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여행자] 그저 입양아 영화만은 아닌, 입양감독의 '자전적 스토리'
[2010 오늘의 영화 - 여행자] 그저 입양아 영화만은 아닌, 입양감독의 '자전적 스토리'
  • 양성희
  • 승인 2010.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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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필름

해외입양은 지난해 우리 영화계의 주된 이슈중 하나였다. 하반기 일시에 해외입양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졌다. 영화평론가 황진미는 “억압된 것은 기필코 귀환한다”며“세계 최대 고아 수출국의 그림자처럼, 친부모를 찾아 한국에 온 해외입양아를 소재로 한 다양한 영화들이 나왔다”고 썼다.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 안선경 감독의 〈귀향〉, 주지홍 감독의 〈토끼와 리저드〉가 그것이다. 전수일 감독의 〈영도다리〉는, 자신의 딸을 해외입양 보낸 미혼모 여고생이 딸을 되찾으러 프랑스에 도착하는데서 끝났다. 상업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800만 흥행작 〈국가대표〉의 주인공 하정우는 해외 입양아 출신으로 친어머니를 찾아 한국에 와, 얼굴을 알리려 국가대표가 된다.

물론 해외입양아 소재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91년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이후 적잖은 영화들이 이를 다뤘다. MBC 〈인간시대〉에서 출발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은 해외입양아를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영화이자, 입양아에 대한 정형적인 이미지를 만든 영화였다. 스웨덴 입양아 수잔 브링크는 정체성 혼란에 시달리고, 양부모에게서 차별과 학대를 당한다. 가출, 자살미수 등 고통스런 유년과 사춘기를 지낸 그녀는 끝내 미혼모가 된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대물림하는 것이다(안타깝게도 실존 인물 수잔 브링크와 배우 최진실은 최근 한두 해 사이에 세상을 떴다).

강수연이 양부 살해에 연루된 프랑스 입양아로 나온 〈베를린 리포트〉(1991)에 이어 김기덕 감독은 파리 배경의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에서 스트리퍼로 전락한 한국인 입양아를 등장시켰다. 누드스타 이승희 주연의 〈물 위의 하룻밤〉에서, 〈러브〉 〈영어완전정복〉 〈다세포 소녀〉등에서도 해외입양아들이 나왔다. 다시 황진미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은 모두“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존재, 이질적인 대상이거나 멜랑꼴리한 주체들”이었다.

ⓒ고릴라 필름

실제 어머니가 해외입양아인 다니엘 헤니 주연의 〈마이 파더〉(2007)는 상업영화에서 최근 나온 가장 성공적인 입양소재 영화일 것이다. 수잔 브링크로 상징되던, 불행한 국제고아의 정형성을 깼다. 극중 헤니는 미국인 양부모의 사랑 속에 건강한 청년으로 자란다(물론 정체성 혼란이나 인종적 편견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장성해 뿌리를 찾으러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온 그는 사형수로 수감 중인 아버지를 만난다. 그리고 그 역시 친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그에게는 두 명의 양부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생부의 의미는 무엇인가 묻는다.

지난해 말 나온 세 편의 입양아 영화는 각기 관람 포인트가 다르다. 〈여행자〉는 감독 자신이 입양아 출신인, 자전적인 영화다. 〈귀향〉은 제 핏줄들을 해외에‘내다팔았던’고아수출국의 부끄러운 역사와 그것이 남긴 상혼을 직시한다. 〈토끼와 리저드〉는 해외입양아와 위태한 삶을 이어가는 택시기사라는 외로운 두 존재가 서로를 감싸안는 멜로드라마다.

이중 〈여행자〉는 입양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접근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를 입양아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이 영화를 가장 단순하게 보는 방법일 듯 싶다. 감독은 단지 입양아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또한 해외입양이라는 문제에 대한 사회적 접근만도 아닌, 상처받은 삶에 대한 풍경화로 차분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70년대 가톨릭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을 무대로 해외로 흩어지는 소녀들을 그렸지만, 직접적인 사회비평은 없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정형화된 학대와 폭력으로 얼룩진 보육원도 없다. 대신 인생의 신산함을 일찍 알아버린, 조숙한 아이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는 〈여행자〉라는 제목이 쉽게 암시하듯, 삶의 본질이 떠도는 여행임을, 그래서 뿌리내릴 곳 없고, 부재와 배신을 안고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여행자〉라는 제목은 상처투성이 삶에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그 신산한 삶의 주인공이 여리디 여린 소녀라는 것이, 가슴아플 뿐이다.

영화는 어린 진희(김새론)가 아버지와의 외출에 들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함께 여행가기로 한 아버지는 진희에게 새 옷을 사주고 고기집에 데리고 간다. 진희는 아버지 앞에서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꺼야〉를 부른다. 진희가 그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뜻밖에도 보육원. 아버지는 아무 설명없이 진희를 놔두고 돌아선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희는, 밥을 굶고 말을 안하며 저항하지만, 응석부리지 말라는 차가운 반응만 돌아올 뿐이다. 무엇보다 진희를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왜 버려졌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스스로를 땅에 파묻으려까지 했던 진희는 그러나 다시 일어나고, 먼 프랑스로 입양된다. 영화의 엔딩은, 진희가 홀로 프랑스 공항에 내리는 장면이다. 김새론의, 나이답지않게 정갈하고 다부진 표정 연기가 일품인 장면이다.

영화는 진희의 눈에 비친 당시 보육원 풍경도 함께 그려낸다. 나이 많으면 입양되지 않기 때문에 생리 사실을 숨기고 나이를 깍아 말하는 조숙한 숙희(박도연), 소아마비로 스무 살이 다되도록 입양되지 못하다가 식모살이를 겸해 입양가는 예신(고아성), 처음엔 진희에게 냉담했지만 속깊이 걱정해주는 보모(박명신) 등이다.

아이들은 밤이면 할 일 없는 노인들처럼 화투로 재수를 떼어보고, 입양아를 고르러 온 외국인들의 눈에 띄려 튀는 행동도 한다. 입양가는 아이들이 양부모와 검은 세단을 타고 보육원을 떠날 때, 남은 아이들이 ‘고향의 봄’을 합창하면서 배웅하는 장면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다.

이처럼 영화의 주요 계기들은 ‘이별’ ‘떠남’이다. 영화는, 진희와 아버지의 이별여행으로 시작한다. 예신이 떠나고, 숙희가 떠나고, 다른 아이들이 입양돼 간다. 심지어 진희가 보살피던 병든 새마저 떠난다(죽는다). 엔딩은 진희가 입양돼 가는 장면이다. 그러나 떠남은 동시에 도착이자 출발이다. 이별여행으로 진희는 보육원에 도착하고, 입양되가면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새로운 삶a brand new life이 시작된다. 〈여행자〉가 입양을 소재로 했지만 그저 입양아 영화만은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에서 진희가 고아원에 오게 된 이유는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관객에게 주어진 정보도 충분하지 않다. 아마도 아버지는 재혼을 했으며, 새어머니는 동생을 낳았고, 새어머니가 전처소생인 진희를 부담스러워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런 설정은, 입양아 영화의 도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가난해서, 혹은 미혼모여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버릴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 여느 부모들과 달리, 진희의 아버지는 새 가정 때문에 딸을 버린다. 자신의 행복 때문에 딸을 버리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아버지인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진희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죽도록 미워하며 원망하기보다는, 왜 나를 버렸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한다. 심지어 입양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자전거를 태워주던 아버지의 따뜻한 등을 원망없이 떠올리며 애틋한 그리움에 잠긴다(비행기 시트를 보며 아버지의 등을 떠올리는 이 장면은 마치 가장 강렬한 기억은 촉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에게 상실과 배신감을 안겨주었지만 미워할 수 없고,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은 존재가 아버지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영화는 일렉트라 콤플렉스에 대한 영화로도 읽힌다. 아버지는 결국 새 어머니와 진희 사이에서 진희를 버렸고, 진희는 슬픈 연가 〈당신은 모르실꺼야〉를 주제가처럼 부른다. ‘당신은 모르실꺼야. 얼마나 사랑했는지’의 당신은 (딸이 만나는 최초의 이성인) 아버지다.

영화 속 아버지는 실제 진희의 어린 시절 기억이 그러한 것처럼 내내 모호하다. 한두 장면을 뻬고는 아예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교묘할 정도로 아버지의 얼굴이 프레임 밖으로 빠져 있고 목소리만 들려오기 때문에, 관객들은 설경구가 아버지를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영화 시작 후 한참이 흐르고서야 알아챈다.

이처럼 〈여행자〉는 입양의 문제를 상처와 상실감이라는, 삶의 보다 더 본질적인 그물망으로 그려낸 영화다. 어쩌면 입양아의 삶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만큼 많이 말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어차피 영화는 진희가 입양가기 전까지이기도 하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독은 굳이 입양아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수 있다. 입양아 감독의 입양 영화는 이래야 한다는 도식을 깨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의 관심은, 입양아든 누구든 인생에서 겪는 상처였던 거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입양을 다루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주제와 선입견을 제거하는 것”이라며 “가장 좋은 것은 그들 자신이 그들 자신의 입으로 말하게 하고 그것을 말없이 들어주는 태도일 것”이라고 썼다. 〈여행자〉의 미덕도 그것이다. 입양아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

때문에 〈귀향〉의 대척점에 있는 이 영화가, 해외입양이라는 우리의 역사적 현실과 그들의 삶에 대해 보다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서 꼭 우리가 기대하거나 예상하는 어떤 얘기를, 그들의 입으로 듣고야 말겠다는 것도 폭력적인 태도다. 물론 듀나는 “만약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겐 이득이다. 그때부터 우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썼지만 말이다.

더불어 이 영화에서 놀라운 감수성과 연기력을 선보인 아역배우들에게도 찬사를 보낸다.

 


양성희 《중앙일보》문화부 차장. 영화평론가협회 회원. shyang@joongang.co.kr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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