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필요한 일이 곧 옳은 일, 악몽과 치욕 사이의 풍경
[2016 오늘의 영화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필요한 일이 곧 옳은 일, 악몽과 치욕 사이의 풍경
  • 강유정
  • 승인 2016.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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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적인 복수극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FBI 요원인 케이트(에밀리 블런트)가 CIA 소속의 작전 책임자 맷(조슈 브롤린)을 만나 묻는다. “이 작전의 목적이 뭐죠?” 맷은 웃으며 대답한다. “극적인 복수극?”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를 두 번째 볼 때면, 그 말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시카리오〉는 극적인 복수극이다. 누가, 왜, 어떻게, 언제, 복수하느냐. 그것은 오직 한 사람, 연출자인 드니 빌뇌브만이 알고 있다. 그는 역시,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허구의 천재이다. 〈시카리오〉를 한 번 볼 땐, 그저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지만 두 번째 다시 볼 땐, 그 영화 공작술에 놀라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 속엔 “그냥” 넘어갈 부분이 없다. 

2. 진실하기에 무능한 오이디푸스

FBI 요원 케이트는 아리조나, 챈들러의 버려진 가옥에서 수십 구의 시체를 발견한다. 누군가 불청객이 올 것을 예상했는지, 시체를 찾는 도중 매설된 폭발물이 터진다. 두 명의 경관을 잃고, 책임자인 케이트도 다친다. 버려진 시체는 멕시코인들로 추정된다. 사건이 마무리될 때쯤, CIA 사람들이 케이트를 호출한다. 그들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들은 그녀를 이 사건에 불러들일지 말지 고민한다. 케이트가 발견한 시체들이 단순한 사체가 아니라 어떤 범죄의 ‘끈’이기 때문이다.

그 범죄는 바로 카르텔이라고 부르는 국경 부근 남미를 기반으로 한 폭력 조직의 범죄이다. 카르텔은 매우 잔혹한 방식으로 다른 카르텔 경쟁자들을 응징한다. CIA는 현재 가장 강력한 카르텔의 수장을 추적 중이었고 케이트가 발견한 시체들은 그를 쫓는 유인책이 될 만하다. 이에 맷은 케이트가 이 작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주목해야 할 것은 케이트가 이 작전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투입된다는 것이다. 우선 맷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에 소속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다소 고압적이며 마초적인 말투로,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이 모호함은 케이트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모른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그 한가운데에 있는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눈을 가리고 절벽 위를 걷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편, 케이트는 이 모른다는 것 자체로 사건에 깊숙이 연루된다. 왜, 어떻게, 누구인지 알기 위해선 결국, 맷의 요구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길의 끝에 진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호한 두려움은 남미 전문가라고 판단되는 알레한드로의 투입으로 점차 고조된다. 카르텔의 정서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이 남자는 소위 컨설턴트로 통한다. 하지만 그가 과연 어떤 조언을 하고, 또 왜 그가 CIA를 돕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강렬한 눈빛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초조한 잠버릇이 그의 고뇌와 상처를 짐작케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정보가 케이트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 요한슨의 음악은 마치 심박기의 버저 소리만큼이나 신경을 날카롭게 일으킨다. 영문도 모른 채 줄지어 달리는 검은 승합차는 무엇인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암시를 주긴 하지만 도대체 그게 무슨 일인지는 도무지 열어 주지 않는다. 엘파소에서 검문소를 건너 후아레스로 가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맷과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에게 총을 쥐어 줄 뿐 누구를 노리고, 어떻게 써야 할지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결국, 총을 쥐어 준 것 자체가 위험을 알리는 상징이 될 뿐, 정작 상황의 안개는 깊어지는 것이다. 

영화 〈시카리오〉의 매력도 여기에 있다. 관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사건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는 케이트의 시각에 몰입하고 공감하게 된다. 관객들은 케이트가 보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알게 된다. 즉, 케이트가 모든 것을 알기 전까지 관객들은 그저 맷과 알레한드로의 거친 안내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케이트는 이 이야기의 화자이자 시점자이지만 그 이야기와 눈은 정확한 정보와는 거리가 멀다. 남들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것, 영화적 긴장감은 이 정보량의 차이에서 배가된다. 〈시카리오〉를 보는 내내 긴장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관객은 케이트의 눈을 카메라 삼아 이 찜찜한 세계에 초대된다. 마치 천천히 목을 조여 오는 어떤 ‘기미’처럼, 영화는 짐작은 되지만 도무지 알기 어려운 어떤 세계의 그림을 하나씩 맞춰 간다. 마치 이를 조롱하듯, 엘파소와 국경 지대를 훑는 부감 쇼트는 이 모든 일들이 단순히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라는 예감을 전달해 준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 야간 투시경을 통해 오히려 진실이 드러나는 아이러니도 그렇다. 대개 환한 대낮, 개방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사건들은 아무런 진실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 그 밤의 동굴이 되어서야, 진짜 이야기가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결국 〈시카리오〉는 극적인 복수극이다. 마지막 순간, 모든 일들은 이 복수극을 위한 하나의 작은 열쇠이자 퍼즐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 퍼즐의 일부일 때, 그것을 알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만큼 많이 아프고, 상처 입고, 다쳐 봐야 세상에 보이지 않던 사각지대가 열린다. 말하자면, 케이트는 이제야 있으되 보지 못했던 세상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그것은 바로, 원칙이 아니라 엄청난 복수심이 원동력이 되는 세상의 풍경이다. 어떤 점에서 케이트는 그런 세상 풍경의 단 한 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부감으로 비춘 중남미가 그저 그렇게 평범한 도시와 다를 바 없어 보이듯이 말이다.

3. 신의 희작

〈시카리오〉는 냉소적인 작품이다. 이 차가움이 매우 강조되는 서브플롯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주 평범해 보이는 어느 가정의 아침 풍경이다. 멕시코, 노갈레스Nogales에 위치한 이 집의 아침 풍경은 여기, 이곳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는 아침상을 준비하고, 아이는 아버지 곁을 맴돌며 같이 놀아 달라고 떼를 쓴다. 간만에 쉬는 아버지는 이 달콤한 아침잠을 놓치고 싶지 않지만, 다정한 아버지인 그는 이내 눈을 뜨고 아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그”는 마치 이 이야기, “극적인 복수극”에 있어 매우 중요한 퍼즐 조각인 것처럼 이야기의 초반부터 등장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평범한 경찰은 도대체 이 무시무시한 그림 속에서 어떤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내 그가 영화적으로 어떻게 ‘쓰이는지’ 확인하는 순간 씁쓸한 홍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는 이 거대한 살육전의 풍경 하나이며, 극적인 복수극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징검다리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시 아들의 모습이 화면에 꽉 찰 때, 이 비정한 게임의 목적이 과연 무엇이며 그럼으로 인해 얻는 것은 또 어떤 것일지를 질문하게 된다. 극적인 복수극의 뒤에 과연 얼마나 무고한 죽음의 개연성이 놓여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의 비정함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내려앉는다. 이내 원칙과 진실이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는 케이트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신의 희작이며 따라서, 누군가 좀 더 주도면밀한 사람의 내러티브 안에서 적당한 단역을 맡는 것뿐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그의 문제작 〈그을린 사랑〉에서부터 워낙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여 왔다. 그는 이야기의 실체가 아니라 이야기가 어떻게 구성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보기 드문 공학적 스토리텔러이다. 세상은 정의로운 사람으로 지탱될 수 없다. 만약, 정의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도구의 일부로 요구될 뿐이다. 영화 〈시카리오〉는 필요한 일이 옳은 일이 되는 세상의 풍경을 매우 건조하고, 긴장감 있게 구성해 보여주고 있다. 

정의로운 여성이 음모의 한가운데에 들어선다는 점에서 〈시카리오〉의 리듬은 캐스린 비글로우 감독의 〈제로 다크 서티〉를 연상케 한다. 다만, 〈제로 다크 서티〉가 마침내 어떤 환희의 순간을 마련해 두고 있다면 〈시카리오〉는 끝까지 그런 기대를 환상으로 깨뜨린다는 사실이다. 〈시카리오〉는 달콤한 정의에 매료된 순진한 영혼들을 세계의 벼랑 끝으로 떠민다.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세계는 순진하면서도 낭만적이다. 드니 빌뇌브의 세계는 그런 점에서 어른의 세계이다. 꿈속에서도 절망과 만나는 알레한드로 역의 베네치오 델토로처럼, 그렇게 세상은 악몽과 치욕 사이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 평론 당선, 《동아일보》 영화평론 입선. 저서로 『오이디푸스의 숲』이 있음. 강남대 교수.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noxkang@hanmail.net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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