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버드맨] 할리우드의 현실과 판타지, 혹은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
[2016 오늘의 영화 - 버드맨] 할리우드의 현실과 판타지, 혹은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
  • 윤성은
  • 승인 2016.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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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등의 슈퍼히어로를 연상시키는 ‘버드맨’은 새 모양의 수트를 입고 스크린을 누비며 악의 무리를 처단하던 영웅이‘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버드맨은, 아니 〈버드맨〉 시리즈의 주연 배우였던 ‘리건’은 브로드웨이의 낡은 건물에서 연극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리건이 버드맨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는 버드맨을 연기했을 뿐이다. 이제 그는 연극의 제작과 주연을 맡아 전성기 시절 명성을 되찾고자 한다.

연기자들이 배역과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재의 영화들은 꾸준히 만들어져왔으며 근 몇 년 간만 보더라도 훌륭한 참고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블랙 스완Black Swan〉(2011)의 젊은 발레리나는 완벽한 흑조 연기를 위해 목숨을 걸고, 〈클라우즈 오브 쉴스 마리아Clouds of Sils Maria〉(2014)의 중견 연기자는 극중 인물의 감정에 함몰될까 끊임없이 히스테리를 부리며, 〈맵 투 더 스타Maps To The Stars〉(2014)에는 엄마가 연기했던 배역을 따냄으로써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여배우가 등장한다. 리건을 포함한 이런 인물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극심한 정서적 불안과 강박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하지만—공교롭게도—다른 세 작품 모두 여성이 주인공인데 반해 리건이 남성, 그것도 중년의 남성이라는 사실은 그의 현실적 절박함을 잘 드러낸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가장으로서도, 배우로서도 벼랑 끝에 서있으며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자신을 슈퍼히어로의 수트와 분리시킴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버드맨〉에 대한 비평적 찬사는 참신하면서도 주제 및 분위기에 적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높은 수준의 영화 형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은 리건의 상황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구현해내고 있는데 먼저, 공연장 내부의 미로 같은 통로는 주인공의 답답함을 전달하기에 충분히 효과적인 공간이다. 〈그래비티〉(2013)에서 긴 호흡으로 우주를 유영했던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감독의 카메라가 이번에는 의상실과 분장실, 그리고 무대를 연결하는 좁은 복도를 자유자재로 비집고 다닌다. 인물을 긴밀하게 따라다니며 시공간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롱 테이크, 인물의 등이나 문 뒤에서 다음 장면으로 연결되는 이음새 없는 편집 등은 즉시 단일한 공간에서 몇 개의 쇼트shot만으로 완성시킨 알프레드 히치콕의 〈로프Rope〉(1948)를 연상시킨다. 폐소공포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히치콕 영화들과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리건에게 극장은 거대한 유령의 집haunted house과도 같다. 

청각적 장치들도 주제와 절묘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스타일로 작동하고 있다. 영화음악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드럼 소리와 혼자 있을 때 등장하는 버드맨의 목소리는 특히 주목해 볼만하다. 멜로디를 배제한 드럼 소리는 기본적으로 영화를 세련되게 장식하고 있는 미니멀한 장치이며 오직 다양한 음색과 리듬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적 고저 및 극적 국면의 변화 등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그런데 후반부에 가면 이전까지 스코어 뮤직score music으로만 나오던 이 음악이 소스 뮤직source music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나온다. 즉, 관객들에게만 들린다고 생각했던 드럼 소리가 리건이 연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연기하기 위해 무대로 올라가는 시점 쇼트에서 드럼 연주자가 프레임 인frame in 되며 자연스레 소스 뮤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대와 무대 밖, 현실과 환상을 교묘히 뒤섞으며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던 영화의 다른 요소들에 음악까지 합류하게 되는 장면이다. 관객들이 겪는 혼란—처음부터 드럼이 극중에서 연주되고 있었던가 하는—은 리건이 러닝타임 내내 다른 방식으로 겪고 있는, 그리고 이 인물을 통해 영화가 관객들에게 대리 체험시키고자 하는 혼란의 양상과 정확히 부합한다. 

한편, 관객이 아닌 주인공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낮고 굵직한 ‘목소리’다. 이 분열된 자아는 리건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낙담시킨다. 또 다른 자아와의 매개로 자주 사용되는 거울 대신 커다란 액자 속의 버드맨이 이 목소리의 실체임은 의심할 바 없다. 그렇다면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던 슈퍼히어로는 왜 이토록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가 되었는가. 그것은 예술가로 거듭나야 하는 중대한 시점에서 리건이 버려야 할 과거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할리우드 영화인들이 영화—슈퍼히어로 장르로 대표되는—에 대해 갖고 있는 열등감과 우월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버드맨〉의 유머는 대다수 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의 균열을 적절히 건드림으로써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 초반에 리건은 랄프를 해고하고 다른 배우를 데려오려 하는데, 그가 언급하는 우디 해럴슨, 마이클 패스벤더, 제레미 레너는 각각 〈헝거게임〉, 〈엑스맨〉, 〈어벤져스〉 등 블록버스터를 찍고 있다. 곧 이어 등장하는 인터뷰에서 한 기자는 리건에게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코믹스 원작의 영웅역을 하던 그가 레이먼드 카버의 연극을 한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것은 할리우드 영화인들이 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질문과도 같다. 알랭 바디우가 단호하게 지적한대로 영화 매체의 속성에 ‘자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에 대해 스스로 비웃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영화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장사치가 아닌 예술가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다른 예술분야로 진출하는 것은 그 한 방법으로, 리건에게는 레이먼드 카버가 정확히 그러한 도구인 것이다. 이미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임에도 소설가가 되기를 갈망하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2011)의 주인공처럼, 리건 또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영웅물에 대해 조소를 드러낸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가 그 환멸에서 끝났다면 미국 아카데미는 〈버드맨〉을 그 해 최고의 작품으로 꼽지는 않았을 것이다.2 리건의 재기 과정이 고난의 연속이라는 것은 자조로부터 연민, 자기애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그 애정 어린 시선이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이 영화를 팽팽한 풍선처럼 긴장시키다가 결국 하늘 높이 떠오르게 만든다. 가령, 리건이 겪는 정신적 고통은 복합적이지만 그 중에서도 편견이라는 테제는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유명 연극 비평가 디킨슨의 대사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리건의 연극을 보지도 않고 악평을 쓰겠다는 그녀는 리건이 ‘배우’가 아닌 ‘연예인’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리건은 더 이상 조소나 환멸이 아닌 페이소스의 대상이다. 그는 이제 이 ‘영화’에서 ‘연극’을 통해 부활해야만 하는 ‘영웅’—슈퍼히어로물이 아닌 신화적 의미의—이다. 

다시 슈퍼히어로의 목소리로 돌아가 보자. 버드맨과 함께 있을 때 리건이 발휘하는 초능력은 그에게 아직 내재되어 있는 재능과 에너지를 의미한다. 분열된 자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의 잠재력이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며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이라는 점은 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긍정성을 대변한다. 그는 결국 버드맨을 처치하기보다 내려놓음으로써 과거와 화해한다. 비참하고 우울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던 이야기는 리건이 진짜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에서 일순간에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총알은 목숨을 앗아가는 대신 그에게 새 코를 선사하고, 그는 병실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이 때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리건일까 버드맨일까. 할리우드에서 브로드웨이까지, 수십 년 동안 지속돼왔던 버드맨이었던 배우와 버드맨의 반목은 이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할리우드의 열등감은 순식간에 우월감으로 전환된다. 〈버드맨〉은 영화이며, 철저히 영화적이니까. 

〈배트맨 2〉(1992) 이후 대형 히트작이 없는 마이클 키튼을 리건 역에 캐스팅한 것은 자명하게도 연출적 계획 하에 있었던 신의 한 수였다. 그는 ‘리건’의 현신이 되어 흠 잡을 데 없는 연기를 선보인다. 그 또한 슈퍼히어로의 후광에서 서서히 멀어지며 남모를 불안과 고통을 겪었으리라. 그렇다면 이 영화를 통해 날아오른 것은 리건인가 키튼인가.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현실과 환상 사이의 기분 좋은 긴장은 계속된다. 이 영화에서 정말 비현실적이라 수식하고 싶은 단 한 가지는 작은 디테일부터 콘텍스트적 장치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설계하고 실행한 이냐리투 감독의 재능이다. 〈버드맨〉 개봉 후, 채 1년이 안되어 선보인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까지 감안할 때, 이것은 상찬이 아니다. 그의 또 다른 상상이 스크린에 재현될 날을 기다린다. 

 


1) 이 글은 《예술문화비평》 제16호(2015년 봄)에 실었던 비평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나 두 배 이상의 분량으로 수정, 보완되었음을 밝혀둔다.
2) 〈버드맨〉은 2015년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윤성은 영화학 박사. 201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이후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공연과 리뷰 PAF 평론상 수상. amee9@naver.com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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