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오늘의 영화 - 킹스맨] ‘스타일’로 완성되는 트랜스 아이덴티티
[2016 오늘의 영화 - 킹스맨] ‘스타일’로 완성되는 트랜스 아이덴티티
  • 임대근
  • 승인 2016.03.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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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주인공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것이며, 영웅으로 남을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예측과 다른 결론이 제시된다면 그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다. 관객을 고통스럽게 하는 결말은 이런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다. 관객은 자신이 지불한 영화 티켓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받기 원한다. 그러므로 영화는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거기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두 시간 남짓 스크린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성립된다. 

세상에는 언제나 위기가 닥친다. 위기는 해결돼야만 한다. 비범한 인물이 필요하다. 위기를 조장하는 이들과 위기를 해결하려는 이들의 대결, 위기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이들이 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위기는 리치몬드 발렌타인이라는 억만장자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세상에 인간이 ‘너무’ 많아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으니 인간 개체 수를 줄임으로써,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막대한 부를 배경으로 세계 주요 권력자들과도 스스럼없는 관계를 맺는 그는 오늘날 인간이 가장 환호하고 있는 발명품 휴대폰의 유심을 제공하고, 전파를 조정함으로써 그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장면을 연출한다.

위기는 인간이 추구한 편리한 세상이라는 꿈에서 비롯된다. 커뮤니케이션의 최전선에 서 있는 휴대폰은 더 이상 그저 상대와 나를 일대일로 연결해 주던 소박한 전화가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전 세계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가공할 장치가 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의 양적 폭발로 인해 소통을 갈구하던 인간에게는 질적 변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질적 변화는 발렌타인과 같은 빅브러더에 의해 한 순간에 불통을 위한 소통, 상호 파괴를 위한 소통이라는 반대 방향으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세상의 길이 열린 곳에서 저마다의 방향으로 폭력이 질주하게 되었다.

비범한 인물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게 아니다. 그는 언제나 만들어진다. 여러 단계의 위기와 시험이 그 앞을 가로막는다. 그는 주어진 허들을 뛰어넘어야만 세상을 구할 자격을 얻는다. 그에게 닥친 위기는 단계별로 상승한다. 결코 처음부터 세상을 구하라는 무지막지한 명령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낮은 허들을 넘어설수록 그 높이는 조금씩 더 높아진다. 에그시는 그렇게 허들을 뛰어넘으며 세상을 구할 인물로 바뀌어 가게 된다.

전 세계 부호들의 선의로 만들어진 비밀 정보 조직 ‘킹스맨’. 어떤 국가나 정부 기관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민간 조직이다. 에그시의 아버지는 18년 전 서남아시아 작전에서 베테랑 요원 해리하트를 살리기 위해 수류탄을 막아서다 죽는다. 에그시는 똑똑하고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그 사이 폭력을 일삼는 동네 건달 두목인 의붓아버지를 갖게 됐다. 에그시에게 주어진 첫 번째 위기는 동네 건달들을 퇴치하는 일이다. 싸움 끝에 경찰서에 갇힌 그의 앞에 해리하트가 나타난다. 첫 번째 위기는 상사를 위해 희생한 아버지 덕분에 벗어난다.

세상에는 친구를 위해 희생할 만큼 정의로운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동네 건달 두목이 되어 아들을 후려 패려는 아버지도 있다. 권력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권력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선한 모습으로, 때로는 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악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일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할 때가 있다. 해리하트라는 제도와 네트워크의 힘이 아니었다면 에그시는 첫 번째 위기를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그시는 건달 아버지에게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누군지 끝까지 말하지 않음으로써 위기 탈출을 완성한다. 개인의 의지가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첫 번째 위기의 탈출이야말로 에그시의 삶이 변화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킹스맨 요원 훈련에 참여하게 되는 에그시. 그는 이제 비범한 인물로 바뀔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해리하트가 에그시에게 킹스맨 후보를 제안하는 과정에 등장한다. “내 말은, 그동안 가진 것 없이 뒷골목을 전전해 왔지만 바뀌고 배울 의지만 있다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지.” 그는 트랜스폼transform이란 단어를 쓴다. 해리하트는 에그시를 거울 앞으로 데려가 그의 모습을 스스로 보게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이야말로 에그시의 정체성을 뒤바꾸기 위한 핵심적인 영화의 고리이다.   

정체성 전환, 그러니까 트랜스 아이덴티티trans-identity의 가능성을 위해 에그시에게는 현재 정체의 확인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과정은 킹스맨의 양복점 거울 앞에서 이뤄진다. 껄렁한 모자에 점퍼, 청바지를 입고 있는 에그시와 멋진 젠틀맨의 수트가 대비되면서 그의 정체성 전환이 암시된다. 세상을 구할 비범한 인물로의 전환은 이렇게 분명한 표상과 더불어 찾아와야만 한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자신들만의 전용 복장을 착용하는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옷을 바꿔 입지 않으면, 정체성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킹스맨〉에서는 젠틀맨의 수트가 정체성 전환의 표상이 된다.

정체성이 뒤바뀌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적지 않다. 영화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해리하트는 에그시에게 일련의 영화 제목들을 쏟아 낸다. 〈대역전〉, 〈니키타〉, 〈프리티 우먼〉…. 에그시는 〈마이 페어 레이디〉로 화답한다. 이 영화들의 목록은 모두 인간이 어떻게 ‘비포’와 ‘애프터’로 극명하게 뒤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제 에그시는 타자의 요청과 자신의 의지를 뒤섞어 스스로 정체성을 뒤바꾸면서 아버지를 이어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된다. 

정체성 전환의 과정은 순조롭지 않다. 꽤 고통스럽다. 훈련 과정에서 만난 후보 요원들과 출신 성분을 놓고 벌이는 설전, 후보 요원의 익사, 군사 훈련을 방불케 하는 혹독한 훈련이 계속된다. 과제 해결을 위한 창의적 사고는 물론 불가피한 양자택일 상황에서 윤리적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가 ‘킹스맨’이 될 수 있는 순간은 결국 자신에게 정체성 전환을 제시했던 리더 해리하트가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라진 곳에서 시작된다. 영웅의 부재는 새로운 영웅을 필요로 하고 권력의 부재는 새로운 권력을 요청한다. 에그시는 그렇게 새로운 수트와 더불어 킹스맨이 된다.

대중적인 힙합 스타일의 옷을 입은 악당은 수트를 차려 입은 ‘킹스맨’과는 대립 점에 서게 된다. 독창적 악당의 스타일은 킹스맨 에그시를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하려는 스타일이다. 위기를 조장하는 자로서 발렌타인이라는 독특한 악당은 이미 기존 권력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다.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자들은 공존을 위해 위기를 조장하는 자와 결탁해 있다. 과학과 기술, 기계가 인간의 미래를 더욱 편리하게 할 것이라는 환상은 불의한 빅 브라더 앞에서 무력화된다. ‘킹스맨’은 이들의 결탁과 불의한 의도를 눈치채고 행동에 나선다.

정체성 전환에 관한 작은 이야기들도 제시됐다. 예컨대 킹스맨의 리더 아서의 정체성 전환 역시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는 중요한 대목이지만, 충분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점도 아쉽다. 주된 이야기로서 에그시가 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어야만 하는지, 바뀔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 속 근거들 또한 두루뭉술한 구석이 없지 않다. 해리하트에 의해 발탁된 정체성 전환의 과정에서 그의 고뇌와 결단이 조금 더 두드러졌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에게 주어진 ‘아버지들’로 인해 한 소년이 젠틀맨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야기 자체가 참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킹스맨〉은 자신이 고백한 바와 같이, 여러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그 진부한 이야기를 ‘스타일’로 치환하여 장식한 경우다.

굳이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흥미로운 것은, 정체성을 뒤바꾼 에그시가 공주를 구하게 된다는 전통적인 스토리가 삽입됐다는 점이다. 영웅에게는 언제나 공주로 표상되는 구체적인 구출 목표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불의한 권력에 빌붙은 자들의 머리 위로 유심이 폭발하면서 연출하는 장난스러운 불꽃놀이 장면은 다소 무거웠던 관객의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 준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전해져 온다.


 


임대근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중국영화포럼 사무국장. 중국영화, 대중문화, 문화콘텐츠연구 등에 관심을 갖고 강의, 연구, 번역 등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음. 한-중 영화의 초국적 교류와 상호 관객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음. dagenny@daum.net

 

 

 

* 『201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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