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더 랍스터]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기발한 상상
[2016 오늘의 영화 - 더 랍스터]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기발한 상상
  • 강성률
  • 승인 2016.02.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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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이론가 배리 랭포드는 멜로드라마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미국 영화 전반의 장르 시스템 이전이자 너머이며 동시에 그 모두”라고 말했다. 린다 윌리엄스 역시 “멜로드라마는 미국 대중 영화의 기본 양식”이라고 했다. 이들의 진술에서 내가 눈여겨본 것은 멜로드라마를 여성 영화, 가족 멜로드라마로 세분해서 이 말의 진위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양식으로서의 멜로드라마’와 ‘장르로서의 멜로드라마’를 구분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멜로드라마가 장르 이전에 존재하는, 즉 모든 장르에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어떤 정서가 아닐까, 라는 주장이었다. 

생각해 보라. 세상의 그 많은 장르 가운데 멜로적 정서를 내장하고 있지 않은 장르가 존재하는가? 멜로 정서를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뿐이지, 대부분의 장르는 멜로 정서를 지니고 있다. 물론 그것이 강한 것일 수도 약한 것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연인과 가족의 정서에 바탕을 둔 멜로적 코드는 대부분의 영화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멜로드라마가 장르 이전에 존재한다거나 미국 대중 영화의 기본 양식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우리는 멜로적 정서에 포획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세상의 그 무엇이 우리를 멜로적 정서에 가두고 있느냐고? 생각해 보면, 그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남녀 간의 사랑만큼 인간이 갈구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는 태생적으로 낭만적 정서를 품고 있지 않은가? 정말로 어려운 것은 남녀 간의 멜로적 정서를 영화 속에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담아내는 방법일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역설이 발생한다. 어떻게 익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담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다. 세상의 모든 멜로드라마가 다루는 그 흔하디흔한 사랑을, 새로우면서도 보편적으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창작자의 숙제인지도 모른다. 사랑 이야기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사랑 이야기도 결국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야 하는 함정에 필연적으로 빠진다. 이 역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벗어나기. 

새로움이 영화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더 랍스터〉는 분명 좋은 영화이다. 기존의 사랑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발상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때문에 처음에는 영화적 설정을 받아들이기 바쁘다. 영화적 설정은 대략 이렇다.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상은 ‘커플들 세상’이다. 커플이 되지 못하면 사회에서 추방되어 커플 메이킹 호텔에 머물러야 한다. 솔로인 남녀들이 머무는 풍경 좋은 그곳에서 커플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도 45일 동안 커플이 되지 못하면 자신이 선택한 동물이 되어 숲속에 버려지게 된다. 이게 도무지 말이 되는가? 세상이 어떻게 ‘커플 천국’, ‘솔로 지옥’의 이분법적 세상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인간이 어떻게 동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감독은 시치미 뚝 떼고 그게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이라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단지 근시라는 이유 때문에 부인에게 버림받아 커플 메이킹 호텔에 오게 된 데이비드는 그곳에서도 쉽게 새로운 짝을 찾지 못한다. 영화의 잔재미는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기상천외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아침마다 여성 도우미가 남성의 사타구니에 앉아 자극을 한다거나, 절대 자위를 하면 안 된다거나, 솔로보다 커플이 좋은 이유를 꽤나 유치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거나, 결국 커플이 되지 못해 동물이 되었을 때 어떤 동물이 될 것인지 진지하게 토론하는 대목을 보면 입가에 웃음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솔로라서 개가 되어 버린 형과 함께 입소한 데이비드의 모습을 보면 곧 그도, 그가 원하는 랍스터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이 이상하고 초현실적인 공간의 아우라는 보는 이에게 심각한 걱정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니라 실없는 웃음을 선사한다. 어차피 이 현실을 관객은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초현실로 인식해 현실과 괴리시켜 버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이다.

그러나 호텔의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상향은 아니지만 단지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짝을 맺었던 데이비드는 그녀를 버리고 숲으로 도망치고 만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가 도망간 곳은 솔로들의 세상이다. 커플이 되면 안 되는 곳. 당연히 연애는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곳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처럼 근시를 가진 짝을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사랑해야 할 곳에서는 사랑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도망쳐 나왔더니) 사랑하면 안 되는 곳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만났다. 이제 그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그들만의 수화를 만들고 수시로 사랑을 나누지만 발각되고(?) 만다. 

영화에서 보는 이를 가장 크게 놀라게 한 것은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솔로 세상’에서 ‘커플 사회’로 도망쳐 나온 이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했다. 솔로 세상의 우두머리가 데이비드의 짝에게 벌로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린 것. 커플 세상에 나온 데이비드는 자신도 눈을 찔려 장님이 되려 한다. 눈이 멀어지면 다른 감각이 살아난다고 그의 짝도 위로를 한다. 영화는 눈을 찌르는 데이비드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당연히 의문이 인다. 데이비드는 그녀를 그토록 사랑한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고 도망을 온 것이 아니겠는가. 최근 작고한 신영복은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며 특유의 글씨체로 적었는데, 이 영화의 엔딩에도 맞는 문장 같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동정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더 랍스터〉는 기괴하고 무서운 이야기(또는 황당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지 설정을 현실과는 다르게 했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이 영화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특수한 공간에서 매우 특이하게 다루는 영화, 그러니까 보편적 소재를 특수한 방식으로 그린 영화라고 생각한다. 새롭지만 익숙한 이야기. 이 영화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재현에서 매우 특이한 방식을 활용한 이 영화를 나는 ‘환상 영화’라고 생각한다. 보르헤스의 환상 소설과 같은 의미의 환상 영화라고 칭하고 싶은 것이다. 단지 특수한 설정만 현실과 전혀 다르게 구성해 놓았을 따름이지, 나머지는 우리의 현실, 일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커플이 되어야만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고, 솔로가 되면 동물이 되어 추방된다는 설정만 다를 뿐이고,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정서의 소중함과 아름다움, 위대함을 다루는 것은 같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환상 영화는 단지 판타지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환상 영화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주지만, 다만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어떤 틈을 열고 들어가 초현실적인 세상으로 우리는 안내할 따름인데, 그 초현실적인 세상에서 일상으로 설정되는 초현실을 보면서 지금의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문학 이론가이자 구조주의자인 토도로프는 “초자연적인 모습의 사건 앞에서, 자연적인 이치만을 아는 이들이 망설이는 것, 그것이 환상 장르”라고 말했다. 그렇다. 환상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이치가 통용되는 세상 앞에서 우리를 망설이게 만든다. 이 망설임은 초현실적인 세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현실 세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환상 영화는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를 특이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어 한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사람을 통해 벌레의 세상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 한다. 환상은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정 사건의 과장되거나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랍스터〉는 왜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큰 흥행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이 영화가 나름 선전한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혼, 취업,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무엇보다 궁금하다.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위대한 힘을 지닌 사랑의 확인이었을까? 현실이 그 무엇이든 세상은 점점 솔로의 시대로 가고 있다.  

 


강성률 영화평론가,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문화산업연구소 소장. 저서로는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바보』 『영화는 역사다』 『친일영화의 해부학』 『감독들 12』 『은막에 새겨진 삶, 영화』 『한국의 영화감독 4인을 말하다 - 김지운, 임상수, 민병훈, 최동훈』 등이 있음. rosebud70@hanmail.net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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