수 있는 시간이 오전이나 오후인 것이 그저 아쉬울 뿐. 3층은 대관 신청이 가능한 강당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창작체험실, 수유실과 수장고 등이 갖춰져 있어서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기형도 시인을 추억하기 위한 발길은 2003년 광명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기형도를 사랑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어 매년 추모의 밤을 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2004년엔 광명시 중앙도서관에 기형도 코너가 마련되었고 그 이듬해엔 그 도서관에서 추모 행사가 개최되었다. 기형도기념사업회에서 지역의 중학생들과 함께 생가를 방문하는 현장교육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2006년엔 광명시가 시민체육관에 기형도 시비를 세웠고 광명문화원이 자체적으로 ‘살아있는 기형도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2008년엔 생가 근처 하얀문화의 집에서 기형도 시인학교가 열렸고 2009년엔 광명시가 기형도 문학공원 조성을 결정하면서 20주기 추모 문학제를 마련했다. 그 해에 기형도기념사업회는 ‘기형도의 흔적을 찾는 시 밟기’ 행사를 새롭게 시작했다. 2012년엔 시인의 생활 터전이었던 소하동에 위치한 운산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와 영상이 있는 시 낭송회 같은 기형도 프로젝트 경진대회를 시작했고 광명문화원이 『기형도 시 세계로 만나는 광명』이라는 제목으로 저서를 발간했다.

  십 년의 세월을 두고 차곡차곡 진행된 기형도를기억하기 위한 여러 행사가 기초가 되어 2013년 광명시는 드디어 기형도문학관을 기형도문학공원 안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2014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사반세기가 된 해이자 기형도문학관 건립 계획을 발표하고 한창 그 준비를 해나가던 때였다. 나역시 수많은 시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영향을 짙게 받으면서 문청시절을 거쳐 왔기에 시인의25주기를 맞아 열렸던 추모 문학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의 총연출을 맡게 된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시인의 글들을 다각도로 조명하기 위해 그가 남긴 시와 소설, 산문을 한국의 젊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와 예술가들이 낭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김행숙 시인이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묻어나는 시 「포도밭 묘지 2」를, 황정은 소설가가 단편소설 「노마네 마을의 개」의 한 부분을, 김상현 성우가여행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 실려 있는 「서고사西固寺 가는 길」을 낭독했다. 생전의 시인과의 추억을 회고하는 자리에는 절친한 친구였던 성석제 소설가와 이영준 문학평론가를 모셨고 당대의 가객이자 소리꾼인 장사익 선생이 시 「엄마생각」에 곡을 붙여 열창했다. 연극배우이자 뮤지컬배우인 배해선이 「밤눈」을 낭송하고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하얀목련>을 불렀다.

  기형도의 시를 다른 장르로 바꿔보는 작업도 병행했다. 미완으로 남은 시 「내 인생의 중세」와 가슴절절한 가족사가 담긴 시 「위험한 가계. 1969」를 합쳐 한 편의 짧은 연극으로, 동화 같은 시 「도로시를 위하여-유년에게 쓴 편지 1」을 춤으로 만들어 무대 위에 올렸다. 마지막으로 전체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로는 정세진 아나운서를 떠올렸다. 시인과 동문이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해서 이미지가 깨끗한 뿐더러 무엇보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방송국이 파업을 할 때 앞장서서 동참했던 개념 있는 아나운서였기 때문이다.

  2019년인 올해 30주기에는 일부러 연출을 맡지 않으려 했다. 그가 묻혀있는 천주교 안성 추모공원에서 거행되는 추모제를 시작으로 시인의 시집을 낸 출판사도 후배 시인들의 헌정시집을 내면서 추모의 밤을 준비하고 있었고 학교 동문들도 심포지엄을 계획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외에도 시인이 나서 자랐던 집터 투어와 기형도 시 일러스트 전시, 서울과 지역의 서점에서 작가를 초청하고 시를 낭독하는 프로그램도 기획 중에 있어서 그의 시가 품고 있는 절제미와 상징적인 함축성을 고려할 때 행사가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광명의 시인 기형도가 지역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 기형도문학관 자체적으로 감당해나가야 할 몫이 따로 있었다. 30주기 추모 콘서트 ‘정거장에서의 충고’는 그러한 차별성을 두고 기형도의 시를 텍스트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해온 지역의 고등학교와 시인, 예술가들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꾸려졌다. 광명시가 후원하고 광명문화재단과 기형도문학관 주최로 광명시민회관에서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콘서트가 마련된 취지가 그러했다.

  개인적으로 기형도 시인과 관련해서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은 그가 남긴 작품들을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마임이나 인형극뿐만 아니라 뮤지컬이나 오페라, 마술과 아트페어같은 새로운 장르의 총체 예술로 변형시켜보는 일이다. 이를테면 재창작에 가까운 작업이라고나 할까. 또한 그의 시 세계를 문학과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의 영역에서만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 신화학이나 천문학,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의 분야로 넓혀서 분석하고 접근해보는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서울역 부근의 학원에서 재수를 하던 1989년 봄 어느 일간지 신문 에서 한 시인이 낙원상가 안에 있는 한 심야극장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운명처럼 만났다. 그때는 그가 누구인지, 한국문학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시인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와의 첫 만남 이후 젊어서 세상을 등진 시인은 늘 내 곁에 머물렀다. 그날이 내게도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알리는 표지판이었고 문학과 예술이라는 좁은 문으로 가기 위한 변곡점이었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고 바뀌었다.

  이제 이 자리를 빌려 밝혀두고 싶다. 그의 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를 모티프로 나의 희곡 「한 잎의 불」이 쓰여 졌음을.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세기 말을 지나 세기 초로 건너오면서 쓴 예술 산문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의 한 구절을 기꺼운 마음으로, 다시 인용해본다.

  여기 한 젊은 시인이 있다.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긴 채 그는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유형의 풍문을 남긴다. 그의 죽음이 남긴 풍문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천리를 가거나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허공을 배회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지나치게 운이 없다고. 살아서 무명시인이었던 그가 죽어서야 겨우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됐다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행운아라고. 살아서 잊히느니 죽어서 기억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느냐고. 그의 요절은 그의 시를 한층 더 빛나게 한다고.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니, 그는 그냥 죽은 자가아니라 이 모질고 험한 지상에서 비애에 가득 찬 젊음의 한때를 소진하고 간 한 사람의 시인이었다. 세상의 오욕과 더러움에 몸을 섞다간 불행한 시인이었다. 시인이었기 때문에 더 한층 불행했던 젊은이였다.

  하늘 위에 떠있는 풍문은 어디까지나 풍문일 따름이다. 그 풍문은 진원지가 밝혀지지 않은 지진의 여파와 같이 맹목적이다. 맹목적이기 때문에 더 위험한 그 풍문은 시인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때로는 과장하기도 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허무한 메아리와도 같은 풍문은 그러나 시효가 다하면 곧 사라지고 말 신기루와도 같다. 풍문을 단순한 풍문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풍문이 시인의 진실을 왜곡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살아남은 자들은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근거 없는 풍문을 근거 있는 사실로 바꾸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것이 여기, 이 땅에 살아남은 자가 그와는 운명을 달리한 죽은 이에 대해 가져야 하는 소박한 예의이자 죽은 자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살아있음에 대한 최소한의 변명이자그 생존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옹호하는 길이다. 

  불꽃을 뿜어 올리는 치열함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조리 소진한 채 열정적인 삶을 살다간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유명한 고백처럼 죽은 자를 단순히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 일이다. 산 자가 있는 한 죽은 자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산 자의 곁에서,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오래 살아있기 때문이다. 강렬한 색채, 형태의 의도적인 왜곡, 춤추는 듯한 굴곡이 심한 선의 질감으로 인간의 내면에 소용돌이 치는 죽음과 병, 고통의 순간을 여과 없이 표현한 에드바르드 뭉크는 다가오는 생의 끝에서 죽음을 그리려 하였다. 우리가 진정으로 삶을 원할 때 죽음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건 어렵지 않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사는 일’ 이라고 일찍이 러시아의 젊은 시인 마야꼬프스키가 스스로 목을 매어 그 짧은 생을 마감한 선배 시인 예세닌을 추도하는 자리에서 절규했듯이 죽음의 반대편에 실은 짐작조차 할 수없는 잔인하고도 끈질긴 삶의 욕망이 뜨거운 용암처럼 펄펄 펄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기형도는 절망뿐인 이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 너머에 있는 희망의 기미를 찾기 위해서 그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 자신과의 보이지 않는 싸움을 수행해 나갔던가! 그가 남긴 검은 상복을 입은 시편들은 그러한 고뇌와 사투의 산물일 뿐이다. 그는 끊임없이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렬하게 살고자 하였다. 말 많은 호사가들에 의해 지적허영과 자기기만으로 심하게 위장되고 얼룩진 신화 속의 한 시인의 초상은 그러므로 그의 본모습이 아니다. 그러한 호들갑스러움은 시인의 진정한 아우라aura를 훼손하여 이미 생물학적으로 목숨이 끊어진그를 다시 한 번 죽이는 길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또 한 번의 죽음, 그러한 사회적 죽음은 그의 생물학적 죽음보다 오히려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시인은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이다.

- 「시월의 노래: 죽음보다 더 깊은 생의 비의悲意를 찾아서」에서

최창근
극작가 겸 연출가. 영화 애호가. 2001년 우리극연구소 새 작가, 새 무대에 희곡을 올리면서 데뷔. 2012년 계간 《시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詩作)을 겸하고 있음. 지은 책으로 희곡집 『봄날은 간다』, 산문집 『인생이여, 고마워요』 『종이로 만든 배』 등이 있음.

 

 

* 《쿨투라》 2019년 4월호(통권 5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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