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욱 작가의 와인 인문학] 리오하Riojac
[고형욱 작가의 와인 인문학] 리오하Riojac
  • 고형욱(작가, 와인평론가)
  • 승인 2019.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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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이미지입니다.

   스페인을 돌아다니다 보면 황량함이 느껴지곤 한다. 키 작은 잡목들이 드문드문, 누런 대지가 이를 드러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사이에 쓸쓸함이 감돈다. 드넓은 이베리아 반도. 이런 스페인에서 올드 영화 팬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영화 <닥터 지바고>를 촬영했다. ‘라라의 테마’가 울려 퍼지는눈 덮인 광야의 대부분을 스페인의 겨울 풍경으로 담아낸 것이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도 마카로니 웨스턴을 대표하는 <황야의 무법자>와 <석양의 무법자>를 미국 서부의 어디가 아니라 스페인에서 찍었다. 뿌연 먼지바람이 이는 거친 땅에서는 구질구질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이처럼 척박한 대지에 축복을 불어넣는 작물이 바로 포도다. 이따금 초록으로 물든 포도밭을 보면 숨이 탁 트인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기타를 타고 아무것도 없을 것같은 들판을 끝없이 따라 들어가다 마지막에 맞닥뜨린 곳이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인 산지 리오하Rioja였다. 리오하는 어느 지역보다도 전통적인 맛에 대한 추구가 강한 곳이다. 요즘 와인 세계는 전통적인맛과 새로운 맛, 혹은 전형적인typical 맛과 국제적인 global 맛의 대결 추세에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맛, 국제적인 맛 쪽으로 추가 기울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맛은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순한데 비해 새로운 맛은 강력한 파워를 가지고 입에 자극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삼삼하고 담백한 음식을 점점 찾기 힘든 이유와도 마찬가지다. 와인 초보자들이 받아들이기에 전통적인 맛은 심심하고 맹맹한 느낌이 든다. 미각이 자극에 익숙해지다보니 부드럽고 그윽한 맛을 감지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소비자들이 점점 자극을 추구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고전적인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하는 리오하는 찾기 힘든 고향의 맛 같은 동네다.

  리오하의 레세르바Reserva 급 와인은 오크통에서 1년 숙성, 그리고 병 속에서 다시 2년 숙성을 시킨 다음 시장에 출시된다. 그보다 위인 그란 레세르바는 오크통 2년, 병입 후 3년 숙성을 시켜서 나오기 때문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포도원에서 이처럼 오랫동안 숙성을 시키려면 바로바로 출시하는 와인에 비해 비용이나 품이 훨씬 더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와인은 시간을 기다릴수록 더욱 깊고 중후한 맛을 드러낸다. 리오하의 와이너리 이름 앞에는 주로 보데가bodega라는 명칭이 붙는다. 원래 보데가는 와인을 숙성하는 공간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더 긴 시간 동안 와인을 숙성시켜 소비자가 마시기 좋은 시기에 출시하는 리오하 와인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리오하 와인은 이국적이다. 프랑스 와인과는 품종도 다르다. 주 품종은 템프라니요Tempranillo다. 일찍 익는 포도라 ‘이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와인에 탄탄한 파워와 풀바디의 풍요로운 맛을 선사한다. 여기에 덥고 건조한 땅에 어울리는 가르나차Garnacha를 주로 블렌딩한다. (가르나차는 프랑스에서는 그르나슈로 불린다.) 두 포도가 만들어내는 강렬함과 부드러움의 조합은 감미롭기만 하다.

  과거에 리오하 와인은 싸구려였다. 프랑스에 전염병 필록세라가 닥쳐 포도나무들이 고사해 버렸을 때, 프랑스의 와인 생산자들은 리오하의 과즙들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와인을 만들기도 했다. 품질이 좋아도, 가난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고급 와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던 리오하는 1970년대를 거치면서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인 생산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작년에 <트립 투 스페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두 친구가 스페인의 맛을 찾아다니는 여행이었다. ‘영화는 별로였지만’ 그 안에 담긴 풍경은 볼만 했다. 리오하도 등장한다. 포도밭과 공룡 조각상들이 펼쳐진 관광지를 지나 프레하노Prejano라는 작은 마을로 간다. ‘월계수 여인숙’이라는 뜻 정도인 식당 라 포사다 델 라우렐La Posadadel Laurel. 숯불이 피어오른다. 직접 재배한 피망을 비롯해서 야채와 고기가 숯불에서 익어간다. 와인 한 잔이 어울리는 풍경이다. 리오하의 정취가 느껴진다. 

고형욱
<투캅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가위> <잠복근무> 외 다수 기획, 제작. <한식대첩 시즌 원> 심사위원, 2016년 조선일보에 재래시장에 대한 탐구인 「시장의 발견」 연재. 『보르도 와인 기다림의 지혜』(한길사) 『와인견문록』(이마고) 『와인의 문화사』(살림) 등 와인과 서구 문화에 대한 다수의 저서 집필.

 

 

* 《쿨투라》 2019년 4월호(통권 5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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