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 갈 수 있다면…
[2016 오늘의 영화 -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 갈 수 있다면…
  • 임정식
  • 승인 2016.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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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얼핏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이다. 카메라는 인물들의 자잘한 일상을 마치 일기처럼 담아낸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봐야 할 극적 갈등도 없다. 배우들은 자신의 실제 생활이 그러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계절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화면에 녹아 있고, 시간의 흐름은 그에 걸맞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다. 또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전통 가옥과 골목길, 바닷가, 식당과 같은 장소들은 익숙하고 친근하다. 감독은 그 단조롭고 나른한 선율 속에 삶의 비의를 보물찾기 쪽지처럼 감쪽같이 숨겨 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소재나 사건 자체는 자극적이라는 것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사치, 요시노, 치카라는 세 자매가 15년 전 집을 나간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바람이 나서 아내와 세 딸을 버린 사람이다. 여기에 낯선 이복동생의 등장, 남편에 이어 자식들을 버린 어머니와의 재회, 세 자매의 실연과 불륜이 차례로 펼쳐진다. 막장 드라마에나 어울릴 법한 내용이다. 그런데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고, 따뜻하고, 아늑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가족 서사’가 담담하면서도 유쾌하게 펼쳐진다. 감독의 장인다운 솜씨가 빛나는 대목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특별하지만 평범한 혹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인물들은 모두 내면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간호사인 서른 살 맏언니 사치와 열다섯 살 중학생인 이복동생 스즈가 대표적이다. 사치는 아버지가 가출하고 어머니마저 집을 나간 10대 중반부터 소녀 가장이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을 가슴에 묻고, 두 동생을 기숙사 사감처럼 보살피고 있다. 스즈는 사치의 이복동생이다. 스즈는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계모 품에서 자란다. 하지만 아버지마저 병으로 죽고 만다. 그래서 스즈는 “나는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어린 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스즈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 슬픔을 마음의 오지에 숨겨 놓고 산다. 스즈는 매실주에 취해 잠꼬대를 하면서 “아빠는 바보, 새엄마 미워.”라고 속내를 털어놓을 뿐이다. 동병상련이었을까? 사치는 첫눈에 스즈의 내면에 감춰진 슬픔을 알아챈다. 그래서 역까지 배웅 나온 스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한다. 

사치가 스즈에게 동거를 제안하는 이 장면에 영화의 핵심이 담겨 있다. 슬픔과 상처가 파괴적인 복수심으로 이어지지 않고 연민과 동정, 애틋한 사랑으로 피어난다. 사치는 동생들에게 아버지에 대해 비난조로 말한다. 우유부단해서 빚보증이나 서고 동정심만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는 속일 수 없다.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홀로 남겨졌던 사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홀로 남겨진 어린 스즈를 외면하지 못한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사치는 자신이 스즈의 나이였을 때, 스즈의 처지가 됐을 때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사치는 스즈에게 손을 내밀고, 스즈는 주저 없이 그 손을 잡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사건의 연쇄와 순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비슷한 에피소드가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나타난다. 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보자.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후, 네 자매는 야트막한 산에 오른다. 스즈가 제일 좋아하는 곳, 아버지와 자주 올랐던 곳이다. 이 산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은 세 자매가 사는 바닷가 마을 카마쿠라와 똑같다. 사치, 요시노, 치카는 신기한 일이라고 감탄한다. 그런데 네 자매는 나중에 카마쿠라의 뒷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본다. 사치가 아버지와 자주 올랐던 곳이다. 아버지—세 자매—스즈가 한 핏줄로 이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치카가 아버지의 취미였던 낚시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반복과 순환 구조는 영화의 주제와 연관된다. 스즈의 잠꼬대가 있은 후, 사치는 스즈와 둘이서 산에 오른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슬픔을 토해 낸다. 사치는 스즈에게 “이제 엄마 얘기를 해도 된다.”고 말한다. 스즈에게 엄마라는 단어는 금기어였는데, 사치는 이 족쇄를 풀어 준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상처와 슬픔을 알아채는 사치와 속 깊은 스즈는 서로를 껴안는다. 두 사람은 눈물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 이 치유가 아버지가 좋아했던 장소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아버지는 특이한 존재다. 그는 영화에는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인물의 내면 변화나 서사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오직 원망의 대상이기만 했다면,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는 사건이 에피소드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기승전결로 구분할 수 있는 뚜렷한 서사가 없다. 사건과 사건의 인과관계도 느슨하다. 게다가 감독은 인물의 행동과 의미에 대해서 즉각 설명해 주지 않는다. 사치가 스즈에게 카마쿠라의 집에서 같이 살자고 말할 때, 관객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중에 사치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스토리를 재구성해 보면,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띠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 방법은 음식이나 옷, 매실주와 관련된 에피소드에서도 나타난다.  

사치는 할머니의 제사 때 어머니를 만나서 말다툼을 한다. 어머니가 집을 팔자고 말하자 “엄마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날을 세운다. 영화에서 갈등이 거의 유일하게 표면화된 장면이다. 그러나 사치의 원망은 금세 풀어진다. 할머니 묘소에 다녀온 뒤, 할머니가 담근 매실주를 어머니에게 선물로 준다. 화해의 몸짓이다. 해산물 카레를 만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치는 스즈를 일부러 주방으로 불러내 카레를 함께 만든다. 해산물 카레는 엄마가 딸들에게 유일하게 직접 해준 음식이다. 사치는 이 요리를 스즈에게 전수해 주고 싶은 것이다. 할머니가 심은 매실나무에서 딴 열매로 매실주를 담그는 것도, 할머니의 유카타를 사치가 입고 사치의 유카타는 스즈가 입는 것도 같은 의미다. 할머니—아버지와 어머니—사치, 요시노, 치카—스즈로 이어지면서 삶은 계속된다. 조상과 후손, 부모와 자식, 존재조차 몰랐던 이복 자매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어울려 살아간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재잘거리며 흘러가는 이른 봄날의 시냇물을 닮았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쉬지 않고 흐르되 이야기의 보폭은 작고 굴곡이 없다. 겉으로 드러난 갈등도 거세지 않아서 잔물결처럼 밀려왔다 밀려갈 따름이다. 이러한 특징은 영화 속의 사건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감독의 세계관과 솜씨를 동시에 엿볼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울퉁불퉁하고 모난 돌멩이를 매끄럽게 다듬어 예술품으로 만들어 낸다. 노련한 석공石工을 연상시킨다. 

영화에는 결말이라 할 만한 매듭이 없다. 사치, 요시노, 치카 그리고 스즈는 이웃집 아주머니 니노야미의 장례식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산책을 한다. 이들은 곧이어 집에 와서 마루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옷이나 샤워 순서로 티격태격하고, 동생의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 주고,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릴 것이다. 감독은 삶이란 그렇게 시냇물처럼 흘러가고, 마침내 바다에 당도하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그 물결 위에는 때로 살얼음이 끼고, 때로 연분홍 꽃잎이 내려앉기도 할 것이다. 안타까운 죽음이 있고, 설레는 풋사랑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치는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유부남과 불륜에 빠지고, 동생들은 언니의 사랑을 수용하는 것이리라.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는 장례식 장면이 두 차례 나온다. 사치의 아버지와 바다 고양이 식당 주인 니노미야의 장례식이다. 이 장례식에서 우는 사람은 스즈의 계모 뿐이다. 그녀는 형식적으로만 남편을 간병했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고인을 진정 아끼고 사랑했던 인물들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감독은 이것이 삶의 순리이며, 바닷가 마을에서 살아가는 법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치의 아버지와 니노야마는 죽기 직전에 같은 말을 남긴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어린 영혼의 슬픔과 상처마저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이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 가고 싶어진다.

 


임정식 고려대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저서로 『대중스타 이미지 탐구1 장동건』 『대중스타 이미지 탐구2 김혜수』가 있음. 스포츠조선 연예부장-문화팀장, 영화평론가, 고려대 강사. dada8847@naver.com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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