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박쥐]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매혹의 텍스트
[2010 오늘의 영화 - 박쥐]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매혹의 텍스트
  • 전찬일(영화평론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 승인 2010.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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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엔터테인먼트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 등과 함께 2009년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였다. 그 화제성은 국내 개봉(4월 30일) 전후는 물론 2009 칸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과, 심사위원상 수상 등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올드 보이〉의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쥔 지 5년 뒤, 세계 최고 국제 영화제에서 또 다시 본상을 안음으로써 박찬욱 그는 명실상부하게 월드 스타 감독 대열에 진입했다. 생각해보라. 세상의 수많은 감독들이 평생 단 한 번도 입성하기 힘든 칸 경쟁 섹션에 딱 두 차례 공식 초청받았는데, 그 두 번 다 본상을 받았으니, 어찌 그렇다 하지 않겠는가. 또 다른 공식 섹션인 주목할 만한 시선에 진출했지만 수상에 실패한 〈마더〉와 비교하면, 〈박쥐〉의 성취는 단연 주목할 만한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곧 〈박쥐〉가 〈마더〉를 상대로 우세승을 거뒀다는 사실을 뜻했다.

〈마더〉가 칸영화제 직후 국내에서 개봉(5월 28일)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평단 및 저널에서 상당수가 〈마더〉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후 국내 몇몇 영화상을 거치며 두 영화의 승부는 확연히 갈렸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수여하는‘영평상’은 말할 것 없고 대다수 영화상에서, 〈박쥐〉는 무관으로 돌려보내면서 〈마더〉에는 최우수작품상 및 여우주연상(김혜자) 등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칸에서와는 대조적으로, 〈마더〉가 완승을 거둔 것이다. 그 결과는‘2010 오늘의 영화’선정 결과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이 자리에서 〈마더〉가 과연 그만한 영예를 누릴 만한 영화인지 여부를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봉준호에 대한 기대감이 워낙 컸기에, 지난 수십 년간 김혜자 여사는 대한민국 최고 연기자 중 한 분이었기에… 영화에서 그다지 강렬한 감흥을 맛보지 못했고, 때문에 내 2009 베스트 한국 영화를 선정하며 영화를 5위 안에도 포함시키진 않았으나, 〈마더〉는 그럴 자격 충분한 수작임을 인정하련다. 강변하고픈 것은 〈박쥐〉가 2009년 우리 영화계를 빛낸 으뜸 문제적 텍스트이며, 영화의 적잖은 덕목들이 몰이해되거나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CJ엔터테인먼트

〈박쥐〉를 되돌아보며, 지난해 한 영화주간지에 기고했던 프리뷰를 다시금 꼼꼼히 읽어보았다. 찬-반 원고 중 찬성 쪽에 서서 작성했던 것인 바, 그때 그 판단·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 작심하고 새 원고를 쓸 수도 있겠으나, 그 시도를 단념하고 그 원고를 거의 그대로 여기 옮기는 건 그 유효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일반 관객들의 성원이라면 모를까, 사실 박찬욱은 (일개) 영화 평론가의 지지 따위는 그다지 필요치 않을 지도 모른다. 그는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 스타 감독일 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 문화계의 으뜸 브랜드이자 권력자 중 1인이기 때문이다. 박찬욱, 그는 이 땅의 어느 스타들 못잖은 자본이요 이미지며 기호인 것이다. 박찬욱의 스타성·브랜드성·권력성 등은 그러나 크디 큰 굴레요 부담이자 덫일 수도 있다. 그 ‘거대한 존재감’으로 인해 과도한 기대감이 형성되기 십상이며, 그것이 외려 주요 변수로서 감독인 그와, 그가 빚어내는 영화 텍스트들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박찬욱이 동경·선망의, 혹은 시기·질투의 대상일 터기에 더욱 더 그렇다. 〈박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바야흐로 10여 년 전부터 영화로 만들기를 꿈꿔왔다는 “박찬욱 표 뱀파이어 치정 멜로”가 직면·대결해야 할 최대 적은 그 지나친 기대감들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 또한 언론 시사회에서 처음 영화를 보며 일말의 당혹감 내지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감독 특유의 B급 감성적 유머들이 더러 어색하며 불편했다. 대중적 흥행 등을 고려하면 무척이나 비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친 김에 저녁 프리미엄 시사회에서 영화를 다시 봤다. 피곤의 축적으로 조는 통에 몇 군데 놓친 대목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체적 느낌이 확연히 달라졌다. 디테일에 대한 이해도 한결 더 높아졌다. 그 유머의 어색함도 단연 줄어들었다. 아니, 다소 썰렁했던 유머들이 기발하게 비쳤다. 어느 지면에서도 말했듯, 박찬욱은“A급 영화를 B급 감성으로 비틀고, 그 비틀음으로 적잖은 이들을 적잖이 당혹·불편하게 하는 감독”아니던가. 그 유머는 박찬욱 영화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핵심적 인자 아닌가. 그의 영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주요 관문 아닌가. 굳이 작가론적 접근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그렇다면 그 유머는 인정·주목해야 할 박찬욱 영화의 특징 내지 덕목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곰곰이 곱씹어 보니 〈박쥐〉는 여간 잘 만들지 않은, 매혹들(attractions) 수두룩한 문제적 텍스트로 비상했다. 시쳇말로‘좋은 영화’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대체‘좋은 영화’란 어떤 걸까?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을, 숱한 답변들이 가능할 터. 내 답은 다음과 같다. 우선 특정 영화를 쪼갤 때, 즉 분석할 때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이야기적으로나, 다양한 층위의 구성 요소들이 와해되어서는 안 되며 버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요소들을 결합시킬 때 원래의 모습이 되살아나야 함은 물론이다. 한층 더 견고해지고 풍요로워진다면 금상첨화다. 당장 시험해보라. 예의상 그런 예들을 열거하진 않겠지만 얼마나 많은 세상의 영화들이 그 쪼갬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지…….

지면관계상 각 층위의 대표적 요소들을 들어 〈박쥐〉를 쪼개보자. 먼저 시각적 층위의 최우선 요소요 이 영화의 으뜸 미덕이라 할 배우들의 연기 속으로, 다소 깊숙이 들어가 보자. 제 아무리 상투적일지언정 연기를 말하지 않고 영화를 말할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김해숙, 박인환, 신하균, 오대수, 송영창 등 두 주연을 훌륭히 뒷받침해준 조역들도 한 연기들 했지만 제 몫을 100% 해냈다는 정도의 평으로 그치련다. 사실 뱀파이어 신부 상현, 송강호의 연기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클리셰가 되어버리는 탓이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그가 단언컨대 생애의 터닝포인트적 연기를 구현해서다.

ⓒCJ엔터테인먼트

내러티브의 내적 논리상 극적 개연성을 한층 더 강화시켜준 헤어누드 연기는, 스타배우로선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도전이요 실천이란 점에서 그 기념비적 의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진 않기에 남다른 화제를 불러일으키고는 있으나, 그의 전환점적 연기 중 하나일 뿐이다. 착각해선 안 될 점은 자연인 송강호가 아니라 극중 캐릭터 상현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그로써 중간적 존재인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세속인으로서 흡혈귀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것이다. 실내도 아닌 훤히 트인 실외에서, 그를 성자로 오해하며 추종했던 수많은 세상의 어리석은 세속인들 앞에서. 따라서 문제의 노출은 숭고하다기 보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헤어누드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송강호 그가 〈박쥐〉를 통해 그 자신이 도달했던 최상의 경지를 또 다시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십수 편에 이르는 주연작 필모그래피에서 그는 이미 몇 차례 최상의 연기를 펼친 바 있다.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2000)에서 〈밀양〉(2007)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한둘이 아니다. 그 수, 걸작들을 거치며 그는 대한민국 최고 배우의 자리에 등극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경쟁해야만 하는 기이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생애 첫 도전한, 그것도 헤어누드까지 감행한 성애 연기를 통해 또 다시 비상했다. 그러니 어찌 그의 헌신적 열연에 대해 상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계 영화 역사를 통틀어서도 그와 같은 예를 찾기 결코 쉽지 않거늘.

더 큰 상찬은 하지만 상현과 치명적 불륜에 빠져드는 태주 역 김옥빈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재용 감독의 〈다세포 소녀〉(2006), 여균동 감독의 〈1724 기방난동사건〉(2008) 등에서 주, 조연을 맡은바 있지만, 지금껏 그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연기자라는 규정조차 익숙지 않은, 20대 중반의 ‘어린 배우’인 그녀가 송강호의 상대역으로 명배우 조련사 박찬욱에 의해 선택되었을 때 이미 그 가능성은 기대를 머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결국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그 많은 클로즈업들의 가혹한 시련들을 성공적으로 감내해 내면서, 단 한 순간도 송강호에 뒤쳐지지 않으면서…“제2의 전도연 탄생”—최근 난 대중음악 전문 사이트 www.izm.co.kr의 내 고정 지면‘전찬일의 영화 수첩’에‘2000년 한국 영화 베스트 10’을 선정, 발표했다. 거기서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10위작으로 뽑았는 바, 그 이유를 말하며“그러고 보니 ‘제2의 전도연’은 〈박쥐〉의 김옥빈이 아니라 고현정 그녀인 셈이다”라고 썼는데, 고현정이 그만큼 연기를 잘 했다는 의미에서였다. 따라서 김옥빈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란 평가가 과장만은 아닐 발군의 연기를 선보였다. 립 서비스 용 멘트가 아니라 〈박쥐〉의 최대 수확은 김옥빈의 발견이다.

연기 앙상블도 단연 최고 경지다. 〈왕의 남자〉(2005) 등 몇몇 예들이 떠오르긴 하나 연기 조화 면에서 이만한 사례를 찾기란 수월치 않다. 연기에 한정하면 〈박쥐〉가 박찬욱의 최고작이라 한들 과장만은 아니다. 음악 효과 등 청각 층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박찬욱의 오랜 동료인 조영욱 음악 감독의 힘을 빌려, 인상적이었으나 버거웠던 극단의 대위법적 음악 연출로 치달았던 〈복수는 나의 것〉과, 역시 인상적이었으되 다분히 평범했던, 선율 위주의 BG(BackGround)적 연출로 흘렀던 〈올드 보이〉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유지하면서, 보다 원숙한 조화의 음악을 구현한다. 박찬욱 영화의 차별적 덕목인 음향 효과도 그렇거니와 대사 연출도 주목감이다. 무엇보다 태주/김옥빈의 중성적 분위기 물씬 풍기는 매혹적 보이스컬러가 지금 이 순간도, 내 귓전에서 선명히 울리고 있다. 상현/송강호의 기름지면서도 절제된, 양가적 대사 소화도 그렇고.

내러티브 층위에 초점을 맞춰도 〈박쥐〉의 터닝포인트성은 단연 빛을 발한다. 소재 면에서 당장 우리 영화의 외연이 그만큼 더 확장되어 반갑다. 봉준호의 〈괴물〉, 이준익의 〈왕의 남자〉,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 강우석의 〈실미도〉 등을 통해 그랬던 것처럼. 극적 전개에서도 영화는 소위‘잘 짜인 플롯’Well-made Plot의 어떤 수준을 과시한다. 장르적 속성상 다소 당혹스러운 설정이 적잖거늘, 정교한 구성을 통해 그 당혹을 솜씨 좋게 해소시킨다. 생략과 제시 사이를 절묘하게 걷는 이 영화만큼 논리적 내러티브를 구축한 예들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성격화Characterization는 어떤가. 이렇게 인간적이면서도 다층적인 신부 캐릭터가 우리 영화에 있었던가. 팜므 파탈Femme fatale은 어떻고? 얼마나 많은 우리 네 영화 속 여인들이 그저 무늬만 ‘치명적’이었던가. 이제 우리도 태주라는 명실상부한 팜므 파탈을 갖게 되었다(면 과언일까). 신부로서의 자의식으로 인해 고뇌하는 뱀파이어를 운명적으로 유혹해 파국의 길을 걷게 하는‘치명적 여인’.

이쯤 되면 〈박쥐〉를 지지하는 건 당연한 선택 아닐까. 적어도 내겐 그렇다. 하물며 영화가 기대 이상의 지적인 자극과 정서적 울림, 그리고 감각적 재미를 동시에 안겨준다면 더 이상 말해 뭣하랴! 아마 난 상현과 태주가 병실에서 본격적으로 나누는 첫 번째, 롱 테이크 정사 시퀀스의 그 강렬한 감흥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퍽 오랜 동안…….

 


전찬일 영화평론가.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저서로 『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 등이 있음. 《쿨투라》편집위원. chanilj@hanafos.com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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