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내일을 위한 시간] 당신은 아직 선택할 수 있다. 다르덴 형제의 지지하고 싶은 변화
[2016 오늘의 영화 - 내일을 위한 시간] 당신은 아직 선택할 수 있다. 다르덴 형제의 지지하고 싶은 변화
  • 송경원
  • 승인 2016.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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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초중반 카메라를 흔들림을 그대로 전하는 핸드헬드 기법이 독립 영화계에 유행처럼 번진 시기가 있었다. 다르덴 형제(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의 인장처럼 받아들여진 이 촬영 방식은 인물의 뒤에 붙어 이야기로서의 사건 대신 사건 주위의 풍경을 체험시킨다. 저예산 영화와 딱 맞아떨어지는 촬영 조건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흔들리는 화면이 주는 사실감은 영화 학도들에게 어지간히 강렬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를 처음 접했을 땐 현기증이 날만큼 묵직한 사실감에 잠시 먹먹해졌던 사람 중 하나다. 

이후 〈아들〉(2002), 〈더 차일드〉(2005), 〈로나의 침묵〉(2008)까지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공개될 때마다 찬사와 사랑을 받았지만 한편으론 조금씩 활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볼멘소리를 듣기도 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엔 충격이라 해도 좋을 핸드헬드 기법이 이젠 익숙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을 접했을 때 한동안 잊고 있던 그 날카로운 감각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유럽 사회의 일면을 포착하는 통찰력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를 향한 다르덴 형제의 태도는 여전히 진귀하다. 사회적 리얼리즘, 절충적 형식주의, 파열음을 내는 카메라, 뭐라 부르건 상관없다. 다르덴 형제는 그저 다르덴 형제다. 핸드헬드 기법이 오직 다르덴만의 독창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로제타〉에서 선보인 핸드헬드는 유일하다. 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변두리 사람들,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와 싸우면서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소녀의 뒷모습을 찍을 때 그것은 형식과 메시지의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기 때문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다르덴은 멈추지 않는다

그간 다르덴 형제의 서사는 이야기로서의 완결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늘을 버티고 살아가는 소외되고 우울한 이들의 긴 일상 중에서 특정 부분을 뚝 잘라 내어 대뜸 내민다. 이전 상황에 대한 설명도,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낙관도 없다. 관객은 한정된 정보의 조합으로 상황을 유추해야만 한다. 그것은 주어진 퍼즐은 조각난 몽타주가 아니라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사진적 진실을 바탕으로 한 ‘현재’다. 다르덴 형제는 말, 대사, 스토리로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카메라를 통해 (유럽의) 현재를 이해하도록 그저 보여준다. 관객은 카메라라는 이름의 작은 사각 구멍을 통해 사실로서의 영상을 목격한다. 철저한 계산 하에 재현된 카메라의 움직임과 인물의 동선, 롱 테이크의 화면은 오직 그것을 위함이다. 인물의 어깨 위에서 공간을 훑는 카메라를 통해 눈앞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 주변을 둘러싼 구조, 그러니까 시스템의 문제를 더듬는 것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이 제시하는 ‘오늘의 문제’는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윤리적 선택을 강요하는, 자본이라는 이름의 비틀린 시스템이다. 태양열 판 제조 회사를 다니는 산드라(마리옹 코티야르)는 우울증으로 병가 중이다. 그런데 회사로 복귀하려고 보니 상황이 바뀌어 있다. 쉬는 사이 그녀의 업무는 다른 직원들이 나누어 처리하고 있었고 회사는 한 번 줄어든 인력을 다시 늘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산드라의 복귀 대신 그녀의 몫보다 조금 못한 금액을 나머지 직원들에게 보너스로 제시하며 해고를 위한 투표까지 진행하는 것이다. 사측의 압력으로 첫 번째 투표 결과가 보너스를 받는 쪽으로 나온다. 하지만 일부 직원들의 반발로 다행히 두 번째 투표 기회가 주어지고, 산드라는 주말 동안 몇몇 동료의 도움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일일이 직장 동료들의 집을 방문한다.

“지난 10년간의 경제 위기로 소외된 사람들의 사연을 다루고자 했다”는 다르덴 형제의 말처럼 〈내일을 위한 시간〉은 비단 유럽의 오늘만이 아니라 세계의 오늘, 우리의 오늘을 이야기한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국경을 넘어 세상을 잠식해 가는 자본주의 민낯을 직시하는 영화다. 다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사측과 노동자의 단순한 대결 구도로 끌고 가지 않는다. 대신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산드라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와 그녀가 마주하는 동료들의 얼굴을 통해 이 사태가 얼마나 끔찍하고 폭력적인지 드러낸다.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는 조금씩 양보해서 동료를 살려주는 게 옳은 일이라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도 당장 한푼이 아쉬운 처지다. 보너스 1천 유로는 누군가에는 그저 1천 유로지만 어떤 이에게는 자식의 학자금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가족의 약값이다. 약자가 약자를 밀어낼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앞에서 섣불리 개인의 윤리를 외칠 수는 없다. 그조차 또 다른 폭력이자 강요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딜레마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에 있지 않다. 시스템이 다수결 등 민주적 방식을 위장해 개인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내몰 수 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준다는 게 영화의 핵심이다. 

우울과 피로, 양자택일의 함정을 넘어선 진짜 선택

어떤 경우 자유의지는 일종의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지만 종종 양자택일의 선택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다. 영화 속 공장 노동자들은 얼핏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 사이 윤리적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에겐 처음부터 선택지 따윈 없었다. 신자유주의라는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욕망이 이 모든 상황을 제어할 뿐이다. 다르덴 형제가 애써 드러내려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이전 작품들에서 한 인물의 뒤를 철저히 따르던 다르덴의 카메라는 이제 산드라가 만나는 12명의 동료들의 반응들에 좀 더 신경을 기울인다. 동료들의 집을 방문해 읍소해야 하는 산드라의 지친 발걸음만큼 중요한 건 그녀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각양각색의 반응들이다. 종전까지 다르덴의 카메라가 현실의 특정 단면을 고스란히 잘라 내어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다양한 일면들을 구성하기 위해 애쓴다. 눈앞의 현실과 당장의 밥벌이에 쫓겨 큰 그림을 볼 틈이 없는 관객들에게 현실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하에 생존 중인 우리들의 얼굴이라 해도 좋겠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다르덴 형제의 어떤 영화보다 명료하게 정해진 결과를 향해 달려간다. 일부에서는 이런 방식 때문에 인물과 카메라 사이에 존재했던 치열한 긴장감이 다소 옅어졌다고도 평가한다. 서사에 포섭되지 않았던 다르덴의 화술이 이번에는 이야기 구성 쪽으로 지나치게 기운 게 아니냐는 것이다. 순수하게 영화 연출의 차원에서 접근하자면 정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나는 비슷한 듯 조금 달라진 다르덴의 이번 변화가 반드시 필요했던 선택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부조리를 관찰한다. 동시에 오늘날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망가진 시스템을 고발한다. 사건만 놓고 보자면 국지적이고 제한적인 관찰이지만 한편으론 큰 그림을 바라보기 위해 정교하게 구성된 일종의 우화이기도 한 셈이다. 그 주제적인 측면만으로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다. 적어도 이 주제에 관한 한, 관찰과 고발에 머물지 않고 힘 있게 호소하는 목적론적인 연출과 구성이 필요했다고 본다. 다르덴 형제는 특정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필요한 최적의 형식을 찾아 신중하게 걸음을 떼는 중이다. 그 걸음이 산드라의 지쳤지만 단호한 걸음걸이와 닮아 몹시 미덥다. 내가 다르덴의 변화를 긍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우리의 이야기다. 노동자를 기득권으로 매도하는, 실로 비이성적인 현실 속을 살아가는 2016년의 대한민국엔 이런 영화가 좀 더 필요하다. 최후의 순간 산드라는 양자택일의 함정을 거부하고 제3의 길로 나아간다. 자본의 제어되지 않는 욕망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다움과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길. 물론 그 길을 선택한다는 건 몹시도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불행 중 다행은 당신에게도 아직 그 길을 선택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거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위안이자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한 희망이다. 

 


송경원 《씨네21》 기자. 영화평론가.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동국대 영상대학원 영화이론 박사과정 수료. 부산일보 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등의 여러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았음. 인디다큐페스티발 프로그래머. 영화 뿐 아니라 게임, 애니메이션 등 영상문화 전반에 대해 비평 활동. sokimera@naver.com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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