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오늘의 영화 - 곡성] 믿음과 의심이라는 뫼비우스의 띠
[2017 오늘의 영화 - 곡성] 믿음과 의심이라는 뫼비우스의 띠
  • 임정식
  • 승인 2017.03.01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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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 감독의 '곡성'
ⓒ20세기 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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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는 왜 희생자가 되었나?” 〈곡성〉의 시사회에서 나홍진 감독이 밝힌 연출 의도이다. 나홍진은 “희생자는 어떤 이유로 희생됐는지 묻고 싶었다.”라고 말하고, 신의 섭리와 위로라는 단어를 꺼냈다. 어떤 인물이 희생자가 된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홍진은 ‘미끼론’을 던졌다. 낚시꾼은 낚시할 때 어떤 물고기가 미끼를 물지 알 수 없다. 낚시꾼은 불특정의 물고기를 향해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영화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외지인(쿠니무라 준)의 낚시 장면과 무당인 일광(황정민)의 대사를 통해 희생의 배경을 설명한다. 상황이 이렇다면, 희생자는 아무리 억울해도 어찌 할 방법이 없다. 자신의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희생의 무작위성이 신의 섭리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곡성〉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희생자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어떠한 잘못도, 이유도 없이 희생당한 자에게 건네는 위로라면,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영화는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인물의 성격이나 역할, 그들의 상호관계는 각각 두세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영화의 내용, 주제, 결말에 대해 그토록 많은 담론이 쏟아진 이유이다. 어찌 보면 맨손으로 구름을 움켜쥐려는 것만 같다. 

ⓒ20세기 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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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성〉은 기이하고 매혹적인 영화이다. 서사의 그물에는 분명히 구멍이 뚫려 있는데(사건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인과관계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꽤 많다), 〈곡성〉은 그 허술한 요소들까지 뭉뚱그려서 끌어안고 휘몰아친다. 형체가 없는 것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에게 뼈와 살을 입혀 역동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굿판의 속성이 이와 비슷하다. 시끌벅적하고 혼란스럽고 다이내믹한데, 다 끝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혼미한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곡성〉이라는 영화가 한바탕 굿판일 수 있겠다. 이는 좀처럼 보기 드문 장관이다. 섬세함과 매끈함 대신 투박함과 묵직함으로 서사를 밀고나가는 힘은 거대 육식동물의 질주를 보는 듯하다. 좀비, 오컬트, 샤머니즘, 엑소시즘과 같은 낯선 영토를 펼쳐 보인 것도 새로운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곡성〉은 감독의 제작 의도보다 더 넓은 차원에서 힘차게 펄떡거린다. 그 배경에는 믿음과 의심이라는 미끼를 덜컥 삼킨 자들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다. 영화 포스터가 말하듯, 단순한 의심 혹은 현혹의 문제를 초월한다. 

ⓒ20세기 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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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은 〈추격자〉와 〈황해〉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이다. 나홍진의 장기인 장르영화의 긴장감이 스크린에 흥건하다. 한 사건이 발생하고, 누군가가 범인을 쫓고, 그 긴박한 과정에서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도 닮았다. 그런데 〈곡성〉은 현실사회를 직접 겨냥하기보다 조금 더 근원적인 곳을 탐사한다. 믿음과 의심, 과학, 종교와 같은 추상적인 화두를 던진다. 준구는 처음에 재앙의 원인을 버섯이라고 생각한다. 버섯의 성분을 분석한 과학에 대한 믿음이다. 준구는 곧이어 외지인이 범인이라고 의심한다. ‘일본 사람이 범인일 리가 없다’에서 ‘그놈이 범인이다’는 확신으로 바뀐다. 모든 불행은 이 의심에서 비롯된다. 준구는 외지인이 머무는 산속 폐가의 사진이나 효진의 두드러기가 증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확실한 물증은 없다. 일광이 준구의 딜레마를 해결해준다. 일광은 그 외지인은 귀신이라고, 악령이라고 단언한다. 준구는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서 일광을 불러 굿을 한다. 

이쯤에서 영화가 끝났다면, 무명이 굿을 하면서 살(煞)을 날려 외지인을 죽였다면, 그래서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곡성〉은 그저 그런 영화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곡성〉의 진수는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준구는 갑자기 굿을 중단시킨다. 그는 딸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일광에 대한 의심이 버섯처럼 피어난다. 준구는 “그 새끼가 귀신인지 아닌지 내가 직접 봐야겠다.”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외지인의 집을 습격한다. 준구는 믿음과 의심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과정에서 미궁에 빠진다. 준구의 딜레마는 결말 에서 절정에 달한다. 무명(천우희)은 준구에게 닭이 세 번 울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이 모두 죽는다고 경고한다. 이 순간, 일광이 준구를 재촉한다. 무명은 악마이고, 빨리 집에 가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말한다. 누구를 의심하고 누구를 믿어야 하나? 준구는 혼란스럽다. 준구는 일광을 의심하는 상태이다. 무명은 정체가 의심스러운 인물이다. 그래서 무명에게 “도대체 니 정체가 뭐냐?”고 되풀이해서 묻는다. 준구가 무명을 믿고 그 길을 따라가면 일광에 대한 의심과 만난다. 반대로 일광을 믿고 그 길을 따라가면 무명에 대한 의심과 만난다. 믿음과 의심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다. 

ⓒ20세기 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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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구의 선택은 이해할 만하다. 준구에게 무명은 모호한 존재이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불분명하고,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도 알 수 없다. 일광을 단숨에 제압할 정도로 영적 능력이 뛰어나지만, 그 능력을 발휘해서 준구나 마을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슬퍼할 뿐이다. 외지인의 모호함은 한층 심하다. 그는 사령(死靈)으로 불리지만, 엄연히 육체를 지닌 살아있는 인물이다. 고라니의 내장을 뜯어먹을 때는 원시인이나 짐승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톨릭 부제(副祭)에게 일갈할 때는 영적인 존재가 된다. 외지인은 부제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다. 부제는 이미 자신을 악마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리 말을 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자 부제는 두려움에 떨고, 외지인은 붉은 악마로 변한다. 이 동굴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외지인의 손바닥에 뚫린 구멍을 보여준다. 외지인이 죽음에서 부활한 직후이다. 심지어 외지인은 예수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프롤로그의 누가복음 인용 구절과 외지인이 육성으로 들려주는 내용은 똑같다. ‘왜 나를 의심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곡성〉의 인물과 플롯은 모호하고 중의적이다. 그래서 해석의 혼란이 발생한다. 〈곡성〉의 모호함은 어디까지가 의도된 것인가, 플롯의 문제인가 아니면 표현 기법의 차원인가. 이 모호함에 대한 판단과 해석은 〈곡성〉에 대한 평가와 연결된다.   

〈곡성〉이 전작들과 다른 점은 대략 두 가지이다. 첫째, 인물 관계와 서사 전개가 방사형으로 바뀌었다. 〈추격자〉는 엄중호와 지영민, 〈황해〉는 김구남과 면정학의 추격전이 뼈대를 이룬다. 두 영화에서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동선과 인물 구도는 직선적이다. 쫓는 자는 눈앞에 보이는 자를 잡기 위해 무조건 죽어라고 뛴다. 그래서 달리는 장면이나 카체이싱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곡성〉에서는 준구가 표면상 쫓는 자이다. 하지만 그가 쫒는 것은 사실상 형체가 없는 것이다. 외지인이 재앙의 원인이라는 의심은 소문에서 나온 것이다. 효진의 실내화도 심증을 강화해줄 뿐, 확실한 물증은 아니다. 또한 추격의 과정이나 대상자들의 관계도 단선적이지 않다. 심리적으로 보면, 쫒기는 자는 오히려 준구이다. 여기에다 주요 인물인 준구와 외지인, 무명-일광-외지인, 준구와 무명의 관계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20세기 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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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곡성〉은 추상적이다. 〈추격자〉와 〈황해〉의 주인공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창녀를 유괴한 놈, 아내와 바람을 피운 놈을 잡는 것이 목적이다. 두 영화의 추격 대상은 물질적이다. 〈곡성〉의 사건은 외지인을 죽인다고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쫒는 자가 도리어 파국을 맞는다. 〈곡성〉은 종교적인 요소가 많다. 무속신앙, 천주교, 일본 토속신앙과 관련돼 있다. 그런데 어느 종교도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중영화로서의 장르적 쾌감을 유지하면서 이만큼 추상적이고 복합적인 테마를 역동적으로 다룬 작품을 만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는 〈곡성〉의 부분적인 빈틈을 충분히 메워주는 장점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의 하나는 폭발적인 에너지이다.     

〈곡성〉에는 원시적인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 에너지는 혀를 날름거리며 관객의 마음을 송두리째 빨아들인다. 일광의 굿, 외지인의 의식, 효진의 몸부림이 교차 편집된 굿판 시퀀스는 이 영화의 절정이다. 빠른 템포로 연주되는 타악기 소리, 횃불과 촛불, 괴성과 기성, 일광의 칼춤, 효진의 몸부림 어우러져 엑스타시를 선사한다. 쇼트의 길이와 명암, 시각과 청각 등을 자유롭게 변주하며 리듬을 만들어가는 이 시퀀스의 흡인력은 감탄할 만하다. 인물과 소리와 이미지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일광과 외지인의 어긋난 갈등마저 휘발시켜 버린다. 〈곡성〉은 일광이 벌인 굿판의 불꽃처럼 너울거리며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스릴러의 대중적인 재미, 믿음과 의심이라는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테마, 엑소시즘과 같은 새로운 요소를 효과적으로 버무려 역동적으로 표현해낸 솜씨는 2016년 한국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수확이다. (끝*21매)

 


임정식 고려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공저로 『스타 이미지 탐구1 장동건』 『스타 이미지 탐구2 김혜수』가 있음. 영화평론가, 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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