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오늘의 영화 - 경주] 경주의 공간성이 만든 영화 〈경주〉
[2015 오늘의 영화 - 경주] 경주의 공간성이 만든 영화 〈경주〉
  • 홍용희
  • 승인 2015.04.01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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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가 본 적이 있는가? 그곳은 사람보다 무덤이 먼저 보인다. 집보다 큰 무덤의 그림자를 따라 인가의 불빛이 반짝이고 지나다니는 길들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어둠도 무덤에서부터 오고 새벽도 무덤에서부터 온다. 신라 천년의 자취가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무덤이 주인일까? 살아 있는 사람이 주인일까? 그 답은 둘 다 주인이다. 경주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다. 본래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둘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호흡하고 죽으면서 삶을 발견한다. 죽음을 소중하게 대할 때 삶도 소중해진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은 모두 우리의 것이다. 다만, 그동안 우리들이 삶의 편에서만 죽음을 조망했다면, 경주는 죽음의 편에서 삶을 조망하고 있다. 그 결과는 서로 다르지 않다. 다만, 훨씬 더 고즈넉하고 평화롭고 느리다는 것이다. 죽음의 깊은 시간 의식이 삶의 시간을 껴안고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는 바로 이러한 천년의 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한다. 아니, 경주의 공간성[topos]이 만든 영화이다. 그래서 시간 의식이 깊고 느리고 평화롭다. 영화의 전개도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북경대 교수 최현이 친한 형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다. 장례식장을 나온 그는 돌연 7년 전에 고인과 함께 갔던 경주의 찻집을 향한다. 그 찻집의 벽에 그려져 있던 춘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인벤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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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중심점에 해당하는 춘화의 상징성은 무엇일까? 춘화, 그 에로티시즘의 극점은 삶의 욕망과 죽음 충동이 서로 마주치면서 섞이는 자리이다. 조르주 바타이유가 에로티시즘이란 죽지 않고 죽음을 경험하는 삶의 세계라고 했던가. 이것은 또한 삶 속에서 경험하는 삶의 규율로부터 해방된 영역으로도 해석된다. 삶의 욕망과 죽음 충동이 내밀하게 소통하는 정경이 춘화인 것이다. 춘화와 경주는 이렇게 서로 연속성을 지닌다.

경주 찻집을 찾아 가는 여정에 어린 여자 아이와 아이의 엄마가 스쳐 지나간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아이의 생기와 엄마의 어둠이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엄마의 기운에 아이가 복속될 때 이들은 위험할 것이다. 과연 영화가 중반에 이르면 이들은 자살한 것으로 드러난다. 대체로 삶보다는 죽음이 크고 강하다.

최현은 경주에 당도한다. 자전거를 빌린다. 영화 〈경주〉의 속도 감각은 자동차와는 거리가 먼, 몸의 운동을 통해 이동하는 자전거의 속도 수준으로 전개된다. 경주는 과연 무덤이 먼저 보인다. 고등학생들의 풋풋한 데이트도 무덤가에서 이루어진다. 휴식도 무덤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이다. 최현은 옛 애인에게 전화를 하고 나서 찻집을 찾아간다. 찻집은 정물화처럼 맑고 고요하다. 찻집의 여인 공윤희의 걸음걸이는 느리고 가지런하다. 경주 무덤의 시간 리듬에 가깝다고 할까. 그녀의 삶의 세계 역시 죽음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윤희는 최현을 자세히 바라본다.“ 왜요? 뭐 묻었어요?”“아니요. 제가 아는 분과 좀 닮은 것 같아서요.”최현에게서 문득 우울증으로 죽은 자신의 남편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윤희에게 최현은 낯설면서 낯설지 않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 가까워지게 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춘화는 보이지 않는다. 춘화는 벽지의 어둠 속에 갇혀 있다. 3년 전에 공윤희가 인수하면서 벽지를 붙였기 때문이다.

ⓒ인벤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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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은 옛 애인을 만나러 경주역으로 나간다. 대학 후배였던 옛 애인은 민감하고 신경질적이다. 그녀는 골목길에 사주 관상, 토정비결, 역이라 고 쓰인 작은 천막에 들어간다. 천막에서 할아버지가 그녀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을 본 얘기를 들려준다. “앞으로 나한테는 애가 없대요.”

그녀는 왜 이런 얘기를 최현에게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게된다. 그녀는 최현과의 관계로 낙태를 한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녀의 몸 역시 죽음의 흔적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최현은 그녀와 헤어지고 다시 찻집으로 온다. 찻집에서 죽은 형의 부인을 만난다. 아직 검은 상복을 입고 있다. 눈이 맑고 깊다. 그녀는 느리지만 또박또박 말을 이어간다.

찬휘 씨는 절대 누구한테 살해당한 게 아닙니다. 그 죽음은 찬희 씨 스스로 결정한 거예요. 하지만 자살한 것은 아니에요. 고승들은 자신들이 열반하는 날짜를 스스로 정하잖아요. 그분들은 죽음의 날을 결정하는 순간에 비록 육체는 속세에 있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속세와의 인연을 딱 끊어 버린 게 되잖아요. 최 선생님은 이해해 주실 거지요.

그녀는 곧 사라진다. 환영이었다. 현실과 환영의 공존이다. 그러나 환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그녀가 남긴 말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 의식이다. 육체는 속세에 있지만 죽음을 살기도 한다는 것, 죽음은 속세에 함께 거주한다는 것, 죽음은 무서운 형벌이나 파멸이 아니라 스스로 정할 수도 있는 친숙한 대상이라는 것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인벤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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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과 찻집의 공윤희는 점점 더 친숙해지면서 저녁 모임에 함께 간다. 늦어진 저녁 모임이 끝나고 최현과 공윤희, 그리고 공윤희를 좋아하는 남자 영민, 셋이서 경주의 밤길을 걷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이 보인다. 이들은 마치 무덤의 부름에 응답하듯 걸어간다. 푸른 달빛에 반사된 무덤은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 같다. 경주에서 무덤은 밤에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편안한 이웃이다. 무덤에 엎드린 공윤희는 소리친다.“ 들어가도 돼요? 들려요? 들어가도 되냐고요!” 마치 이웃집 대문을 향해 내는 소리 같다. 무덤은 대답이 없지만 그러나 그녀는 듣고 있었을 것이다. ‘늘 열려있는 이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무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주의 야경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경주는 이렇게 무덤 위에서 가장 잘 보인다.

최현은 공윤희의 집으로 따라 들어간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공윤희가 말을 꺼낸다.“ 집 앞에 능이 있으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좋은데요?”경주에서 무덤은 창가를 지켜 주는 믿음직한 언덕이다.

날이 밝고 최현은 어제 옛 애인이 갔던 점집에 가 본다. 그러나 그곳에는 할아버지가 없고 젊은 여자만이 있다. 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란다. 죽음이 삶 속에 수시로 드나들며 평화롭게 활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현은 가로수 길을 걸으면서 오토바이 폭주족을 만난다. 그들은 곧 넘어지면서 모두 죽고 만다. 최현은 죽음을 몰고 다닌다. 아니, 경주에는 죽음이 도처에 산재한다. 그것도 아니면, 본래 죽음은 삶 속에 비스듬히 공존한다는 것을 경주는 좀 더 또렷하게 일러주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찻집의 춘화로 모아진다. 공윤희가 벽지를 뜯는다. 시간의 표지가 뜯어진다. 고인과 함께 왔던 7년 전 그날이 된다. 그곳에는 공윤희도 있다. 시간성이 선형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비선형적, 전방위적으로 재구성된다. 춘화에는“한잔하고 하세.”라고 씌어 있다. 여유로운 경주식 에로티시즘이다. 관습적으로 길들여진 선형적인 시간성을 조금만 비켜나면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가 서로 한 몸임을 이 영화는 보여 주고 있다. 장률의 〈경주〉는 경주라는 공간성을 비선형적인 시간성을 통해 묘파함으로써 우리네 삶의 진경을 풍경화처럼 펼쳐 놓은 것이다. 〈경주〉는 죽음의 영화이면서 동시에 삶의 영화이다.

 


홍용희 1966년 경북 안동 출생. 1995년《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로 『김지하 문학 연구』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등이 있음. 제 1회 젊은 평론가상, 편운문학상, 시와시학상, 애지문학상등수상. 《시작》, 《쿨투라》편집위원. 경희사이버대교수. chaenjan@naver.com

 

* 『201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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