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일상 혹은, 은폐된 영화 형식의 발견
[2016 오늘의 영화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일상 혹은, 은폐된 영화 형식의 발견
  • 이재복
  • 승인 2016.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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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의 미학성을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일상’이다. 그의 영화에서 일상은 가장 중요한 형식이면서 동시에 내용을 이룬다. 미학의 기본 원리를 일상이나 사물에 대한 낯설게 하기라는 고전적인 규정을 상기한다면 그의 영화의 문제의식은 상투성의 파괴와 같은 실험적인 성찰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낯설게 하기의 원리가 형식주의자들을 거쳐 소격 효과로 유명한 브레히트와 초현실주의자들에 와서 결실을 맺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상이 진부하고 상투적이라면 이들에게 그것은 파괴와 실험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형식을 발견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익숙하고 상투적인 일상이 그 이면에 은폐하고 있는 낯선 형식을 드러낼 때 발견과 공감에서 오는 미적 충격은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다. 

우리가 홍상수 영화에서 낯선 세계와 형식을 발견하게 된다거나 여기에서 일정한 공감과 미적 충격을 체험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일상이 익숙하고 상투적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대하는 의식 자체가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의식 주체가 이 고정관념을 깨지 못한다면 낯선 세계도 또 형식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영화는 의식 주체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는 다양한 실험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일상을 낯설게 하여 여기에 은폐된 세계를 발견하려는 의식 주체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에 다름 아니다. 일상에 은폐된 세계를 탈은폐(발견)하기 위해서는 의식 주체의 지각이 어떤 개념이나 도구화된 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감각은 열려 있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형식은 반복과 차이이다. 이 반복과 차이가 영화의 한 원리로 작용하면서 일상은 발견의 의미를 드러낸다. 만일 일상이 차이 없이 반복만 계속된다면 그것은 낡고 상투적인 차원에서 머물 뿐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질적인 도약을 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는 동일한 시점에서 두 번 반복된다. 그때마다 〈봄이 오면〉의 멜로디가 들려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펼쳐지는 일상은 각각 다른 이야기의 층위를 드러낸다. 하나의 일상이 다른 층위로 드러난다는 것은 의식 주체의 일상에 대한 해석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속 사건은 의식 주체의 이러한 태도에 의해 선택되고 또 구성된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각기 다른 이야기의 층위에 대해 의식 주체는 ‘그때’와 ‘지금’으로 명명한 뒤, 여기에 ‘틀리다’와 ‘맞다’라고 의미 부여를 한다. 그렇다면 의식 주체는 왜 이런 식으로 의미 부여를 한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 가치 평가적인 면이 내재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함춘수(정재영 분)이다. 이 영화는 그의 의식의 흐름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그는 분명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이다. 전반부의 함춘수는 표피적인 삶의 언저리에서 배회하고 불안을 느끼는 그런 존재이고, 후반부의 함춘수는 삶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진실의 심층을 들여다보려는 그런 존재이다. 깊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 자의 모습이란 온갖 가식과 포즈로 점철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숨기려 할 뿐 여기에 대해 어떤 반성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반성이 없는 자에게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나 지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말이나 행동은 부박할 수밖에 없고 또 어떤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전반부에 그가 윤희정(김민희 분)을 만나 나누는 대화와 행동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영화 전반부에서 무언가 겉돌고 있는, 그래서 삶과 전혀 밀착되지 않는 그의 불안한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가 자신의 삶과 마주하지 못한 채 자기 반성의 과정을 망각하면 윤희정은 더 이상 후반부에 등장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통해 삶의 좌표와 진정성을 모색하고 있는 그런 인물이다. 이 둘이 영화의 서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이들의 입장이나 관점이 충돌하여 파탄에 이르거나 아니면 갈등을 해결하여 화해에 이르거나 해야 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후자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화해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 데에는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영화 속에서 그것은 윤희정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시인과 농부에서의 알몸 사건, 스시 집에서 서로 주거나 받거니 하면서 마시는 술, 주영실이 건네준 시집 등으로 드러난다. 이 질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것은 모두 ‘삶의 표피성’에 대한 반성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반성이 없었기에 그는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 채 거짓된 포즈만을 취했던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그때’와 ‘틀린 것’을 환기하는 질료이면서 동시에 ‘지금’과 ‘맞는 것’을 매개하고 환기하는 질료이기도 하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형식이 생경하지 않게 낯선 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데에는 매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함춘수의 의식은 이러한 매개를 통해 질적인 도약을 이룬다. 그의 의식의 질적인 도약은 윤희정과의 관계에 새로운 길을 튼다. 그의 진정성을 확인한 그녀가 마음의 문을 열면서 겉돌던 둘 사이의 관계는 점차 친밀성을 띠게 된다. 둘 사이의 관계는 표피적인 차원을 넘어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의 차원으로 발전한다. 영화의 말미에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그녀가 박물관을 찾는 장면은 그 이해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그가 만든 영화를 통해 그를 좀 더 이해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이 영화의 주제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모토를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그때의 틀림 혹은 지금의 맞음에 대한 둘 사이의 공감은 ‘화성행궁’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필연적인 하나의 사건으로 바꿔 놓는다. 

이들의 만남이 우연으로 굳어져 버리지 않고 그것이 필연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일정한 서사적 긴장과 전망을 획득하고 있다.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단조롭거나 단선적이지 않고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서사 라인을 구축하고 있다거나 그것이 진부하거나 표피적인 차원을 넘어 세계의 이면에 은폐된 낯선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데에는 이러한 의식 주체의 발견의 감각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라는 일상에 낯선 의식이 투사되어 있지 않다면 영화는 지루하리만치 의미 없는 반복과 상투적인 사건의 흐름만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걸쳐 드러나는 ‘화성행궁’ — ‘윤희정의 화실’ — ‘스시 집’ — ‘시인과 농부’ — ‘박물관’ 등의 시공간적 의미가 각기 다른 문맥을 거느리면서 두 인물의 의식의 질적 도약을 추동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에 반복과 차이의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일상과 욕망, 반복과 차이, 발견의 감각 등은 홍상수의 영화를 해석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역시 이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까지의 그의 영화에 대한 반복이면서 동시에 차이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그는 일상이 지닌 욕망의 어두운 부분을 부각시켜 그 안에 은폐되어 있는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하거나 불가해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것을 넘어 세계와의 화해를 통해 평정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알 수 있듯이 의식 주체의 세계에 대한 객관화된 이해와 판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이어지는 흐름은 의식의 질적 도약이라고 할 만큼 세계를 보는 관점, 행동 등에서 차이를 보이며, 이것은 그대로 영화의 형식으로 이어진다. 영화 속 함춘수와 윤희정이 보여주는 가식적이거나 상투적이지 않은 자연스럽고 진솔한 감정은 이들의 일상 혹은 삶의 지평이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 혹은 삶이 은폐하고 있는 세계를 발견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은 영화의 문법이나 형식의 확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의 영화는 잘 말해 주고 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듯’이 우리의 일상이나 삶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차이를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영화의 형식이나 문법이 결정된다는 것을, 홍상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재복 문학평론가.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등이 있음. 고석규비평문학상, 젊은평론가상, 편운문학상, 애지문학상 수상. 『쿨투라』 『본질과현상』 『시와사상』 『시로여는세상』 편집위원. 현재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겸 한양대 미래문화연구. momjb@hanmail.net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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