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집과 그림: 이고운의 ‘서걱이며 걷는 밤’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집과 그림: 이고운의 ‘서걱이며 걷는 밤’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2.11.0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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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 〈별빛 가루〉, 2015. 《이고운: 서걱이며 걷는 밤》 하우스갤러리 2303 전시 전경, 2022. 사진: 강수미

미술의 집

미술작품을 감상자의 마음 깊숙이까지 들여보낼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한 점의 그림이 나의 심장을 평온히 뛰게 하고, 나의 머리에 봄바람 같은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희로애락 가리지 않고 인생의 다양한 속살과 값진 의미를 찾고 얻는다면 작품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있어야 좋을까? 우리는 흔히 미술작품은 하얀색 벽으로 둘러싸인 네모난 공간, 즉 화이트큐브white-cube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감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벽에 걸린 그림이 단독으로 돋보일 수 있도록 액자 밖 주위는 완벽히 정리되어야 한다. 조각품이든 공예품이든 예술이 ‘일상용품’ 따위와 혼동되면 안 되니까 작품은 특별 제작한 좌대 위에 놓인다. 이는 진부하지만 미술의 역사, 특히 유럽 미술사에서 18세기 중후반 이후 자리 잡은 모더니즘 전시 형식이고 미술제도의 한 갈래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선사시대 동굴벽화의 공간이 화이트큐브 박물관이었을 리 없다. 조선시대 〈백자청화 운룡문 호〉는 왕실의 위엄을 담아 빚어졌지만, 제작 당시에 지금의 소장처인 리움미술관 고미술품 디스플레이를 예견했을 리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인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내 식당 벽에 그려졌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제주도에 유배된 자신에게 잊지 않고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전한 두루마리다. 몇몇 예만 들었지만 우리가 미술관, 전시, 작품으로 당연시하는 많은 존재와 행위는 사실상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그 삶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테면 고대 인류부터 미술은 생명의 유한함에 저항하면서, 곁에 두고 보고 어루만지면서, 마음을 담아 전하고 감탄하면서 이뤄졌다. 딱히 놀라운 미적 경험이나 거창한 아트 이벤트를 목적해서가 아니라 매일의 지속과 현실의 디테일에 끼어 공존했다. 그것이 원래 미술이 기거해온 집이다. 현대의 미술관이나 갤러리, 아트페어, 옥션하우스, 쇼룸에 훨씬 앞서.

이고운, 〈꿈 속의 정원 Ⅰ〉, 캔버스에 아크릴, 100x100cm, 2015. 《이고운: 서걱이며 걷는 밤》하우스갤러리 2303 전시 전경, 2022.
이고운, 〈꿈 속의 정원 Ⅰ〉, 캔버스에 아크릴, 100x100cm, 2015. 《이고운: 서걱이며 걷는 밤》하우스갤러리 2303 전시 전경, 2022.

하우스갤러리 2303과 이고운의 그림들

새삼 이와 같은 얘기를 꺼낼 계기의 전시가 있다. ‘하우스갤러리 2303’에서 열린 이고운 개인전 《서걱이며 걷는 밤》(9.19-11.11)이다. 작가가 지난 십여 년간 작업한 회화 22점이 선보이는데, 전시장이 놀랍게도 잠실의 한 고층아파트다. 아파트 상가나 집의 내부를 개조한 갤러리가 아니다. 실제로 부부와 초등학생 아들이 거주하는 30평대 아파트에서 미술가의 전시와 집주인 가족의 생활이 동시에 이뤄지는 생경한 방식의 갤러리다. 이름을 힌트로 풀어보자면 ‘아파트 2303호 집house이 갤러리’인 곳이다. 집주인이자 하우스갤러리 2303의 기획자인 강언덕 씨가 리서치를 통해 미술가를 찾고, 그 미술가와 협업해서 집 안 곳곳에 작품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만든 개인전을 3개월 동안 관람객에게 공개한다. 물론 그러는 가운데 세 가족의 일상도 그대로 이어진다. 2020년 팬데믹으로 우리의 바깥/사회/문화예술 활동이 급격히 제한됐을 때, 그림책 작가 임효영을 초대해 연 개인전을 시작으로 이고운 개인전까지 벌써 여섯 번째 기획이 실현되었다.

이번 《서걱이며 걷는 밤》에서는 이고운의 크고 작은 그림들이 거실 벽부터 부엌 싱크대까지, 아이 방 작은 책상 위에서 부부침실의 큰 벽까지, 복도의 소담한 사이 공간을 지나 베란다의 식물들 옆으로까지 섬세하지만 편안한 구성과 배치로 선보였다. 예를 들어 2015년 작 〈꿈속의 정원 Ⅰ〉은 식탁 뒤편 벽에 걸렸는데 그림의 주조색인 보라색과 밤의 은밀한 정원을 묘사한 형상들의 기운이 그림 밖 실내까지 흘러나와 신비한 분위기로 이끈다. 덕분에 평소 가족들이 눈 마주치며 식사하는 친밀성의 장소는 스스로의 역할을 버리지 않은 채 기분 좋은 긴장감을 자아내게 되었다. 또 소년의 방에는 이고운이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한 모티프로 그린 〈빗속의 12살 제임스〉와 〈빗속의 용감한 오리〉 소품이 걸렸다. 두 작품 모두 잔잔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 그림에서는 토마스와 친구들 기차가, 다른 그림에서는 러버덕이 물위를 떠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야말로 그 방의 어린이를 통해서 숨 쉴 것 같은 미술이다.

《이고운: 서걱이며 걷는 밤》 하우스갤러리 2303 전시 전경, 2022. 사진: 강수미
《이고운: 서걱이며 걷는 밤》 하우스갤러리 2303 전시 전경, 2022. 사진: 강수미

이렇듯 하우스갤러리 2303에서는 한 가정의 집 내부가 작품의 전시공간이다. 하지만 집주인 가족들만이 감상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관람을 원하는 사람이 하우스갤러리 2303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신청을 하면 초대 일정을 맞춰 전시를 볼 수 있다. 하루에 대략 1~2회, 소수의 인원이 작가와 기획자의 환대 속에서 느긋하고 사적인 기분으로 집 안 곳곳에 큐레이팅 된 작품들을 감상한다. 그것은 집들이 같은 경험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정제된 감상, 상당한 미적 경험과 교육적 이해를 도모하지만 분명 공공적이고 훈육된 그 미술 감상법과도 판이하게 다른 경험이다. 내밀하지만, 원치 않게 남의 사생활에 끼인 것 같은 곤혹스러움은 별로 없다. 공식적인 전시를 공식적으로 초대받아 즐기기 때문이다. 대신 미술이 일상생활과 적절한 질서로 섞여 있기에 작품과의 친밀한 관계 맺기가 가능하다. 소수의 감상자에 맞추지만, VVIP 관객을 위한 배타적이고 특권적인 관람이 아니다. 하우스갤러리 2303에서의 미술 감상은 자신의 마음 안으로, 생활 속으로 미술을 들여놓고 싶어 하는 익명들을 위한 ‘집안의 전시보기’라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로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이 화려한 인프라스트럭처 구축과 무제한적 확장을 거듭하면서 사실상 미술 향유의 가장 기본이라 할 ‘나와 작품의 내밀한 교감’ 같은 것은 컨셉에 불과한 것이 됐다. 참여, 협업, 교류, 공유, 공감, 공존 등이 현대 미술가들과 큐레이터, 미술비평가와 이론가들의 주제어로 넘쳐나는 상황에서 감상자는 오히려 거창하고 위세 넘치는 작품들, 스펙터클 전시 공간에서 미술과 교감할 길을 잃었다. 대신 패셔너블한 제스처와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을 얻었다. 어떻게 보면 꽤나 큰 모순이다.

《이고운: 서걱이며 걷는 밤》 하우스갤러리 2303 전시 전경, 2022. 사진: 강수미
《이고운: 서걱이며 걷는 밤》 하우스갤러리 2303 전시 전경, 2022. 사진: 강수미

서정적 회화, 가정 내 큐레이팅

이고운의 그림들은 하우스갤러리 2303에서 가정생활의 켜와 미술 전문성의 켜 사이에 아주 미세하지만 실체가 있는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 효과로 집안사람들의 일상적 순간에도 이고운의 회화에 담긴 서정적 감성이 녹아 흐르고, 일부러 이 아파트-갤러리를 찾는 낯선 감상자들에게도 타인의 생활 공기와 미술작품의 아우라가 동시에 감지된다. 집주인 부부의 침실에 들어서려 할 때 바로 보이는 맞은편 벽에는 이고운의 〈별빛 가루〉가 전시돼 있다. 큰 원형의 검은 화면에 별들이 제목 그대로 ‘별빛 가루’처럼 쏟아져 내리고, 그걸 오롯이 손으로 받으려는 듯 허공으로 양팔을 뻗고 한 발을 내딛는 여인이 묘사된 그림이다. 서정성이 한도 초과될 듯한 그 그림 옆으로는 수녀원의 그것처럼 정갈히 정리된 화장대가, 그 앞으로는 오래 두고 아끼며 쓴 듯 청결하게 적당히 닳은 흰색 시트 덮인 침대가 있다.

여기를 전시장으로 여기며 들어선 감상자는 순간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라면 떠올리기 힘든 상상과 미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림 속의 별들이 은총처럼 침실 안으로 퍼져 나와 그 방에서 날마다 잠들고 일어날 이들을 돌보리니. 누빔 천이 해져서 살짝 드러난 시트 속 솜과 화장대 거울 앞에 놓인 성모상의 자애로운 팔 벌림이 그림 속 여인의 손 안으로 모여 비정한 바깥세상의 찬 공기를 견뎌낼 온기를 만들지니. 가령 이러한 환상적 감상이 이뤄진다면 하우스갤러리 2303의 이고운 개인전은 그야말로 ‘큐레이팅’의 몫을 한 셈이다. 영어 ‘curating’의 라틴어 어원인 ‘쿠라레cūrāre’가 본래 ‘돌보다, 마음을 쓰다’를 뜻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현대미술의 다원적 실험과 퍼포먼스 경향이 전 세계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강제 정지되고 온라인으로 명맥을 유지했던 지난 3년. 그 시간 동안 국내외 미술계 전문가들은 하드웨어로서의 미술관과 대규모 기획들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그 성찰의 답을 여기서 열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필요한 미술은 아주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차원에서 길어 올려야 한다는 원리는 다시금 강조할 수 있다.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2년 11월호(통권 1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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