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해운대] 한국형 재난영화의 새로운 가능성
[2010 오늘의 영화 - 해운대] 한국형 재난영화의 새로운 가능성
  • 남완석
  • 승인 2010.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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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엔터테인먼트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천만 관객’은 한국 영화계의 성공 척도가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겨우 5편의 한국 영화만이 도달했고, 전세계적으로 흥행기록을 모두 갈아 치운 <아바타>만이 외국영화로서는 유일하게 도달한 이 흥행고지는 그래서 대다수 영화인들의 꿈이자 대박 신화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스크린의 독점, 제작비의 상승 등 문제점들을 갖고는 있지만, 천만 영화는 한국영화계의 희망이자 성공을 위한 주문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통산 다섯 번째 천만 영화의 자리에 오른 <해운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 상업영화의 성공 비결이 무엇일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이다.

  수백만의 피서객들로 가득한 해운대에 일본발 메가 쓰나미가 덮친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재난영화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장르영화로서 재난영화는 지진이나 해일, 화산폭발, 소행성의 지구충돌 등 거대한 자연재해나 화재, 항공기추락, 배의 조난 등 기술적 발달의 그늘로서의 인재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 중 하나가 불구경이라고 하는 것처럼,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닥친 재난은 구경꾼인 제 3자들에게 커다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즐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대상이 또 지나치게 나와 상관이 없으면, 재미가 반감된다. 소행성이 지구가 아닌 화성이나 금성에 떨어지는 것은 따라서 재미도 상관도 없다. 그래서 재난영화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나 대상들이 등장한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닷속에 잠기고 옐로우 스톤과 LA가 땅속으로 사라진다. 또한 아무리 장대한 스펙터클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재미가 없다. 아이티 지진참사와는 달리, 북극의 얼음이 몽땅 녹는다는 기상학자들의 경고에도 사람들이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재난영화는 스펙터클한 대 재앙의 장관에다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곁들인다.

ⓒCJ엔터테인먼트

  국내에서 이런 재난영화가 <해운대> 이전에는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다. 그것은 아마도 스펙터클, 특수효과, 제작비상승이라는 영화산업의 공식 때문에 영세한 한국영화계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측면이 강할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가 화산폭발이나 지진등과 같은 대재앙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지대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중들의 두려움이나 공포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해운대>라는 재난영화가, 그것도 이 정도의 규모로 제작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무모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감해 보이는 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영화는 대중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으며 천만 영화의 반열에 등극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성공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최근 할리우드 판 재난영화들이 SF 재난영화라 할 수 있는 <2012>처럼 액션과 CG 등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하고 있는 반면, <해운대>는 재난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휴먼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20분의 러닝타임 중 실제 재난이 일어나는 부분은 마지막 약 40분 정도에 불과하다. 영화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쓰나미가 덮치기 전까지 해운대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바다에 아버지를 잃고 혼자 생계를 꾸려가는 강연희(하지원)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가책을 하며 그녀를 돌보는 최만식(설경구)의 어설프지만, 한편으로는 풋풋한 사랑. 이혼 후 연구에 몰두하다 쓰나미의 위협을 발견하는 김휘(박중훈)와 그와의 사이에서 난 딸을 키우며 억척스럽게 자기 일을 하는 싱글맘 이유진(엄정화)의 어색한 재회와 갈등. 순진한 소방대원 최형식(이민기)과 그에 의해 구출된 후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접근하는 삼수생 김희미(강예원)의 좌충우돌 사랑. 그리고 이들 주변에서 펼쳐지는 가족과 친척, 친구들의 삶의 모습이 번갈아가며 세세하게 그려진다. 여기에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낭만자객>, <1번가의 기적>으로 인물과 이야기의 설정은 다르지만 시종일관 코미디 영화를 연출해 온 윤제균 감독 특유의 익살과 재치가 양념처럼 가미된다. 만식이 야구경기장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장면, 그리고 잘못 샴푸를 먹고 응급실로 실려 가는 장면, 오동춘(김인권)이 만식의 아들을 데리고 길에 나가 앵벌이를 하는 장면, 순진한 소방대원 형식이 발랑 까진 삼수생 희미에게 계속 당하는 장면 등, 영화는 인물들의 삶을 익살과 재치라는 양념으로 빚어낸다. 이런 익살과 재치는 심지어 재난의 상황에서 조차도 등장한다. 동춘이 쓰나미에 밀려 다리에 거꾸로 매달린 배에서 떨어지는 컨테이너 박스를 피하는 장면은 마치 톰과 제리같은 애니메이션에서나 봄직한 슬랩스틱을 보여준다. 그리고 갑자기 커다란 불길을 일으키는 일회용 라이터라는 생활소품이 일종의 주도동기처럼 사용되면서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시킨다.

  반면 재난이 발생한 이후의 스토리는 해운대 전체가 쓰나미에 휩쓸리는 광경을 제외하면, 지극히 간단하다. 만식과 연희가 쓰나미를 피해 전신주에 매달려 사투를 벌이고, 물살에 휩쓸린 만식을 평소 싫어하던 작은아버지 억수(송재호)가 구해준다. 김휘와 이유진은 호텔에 혼자있는 딸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형식은 바다에서 조난당한 희미를 구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은 재난영화 특유의 휴머니즘으로 그려진다. 딸을 구하기 위해 김휘와 이유진은 다시 마음을 모으고, 딸을 구조 헬기에 태워 보낸 후, 함께 포옹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선주이자 재력가인 최억조(송재호)는 재개발을 추진하지만, 결국 시장사람들을 위해 개발 계획을 포기하고, 떠내려가던 조카를 구하고서 결국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소방대원 형식은 바다에 빠진 희미 일행을 구조하다가 기계고장으로 구조가 어려워지자 대신 자신을 희생한다. 이들은 모두 천재지변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보다는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돌보며,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재난영화의 전형적인 휴머니즘의 화신들이다.

  결국 재난영화로서 <해운대>가 지닌 독특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재난영화라는 장르 속에 재치와 익살로 양념한 인간 드라마를 섞어 넣었다는 점이다. 이 점이 <1박2일>이나 <무한도전>처럼 실제 생활에 뿌리를 둔‘리얼 버라이어티’에서 보여주는, 생활이 묻어나는 이야기와 웃음을 선호하는 한국 관객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해운대>가 천만 영화로서 100점짜리 답안을 제시한 것만은 아니다. 영화에는 극적인 장면에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과도한 멜로적 요소들이 첨가되고 있다. 그래서 배우들은 악을 쓰고 그것도 부족해서 배경에는 슬픈 음악이 깔린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 흡인력에 심한 격차가 난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을 하기 때문에, 여러 배우들이 출연해서 연기를 펼치다 보면, 연기력이나 연기의 화학작용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단역에도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설경구와 김인권의 흡인력 강한 연기와 송재호, 김지영 등 중견 연기자들의 탄탄한 연기가 다른 연기자들의 설익은 연기와 제대로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연기자는 많은데 진정 내공과 실력을 갖춘 연기자는 부족하다는 우리 영화계의 현실을 그대로 노출하고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해운대>는 한국 영화계에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다. 먼저 재난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함으로써 한국영화의 장르를 한층 더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본력과 기술력을 익살과 재치로 버무린 인간드라마를 통해 만회함으로써 한국형 재난영화로서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직까지는 한국 관객들이 시각적 볼거리보다는 인간 드라마를 여전히 더 선호함을 입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춘 새로운 시도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해운대>가 한국영화에게 준 진정한 선물이라 할 것이다.


남완석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학사, 석사). 독일 오스나브뤽대학교 졸(영화학 박사). 우석대학교 연극영화학과 부교수.
논문으로「영화 속의 파우스트」, 「감각의 매체적 변환」, 「독일 영화와 역사」와 역서로『영화 - 클나시커 50』, 『영화감독-클나시커 50』등이 있음. jumpcut@dreamwiz.com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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