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한 번의 붓질: 베르나르 프리츠 대담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한 번의 붓질: 베르나르 프리츠 대담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2.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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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Frize, 〈Apa〉, Acrylic and resin on canvas, 91 x 73 cm, 2022View of the exhibition "Les dernières peintures" at Perrotin Seoul,Photo: Andy H. Jung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Bernard Frize, 〈Apa〉, Acrylic and resin on canvas, 91 x 73 cm, 2022View of the exhibition "Les dernières peintures" at Perrotin Seoul,Photo: Andy H. Jung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세계 톱 10 상업화랑 중 하나인 갤러리 페로탕은 파리에 본점을 두고 뉴욕, 도쿄, 홍콩, 상하이, 서울에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화려한 배경과 인맥을 자랑하는 세계 미술시장에서 오직 예술가를 발굴하는 선구안과 비즈니스 능력만으로 입지전적 성공을 거둔 갤러리스트 에마뉘엘 페로탕이 대표다. 베르나르 프리츠는 그런 페로탕이 가장 존경하고 오랫동안 같이 일 해온 프랑스 현대 추상미술의 거장이다. 페로탕 서울에서는 6월 8일부터 7월 15일까지 《마지막 회화Les Dernières peintures》라는 타이틀로 프리츠의 최신작을 선보이는 전시가 열렸다. 2017년 개인전에 이은 두 번째 페로탕 서울 전시이고, 국내 관객에게는 2014년 부산 조현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포함해 총 세 번의 감상 기회 중 가장 프리츠다우면서도 새로운 스타일의 추상화를 마주하는 귀한 자리였다.

필자는 세 번에 걸쳐 이뤄진 프리츠의 국내 개인전 모두에 미술평론을 쓴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는 모더니즘에서 컨템포러리아트까지를 관통해온 마스터로서의 원숙함과 취향과 태도 면에서 언제나 소년일 것 같은 청량함을 함께 갖춘 아티스트다. 그런 그가 나와의 대화에서 매번 독특한 예술적 영감을 제시하고, 자신의 회화에 관한 나의 미학적 해석과 비평에 적극적인 동의를 표한다. 거장으로서의 깊이와, 반면에 결코 자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개방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번 페로탕 서울 전시작들에서 예외 없이 프리츠의 그 같은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화가의 주관적 서사나 정서를 분출하는 식의 추상표현주의 대신 그리기의 조형 규칙과 프로토콜을 끊임없이 변주하는 개념적 회화 실험 자체가 핵심이다. 때문에 나는 이번 전시에 부친 글 「시각, 청각, 촉각의 앙상블: 베르나르 프리츠의 45년 추상화」에서 프리츠의 최근 그림이 감상자로 하여금 통합적 지각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베를린 작업실에서 미리 내 글을 읽고 서울에 온 프리츠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 이해는 더 깊어졌다. 특히 우리의 대담은 베르나르 프리츠의 회화세계에서 미학적 본질에 속하는 표현 형식과 그만의 사유를 언어로 좀 더 풍부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모쪼록 프리츠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다채롭고 선명한 그의 미의식이 가닿기를 바라며 우리 대화의 일부를 여기 옮겨놓는다.

베르나르 프리츠와 강수미 대담, Perrotin Seoul, 2022. 6. 9.
베르나르 프리츠와 강수미 대담, Perrotin Seoul, 2022. 6. 9.

Repentir, Pentimento, 일필휘지

강수미(이하 SM) 2019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당신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나는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했다. 당시 전시 제목이 《Bernard Frize: Sans Repentir》, 번역하면 ‘후회없이’ 또는 ‘회개하지 않고’다. 이 제목은 여러 가지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거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나 작가만의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나의 해석을 먼저 말하자면, ‘Sans Repentir’는 한편으로 40년 이상의 예술가 경력을 쌓고 프랑스 현대회화를 대표하는 거장의 회고전에 맞는 매우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현으로 읽힌다. 다른 한편, 그 제목은 어떠한 규칙이나 억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 규칙은 당신이 수십 년 동안 지켜온 추상화 창작의 규칙이 아닌가. 가령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화가의 주관성을 억제하기 위해 오히려 붓질을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해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퐁피두 회고전 제목인 ‘후회 없이’는 그러한 당신의 추상화 미학 원칙에 어떠한 아쉬움이나 회한도 없다는 뜻이 아닐까? 또 그 전시 제목을 ‘회개하지 않고’라는 관점에서 종교로 확장시켜 보면, 예술가로서 당신이 여태까지 종교적 규율이나 사회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지향하며 미술을 해왔다는 의미부여도 가능할 것 같다.

Bernard Frize(이하 BF) 당신이 미리 보내준 질문을 읽었다. 좋은 토론이 되리라 생각한다. 질문 관련해서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이탈리아어 ‘펜티멘토pentimento’다. 사실 불어 ‘르퐁티에repentir’를 영어 ‘repentance’로 옮기면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 또한 퐁피두 전시 제목은 내가 아니라 미술관 큐레이터 안젤라 롱프가 정했다. 그 의미는 펜티멘토에 가까운데, 회화에서 화가가 한 번 그린 그림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그리는 경우를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피카소가 그렇게 많이 그렸다. 가령 팔을 그렸다가 지워버린 상태 같은 것이 보인다. 때문에 나의 퐁피두 전시명인 ‘르퐁티에 없이’는 곧 ‘지우고 다시 그리는 법 없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불어로 르퐁티에는 그렇게 ‘펜티멘토’ 같은 것인 동시에 상당히 종교적인 용어다. 즉 ‘회개’를 내포하기에 좀 독특한 용어라 할 수 있다. 안젤라는 내 전시에 양가적인 의미를 내포한 개념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고, 그래서 ‘르퐁티에’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SM 충분히 이해한다. 어찌 보면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해 같은 의미의 차원에 도달한 것 같다. 한 번 그린 그림을 수정하거나 덧칠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당신의 추상화는 일관된 형식미학을 구축했다.

BF 덧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이탈리아어를 쓰고 싶은데 ‘알라 프리마alla prima’가 그것이다. ‘처음’, ‘한 번으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르퐁티에 없이’는 다시 말해 ‘한 번의 붓질’이자 ‘리터치 안 하기’이고, 그런 맥락에서 당신이 내 작업 방식에서 일회적인 붓질의 반복을 지목한 것은 옳다.

SM 당신이 말한 이탈리아의 ‘펜티멘토’ 문화와 한국의 ‘서예’ 문화 사이에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리에게는 한자로 ‘일필휘지一筆揮之’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뜻이 펜티멘토처럼 ‘한 번에 한 획으로 끝남’을 의미하고 수정하거나 덧칠하지 않는 태도를 긍정하는 데 있다. 게다가 내 생각에 두 단어는 한 번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함의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 점에서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한국어 모두 상통하지 않을까.

BF 매우 근접한 것 같다.

Bernard Frize, 〈Whan〉, Acrylic and resin on canvas, 110 x 85 cm, 2022.
Bernard Frize, 〈Whan〉, Acrylic and resin on canvas, 110 x 85 cm, 2022.

작품명, 랜덤 액세스, 자유

SM 두 번째 질문도 제목과 연관된다. 내가 이번에 쓴 글에서 논했듯이 당신의 최신 작품들은 이전과 다른 형식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형식적 아름다움은 우리의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미학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내가 당신의 2022년 그림들에 대해 “시각, 청각, 촉각의 앙상블”이라고 판단한 이유가 그렇다. 그런데 그 그림들 각각에는 ‘Silus’, ‘Apa’, ‘Sabo’, ‘Kova’, ‘Ader’ 제목이 부여됐다. 그 제목들의 의미를 말해줄 수 있는가? 나는 그 제목들이 사람의 이름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고, 게임 속 캐릭터나 상품명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해당 그림들을 보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내 안에서는 그 그림들을 감상하는 일과 그림의 제목들을 유추하는 일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평행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나는 그 작품의 제목에 그림의 내용을 억지로 끼워 맞춰서 해석하지 않았다. 또한 반대로 그림에서 본 것을 즉자적인 언어로 주석 다는 일 없이 당신의 작품에 관한 글을 썼다. 그 시간은 내 사고의 고정관념을 자유롭게 풀어헤쳐 다양한 의미를 상상하는 과정이었다. 동시에 눈으로 그림을 보면서 소리를 듣고, 질감을 피부로 느끼는 것 같은 감각적 순간이었다. 마치 언어적 의미를 포옹한 채 그 너머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이미지를 연상하면 좋겠다. 내가 이번에 쓴 글 말미에 “프리츠의 추상화를 감상할 당신에게…‘그림을 본다’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권한 이유가 거기 있다.

BF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결코 작품에 특별한 제목을 부여하지 않는다. 나는 현재 베를린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이전 파리 스튜디오에서부터 그림의 제목은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서 명명했다. 당시 스튜디오 조수가 나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면서 각각의 작품에 부여할 이름을 컴퓨터에서 추출해 기입해 넣은 것이다.

SM 이는 당신의 최근 작업에서도 매우 중요한 성격이 아닌가?!

BF 그래서 매번 조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제목을 찾아주기 바라. 단순히 문자를 조합한 이름을 부탁하네. 듣기에 좋으면서 짧은 것일수록 좋아.”라고 말했다. 그렇게 찾은 작품 제목에는 이름도 있고 숫자도 있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분류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SM 랜덤 액세스라고 봐도 될까?

BF 그렇다. 무작위다. 내 그림의 제목은 특별한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나조차 모른다. 그것은 다분히 유희적이다.

SM 맞다. 정말 유희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름 짓는 방식은 사실상 당신이 당신의 그림에서 화가의 의도나 주관성을 배제하려는 실험과 연관된 태도라고 생각한다.

BF 정확하다. 내 작품의 제목이 어떠한 시적인 함의도 없도록 하는 이유다.

SM 당신은 1970년대부터 이미 예술가의 주관이나 습관적 표현을 배제한 추상화를 탐구했다. 독일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1960년대부터 사진을 기반으로 한 회화, 리얼리즘적 추상회화를 시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점에서 나는 당신의 회화세계가 역설적인 의미에서 화가의 능동적 창작, 기존 미학에서 자유로운 표현방식, 인간 중심적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적 사유라고 평하고 싶다.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2년 8월호(통권 9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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