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이다] 낯설고 황홀한 미학적 성취
[2016 오늘의 영화 - 이다] 낯설고 황홀한 미학적 성취
  • 이태훈
  • 승인 2016.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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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미국 오스카의 외국어 영화상 트로피는, 실은 후보작 중 어떤 영화에 주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러시아 영화 〈리바이어던〉이 있었고, 뜨거운 긴장과 분노로 팽팽한 아르헨티나 블랙 코미디 〈와일드 테일즈〉가 있었다. 멀리 아프리카 말리 영화 〈팀북투〉는 종교를 빙자해 저질러지는 추한 죄악조차 낙관과 유머로 바라보게 하는 미덕을 갖춘 작품이었다. 하지만 막상 수상작이 발표됐을 때, 트로피의 주인공은 1960년대 초의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흑백 영화 〈이다Ida〉였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최초의 폴란드어 영화. 아마도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별 이의 없이 아카데미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아픈 역사와 얽힌 가족사의 비극과 맞닥뜨리게 된 한 폴란드계 유태인 견습 수녀의 이야기를 향해 전 세계로부터 쏟아진 찬사는,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첫 모국어 영화를 만든 감독 포리코브스키

감독 파벨 포리코브스키(59)는 폴란드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다. 〈이다〉는 평생 대부분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가 처음으로 모국어인 폴란드어로 찍은 영화다. 영화는 그의 가족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르샤바 대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 파벨에게 나고 자란 폴란드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른이 된 뒤에야 폴란드계 유태인이었던 할머니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희생됐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였던 폴란드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영세를 받은 파벨 포리코브스키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게다가 폴란드에서 그의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유태인인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한 뒤, 1960년대 폴란드의 반 유태적 사회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영화 〈이다〉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시기다. 영화는 내용과 형식 모두 자로 잰 듯 예리하게 꽉 짜여 있지만, 포리코브스키는 한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없으며 모두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완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 영화는 느리게 스스로 움직이는 베틀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 직조된 것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 질문, “신이 없다면?”

어쩌면 폴란드에서 온 이 흑백 영화를 압축하는 것은 영화 속 두 개의 질문일지도 모른다.

수녀원에 딸린 고아원에서 자라 정식 수녀 서원을 앞둔 안나(아가타 트르체부코브스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피붙이 이모(아가타 쿠레샤)를 만나고 오라는 수녀원장의 명령에 처음 수녀원 밖으로 나선다. 이모는 공포정치 시대 ‘피의 완다’로 불렸던 베테랑 판사다. “사형 판결도 꽤 내렸지.” “누구에게요?” “인민의 적들.”

첫 질문은 이모로부터 온다. 이모는 부모 사진을 보여주며 말한다. “네 아빠는 하임 레벤슈타인. 엄마는 로자. 이런, 유태인 수녀라니.” 견습 수녀 안나는 이모로부터 비로소 자신이 본래 유태인이고 본명은 ‘이다’이며, 부모는 유대인 말살 정책이 서슬 퍼렇던 독일 점령기에 이웃에게 살해됐음을 알게 된다. 처음 자신이 태어난 장소를 듣게 된 안나가 “시신이 묻힌 묘지라도 수소문해 찾고 싶다.”고 말하자 이모는 냉소적으로 말한다. “묘지 같은 건 없어. 유대인들은 모두 숲에 묻히거나 버려졌지. 그러다 신이 없다는 걸 발견하면 어떻게 할래?” 

선신善神이 틈입할 여지 따위 보이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증오가 빚어 낸 추악한 비극과 맞닥뜨린 뒤에도 계속 신을 섬길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어린 견습 수녀에게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가혹한, 신과 역사에 관한 질문이다. 이 첫 번째 질문과 부딪힐 때, ‘안나’는 억울하게 죽어 간 유태인의 딸 ‘이다’가 된다.

두 번째 질문, “평범해질 수 있어?”

두 번째 질문은 낯선 남자로부터 온다. 이모와 함께 부모의 흔적을 쫓던 중 우연히 만난 떠돌이 밴드의 알토 색소폰 연주자. 저녁이면 견습 수녀복 차림으로 멀리서 밴드가 연주하는 미국 재즈를 들으며, 술과 담배에 빠져 몸을 비비는 인간 군상들 사이로 이 남자를 바라본다. “당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죠?” 남자가 이런 말을 건넸을 때, 이다는 거울 앞에서 처음 머릿수건을 풀어 폴란드계 유태인의 특징인 붉은 머리를 밖으로 내어 놓는다. 

집시의 피가 섞인 그와 하룻밤을 보낸 뒤, 남자는 이다에게 말한다. “그단스크에 공연이 있으니 함께 가요.” 이다는 묻는다. “그 다음엔요?” “해변도 산책하고.” “또 그 다음엔요?” “강아지를 한 마리 살까요?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함께 살아요.” 이다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가벼운 미소가 실린다. 이모는 수녀가 되겠다는 이다에게 “해보지도 않은 걸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었다. 평생 신의 신부新婦로 살아갈 줄 알았던 ‘안나’에게, ‘지금 여기’가 아닌 ‘다음’을 묻는 건 처음 맞닥뜨리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낯설고 황홀한 미학적 성취 영화

〈이다〉 이전, 감독 포리코브스키는 잉글랜드 요크셔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풋풋한 에밀리 블런트를 등장시켰던 영화 〈사랑이 찾아온 여름My Summer of Love, 2004〉으로 기억됐었다. 이 영화에 이르러 그는 TV 브라운관을 연상시키는 4대 3 비율의 흑백 화면을 캔버스 삼아 붓질하듯 자유자재로 영화를 그려 간다. 많은 평론가들이 “잉마르 베리만을 연상시킨다.”고 표현한 꽉 찬 구도다. 곧게 뻗은 길, 수직으로 높이 선 나무, 평평한 지평선 땅. 자로 잰 듯 견고하고 기하학적인 폴란드의 풍경 안에서 사람은 늘 비스듬하고 위태롭다. 카메라는 인물의 표정을 잡을 때도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는 방식으로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심리를 드러낸다. 계단, 가구, 심지어 자동차 핸들까지도 뒤늦게 비극과 마주하는 사람의 위태로움을 반영하듯 화면 속 인물을 먹어 들어간다.

포리코브스키는 또 신중하고 효과적으로 빛을 사용한다. 집요하게 빛과 구도를 탐닉했던 베르메르 같은 네덜란드 화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솜씨다. 무표정했던 인물들이 감정의 변화를 내비칠 때, 욕실의 창문으로, 마굿간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열린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은 화면의 팽팽한 긴장감을 최대치까지 끌어 올린다. 폴란드의 아픈 역사와 무관한 관객도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는, 영화가 이뤄 낸 놀라운 미학적 성취다.

부모가 묻힌 곳을 찾아가는 견습 수녀 이다의 여정 끝에서, 관객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혹한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모든 기대는 통쾌하게 깨져 나가고, 예상치 못한 비장함이 직접 심장을 찔러 온다. 길지 않은 82분의 러닝 타임 동안 무게 있는 질문과 대답이 체스 말을 주고받듯 정교하게 녹아들지만, 영화는 윽박지르는 법 없이 정갈하다. ‘안나’ 혹은 ‘이다’의 눈동자는 잉크를 빨아들인 백지처럼 영화 막바지로 갈수록 더 크고 검어진다. 벽에 고정된 그림처럼 완고하던 화면의 구도는 다시 수녀복을 입은 ‘이다’의 마지막 발걸음에 이르러서야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흔들림에 동참할 때, 관객은 비로소 어린 이다의 내면에 울리는 깨달음에 연결된다. 낯설고 황홀한 경험이다.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종교, 미술, 영화를 담당했음. 현재 《조선일보》 미래기획부 기자. libra@chosun.com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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