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인사이드 아웃] 슬픔을 통해서도 성장하는 아이, 아이를 통해 성장하는 부모
[2016 오늘의 영화 - 인사이드 아웃] 슬픔을 통해서도 성장하는 아이, 아이를 통해 성장하는 부모
  • 설규주
  • 승인 2016.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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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리의 행복을 향해 존재하는 감정들

〈인사이드 아웃〉의 열한 살 소녀 라일리가 갓 태어나서 처음 들은 말은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가득 담긴 축복이었다. “안녕, 라일리. 네가 태어나서 정말 기뻐.”라는 말은 라일리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저장해 놓은 사랑스러운 기억이다. 엄마, 아빠의 기쁨을 한껏 느끼며 태어난 라일이의 마음을 주도하는 것은 기쁨이다. 그래서 라일리에게는 행복한 기억이 많다. 

라일리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찬 기쁨이는 두말할 것도 없고 소심이, 까칠이, 버럭이도 모두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소심이는 라일리가 넘어지거나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라일리를 조심시킴으로써 그녀를 보호한다. 까칠이는 라일리가 싫어하는 음식이나 나쁜 친구로부터 라일리를 지켜 준다. 버럭이는 라일리에게 공정하지 않은 상황을 보면 못 참는다. 나서기만 하면 라일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슬픔이조차도 라일리가 잘 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행복이 뭐길래…

누군가가 우리의 행복관幸福觀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도 그 답 속에 주로 즐거움, 만족 등과 같은 표현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행복은 사전적으로는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를 가리킨다. 기쁨, 만족감, 흐뭇함 등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전 속 행복의 뜻 속에서는 우리 마음의 밝고 긍정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이 바라보는 행복에 대한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를 사전이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일리의 마음 속 기쁨이가 바라보는 행복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라일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학교에 가는 날, 기쁨이는 슬픔이를 ‘슬픔의 원’ 안에 고정시켜 놓으려고 한다. “(슬픔이) 네가 할 일은 모든 슬픔을 이 원 안에 넣어 두는 거야.” 기쁨이는 라일리가 명랑한 모습으로 첫 학교생활을 맞이하고 자기소개도 잘할 수 있도록 애쓰지만, 어느 순간 슬픔이는 원 밖으로 나와서 기억을 건드리고 그와 동시에 라일리는 슬픔을 느낀다. 슬픔이가 라일리의 기억을 파란색, 즉 슬픔이를 상징하는 색깔로 변하게 한 것은 슬픔이의 실수나 고의가 아니라, 바로 그 시점이 라일리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과거의 좋은 기억을 떠올려 보고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 보려고 해도 미네소타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은 아직 생생한 반면, 샌프란시스코라는 곳은 여전히 낯설기만 한 그 시점에 라일리는 그냥 슬퍼졌을 뿐이다. 이것은 기쁨이가 라일리를 즐겁게 해 주려고 애쓰거나 슬픔이를 원 안에 가두어 둔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일리의 머릿속 감정들은 여전히 기쁨이가 있으면, 기쁨이가 이끌어 주면 라일리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슬픔이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긍정의 힘?

기쁨이는 일종의 ‘긍정 전도사’라고 불릴 만하다. 샌프란시스코의 새 집으로 이동하는 길이 막혀서 시간이 많이 걸려도 “그래서 더 좋았잖아. 덕분에 우리가 살 집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게 되었으니까.”라고 말하며 애써 좋은 점을 찾아본다. 집의 외관이 실망스러우면 “아마 집안은 근사할 거야.”라고 위로한다. 집안이 지저분하고 냄새를 풍기면 “나비 커튼을 달면 좋아질 거야. 집을 꾸미면 재미있을 거야.”라고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한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점점 나빠져 감에도, 기쁨이는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한다. 핵심 기억을 건드린 슬픔이가 스스로 뭔가 잘못 됐다고 자책을 할 때에도 기쁨이는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슬픔이를 타이른다. 자꾸만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라고, 그래야 즐겁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듯이, 만약 우리 마음이 슬픈 것을 슬프다고 하지 못한다거나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 못한다면, 더 나아가 싫은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 좋다고만 해야 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건강하거나 자연스러운 마음 상태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긍정적인 말과 마음에 대한 예찬이 넘친다. 10여 년 전에는 긍정과 관련한 책이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었고, 지금도 긍정 열풍은 여전하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강조하는 책은 늘 자기 계발서 베스트셀러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TV 아침 프로그램에서도 긍정의 효과에 대한 찬사가 쏟아진다. 영어 공부를 할 때에도 “Look at the bright side of things. (세상의 밝은 면을 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거나 타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늘 괜찮다고, 늘 긍정적으로 바라보라고 암시하거나 권하고 있지는 않은가. 라일리의 엄마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한 직후 어수선하던 시기에 라일리가 계속 웃는 얼굴을 보여 주어 고맙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우리는 이렇게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상태를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착한 마음과 인내를 은근히 요청하는 건 아닐까? 원래는 한번쯤 짜증을 부려 보려고 했던 라일리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어 엄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만다.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긍정’을 표현하느라, 건설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라일이의 진짜 속마음은 하키 입단 테스트에서 실수를 했을 때, 하키 스틱과 헬멧을 집어 던지며 했던 말 속에 들어 있다. (실수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괜찮다는 말 좀 그만하세요.”라고 대꾸한다. 물론 라일리는 실제로 결국은 괜찮아질 것이고 당시 현장에서 엄마 입장에서 으레 해 줄 수 있는 말이 ‘괜찮다’였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당사자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게 하고 그것을 받아 주며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 연인이나 부부가 한바탕 싸우고 나서 화해를 했다고 해서,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감정이 원상태로 금방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해야 하는데다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엄마, 아빠에게서 독립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는 시점의 라일리에게는 이른바 ‘긍정의 힘’이 그대로 작동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긍정의 힘’은 만고불변의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맥락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슬픔에도 힘이 있다

사실 기쁨이는 슬픔이를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쁨이가 보기에 라일리를 울리거나 우울하게 하는 일 외에 슬픔이가 하는 일도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기쁨이는 “라일리는 꼭 행복해야만 해.”라고 하면서 슬픔이를 남겨 두고 혼자서만 감정 본부로 돌아오려고까지 했다. 기쁨이에게 슬픔이는 라일리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되는 존재로 느껴졌을 수 있다.

즐겁고 긍정적인 것이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기쁨이는 점차 슬픔이의 진가를 발견한다. 라일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빙봉이 노래 엔진으로 움직이는 로켓을 잃어버리고 좌절해 있을 때 기쁨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빙봉을 즐겁게 해 주려고 노력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반면, 슬픔이는 “로켓이 사라져서 속상하지? 네가 사랑하는 걸 가져가다니….”라고 말한다. 기쁨이는 그렇게 하면 빙봉이 더 힘들어 할 거라고 말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빙봉은 슬픔이를 껴안고 잠시 울고 나서 “나 이제 괜찮아.”라고 말하며 훌훌 털고 일어난다. 슬픔이는 기쁨이처럼 빙봉을 위로하려고 화려하게 혹은 요란하게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빙봉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준 것 뿐이다. 기쁨이와 슬픔이는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빙봉의 마음을 풀어 주려고 했는데, 빙봉이 처한 상황에서는 결과적으로 슬픔이의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다. 기쁨이는 슬픔이가 빙봉과 함께 웃어 주거나 즐겁게 해 준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이 슬퍼했는데 어떻게 빙봉의 마음이 풀릴 수 있는지 의아해 하지만, 그게 바로 슬픔이 가진 묘한 능력이다.

라일리가 행복하기만을 바랐지만, 더 이상 감정 본부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된 기쁨이는 라일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옛 기억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항상 밝고 명랑한 기쁨이에게 눈물은 낯설다. 이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슬퍼서 나오는 눈물이기 때문이다. 기쁨이가 흘리는 슬픔의 눈물은 일종의 형용모순처럼 기쁨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슬픔의 눈물을 흘려 가면서 기쁨이가 알게 된 것은 라일리에게는 자신뿐 아니라 슬픔이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즐거운 기억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슬픈 기억이 오히려 진짜 기억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가출하려던 라일리는 집에 돌아와 마음껏 슬퍼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착한 딸, 긍정적인 딸의 모습을 보여주느라 참았던 말을 마침내 쏟아 낸다. 그저 그리운 것을 그립다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슬프니까 슬프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엄마가 라일리의 마음을 받아 주고 아빠가 “사실은 아빠도 미네소타가 그리워.”라고 화답하면서 라일리의 슬픔은 진정이 된다. 그리고 편안한 미소와 함께 라일리의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라일리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이 조만간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슬픈 마음을 그냥 털어 놓고 싶었을 뿐이다. 기쁨이가 아닌 슬픔이가 빙봉의 마음을 치유했던 것처럼, 라일리의 마음도 긍정이나 낙관이 아닌 슬픔을 통해 회복되었다. 긍정뿐 아니라 슬픔도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감정 본부의 리더는 누구?

라일리의 감정 본부는 기본적으로 기쁨이가 이끌어 왔다. 라일리의 엄마는 슬픔이가, 라일리의 아빠는 버럭이가 일종의 리더 역할을 맡고 있다. 어쩌면 라일이의 엄마, 아빠도 어린 시절에는 기쁨이가 주도했을지 모른다. 일반적인 경우에 아이들의 마음은 기쁨이가 주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이른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두루 경험하면서 다른 감정에게 종종 리더 자리를 내어 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느 순간 리더 자리마저 아예 넘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라일리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처음으로 슬픔이에게 감정 본부를 내맡겨 보는 경험을 해 본다. 어쩌면 라일리 앞에 놓인 더 많고 다채로운 삶을 경험하면서 슬픔이뿐 아니라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의 역할도 지금보다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와 사귀다가 헤어지면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경험하고 나면 한동안 슬픔이가 감정 본부를 압도할 것이고,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예고 없이 끼어드는 무개념 차를 보게 되면 버럭이가 맹활약하기도 할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감정들 간의 상호작용과 역학 관계가 복잡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

유쾌한 것 같은데 왜 눈물이 날까

〈인사이드 아웃〉은 밝고 발랄한 기쁨이의 해설로 시작하고 마무리된다.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와 상상력으로 표현된 장면들을 볼 때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어떤 감정 요소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라일리, 엄마, 아빠의 행동이나 말이 달라지는 모습, 우리가 기쁨이나 슬픔을 느낄 때 혹은 짜증이나 두려움을 느낄 때 아마 머릿속에서는 저런 일이 일어나겠거니 할 만한 장면 등은 웃음과 감탄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마냥 웃기만 하지 못하고 울컥 눈물이 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어쩌면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라일리가 관심을 많이 갖지 않는 기억은 어느덧 구슬의 색깔이 바래지면서 마침내 버려지기도 하고 바람에 날려 가 버리기도 한다. 우연히 발견한 초등학교 시절에 썼던 낡은 일기장을 펼쳐 보면 비뚤어진 글씨체에 허접하기 짝이 없는 내용을 보며 킥킥거리기도 하지만, 어느덧 까맣게 잊어 버렸던 옛날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장난감, 책, 습관, 친구들 등으로 인해 울컥 하는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누구를 만났고 무슨 책을 읽었고 무얼 하며 놀았는지에 대한 기억은 물론, 내가 과거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것조차도 잊어버리고 산다. 초등학교 시절에 대한 우리의 기억 대부분은 녹슨 구슬이 되고 버려져, 빙봉이 결국 빠져 나오지 못했던 수많은 구슬들 무더기 속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그게 슬픈 것이다.

사라져 가는 기억에 대한 아쉬움은 우리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더 어린 시절의 어느 한때 즐겨 썼던 단어, 한때 즐겨 했던 놀이나 노래, 한때 즐겨 찾던 장난감 등을 어느 순간 시시하게, 유치하게, 어색하게 여기더니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아예 그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모습을 커 가는 아이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인 만큼 흐뭇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이제 다시 실제로는 접할 수 없는 추억이 된다는 점에서 슬픔을 느끼기도 하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하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즉 엉뚱섬이 점점 작아질 때, 어린 시절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던 성격 섬들이 하나하나 무너져 간다고 생각할 때, 그것들과 이별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슬픔은 결코 작지 않다.

아이들의 성격섬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

이 단락에서 나는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글을 쓰려는 노력을 잠시 내려놓고, 아빠로서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서 느낀 바를 일종의 수필처럼 적어 보려고 한다. 라일이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우정섬, 하키섬, 엉뚱섬, 가족섬, 정직섬 등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어떤 모습일까...

우정섬에 들어 있을 만한 친구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때로는 아이들이 아빠, 엄마보다도 더 끔찍하게 아끼는 친구들이 있다. 이제 더 이상 아빠랑 결혼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을 서운해 하기보다는 ‘우정섬이 잘 돌아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아마도 머지않아 아이들의 우정섬은 가족섬보다 훨씬 더 커질 것이다.

라일리에게 하키가 소중했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이 섬 하나를 만들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공주섬’ 한 개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다. 디즈니의 많은 공주들이 모두 그 공주섬에 한데 모여 아이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토리섬’(토리: 둘째 아이가 밤이나 낮이나 늘 데리고 다니는 외계 동물 인형)도 빙빙 잘 돌아가고 있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 섬도 상당히 거대하게 만들어져 있을 것 같다. 뽀로로부터 시작해서 타요, 폴리, 카봇, 또봇, 터닝메카드, 미니특공대 등으로까지 이어져 온 매우 빠른 확장 속도로 볼 때 애니메이션 섬은 당분간 계속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아이들과 주고받는 장난스러운 ‘퍼포먼스’나 침대 위에서 함께 뒹굴며 노는 모습은 아마도 엉뚱섬에 들어 있을 것 같다. 아마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아이들은 출근하는 아빠를 위해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아이들이 먼저 그걸 어색해 할 것이고, 아이들이 어색해 하는 모습에 나 역시 어색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엉뚱섬은 어쩌면 사라지거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가족섬에는 어떤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가족사진을 찍었을 때의 모습, 동물원을 거니는 모습,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 함께 밥을 먹는 모습, 모두 한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 등 가족과의 수많은 경험 중에서 아이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앞으로는 거기에 무엇이 채워질까. 튼튼한 가족섬과 함께 아직은 견고하게 돌아가고 있는 정직섬도 언젠가는 균열이 생기고 시련을 겪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이 커 가며 나타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다. 커가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아빠도 커 간다. 아이들의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이 연착륙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아빠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20년 전 픽사 스튜디오의 첫 번째 작품인 〈토이 스토리〉를 볼 때 느꼈던 경험을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서도 비슷하게 했다. 〈토이 스토리〉를 보며 웃기도 하고 눈물도 흘렸던 청년이 성장을 했고 어느덧 아빠가 되어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서 또다시 웃음과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과 눈물을 자양분삼아 이제 아빠로서 더 성장하고자 한다. 아이들의 성장 못지않게 아빠의 성장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설규주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 학사, 석사, 박사 졸업.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음. qzoos@hanmail.net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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