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오늘의 영화 - 우아한 거짓말]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내 편’이 되어 주기를…
[2015 오늘의 영화 - 우아한 거짓말]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내 편’이 되어 주기를…
  • 설규주
  • 승인 2015.04.01 0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라의 가족: ‘나쁜’ 아빠, 그러나 ‘내 편’인 언니

〈우아한 거짓말〉에는 크게 두 가족—만지, 천지, 엄마와 미란, 미라, 아빠—이 등장한다. 두 가족은 겉보기에는 이른바 ‘한 부모 가족’에 자매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가족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을 보면 차이점도 나타난다. 이 두 가족을 미라와 천지의 입장에서 각각 살펴볼 수 있다.

미라의 아빠는 ‘나쁜’ 아빠라 불릴 만하다. 툭하면 성질을 부리고 쉽게 욕설을 내뱉고 아무 때나 주먹이 올라가는 사람이다. 아내가 죽었다고 거짓말하면서 바람을 피우는가 하면 상처喪妻 후에는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은 채 딸들의 생활에는 관심도 갖지 않는다. 이런 아빠에 대해 미라가 고마움이나 자랑스러움을 느낄 리 만무하다. 그저 남이 알까 봐 부끄러운 아빠이고 스스로도 피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차라리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할 정도이다. 그런데 미라에게는 언니 미란이 있다. 미란은 미라를 세심하게 챙긴다. 폭력성 가득한 아빠 앞에서도 미라의 학원비만큼은 당당하게 요구한다. 미라가 음식을 먹다가 얹히는 것 같으면 물을 권하고 입을 닦아 준다. 만지 집에서 만지 엄마가 차려 준 풍성한 식탁 앞에서는 맛있는 음식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속삭인다. 미란이 미라를 보호하는 모습의 절정은 천지가 미라에게 남긴 쪽지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미라를 용서하겠다는 내용을 본 만지가 “너 천지 갖고 놀았니?”라며 미라를 다그치자, 미란은 천지의 죽음을 다소 폄하하면서까지(“한번 싸운 거 가지고 그렇다고 죽어?”) 미라를 필사적으로 보호한다. “만지 너 그만해. 내 동생 일로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미라한테 윽박지르지 마.”

이 대목은 문득 공자를 연상시킨다. 『논어』에서 섭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치자 그 잘못을 증언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감춰 주고 아들은 아버지의 잘못을 감춰 주는 것 속에 정직이 있습니다.”

물론 공자가 말하는 맥락과 초점은 영화 속 미란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자기 가족의 허물을 덮고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공자는 예외 없는 법치보다는 가족 간의 천륜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데, 미란에게서도 역시 옳음 자체보다는 가족 간의 인지상정에서 비롯된 행동을 엿볼 수 있다. 미란도 만지가 동생을 잃은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동생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상황으로까지 번지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미란의 그러한 모습은 미란이 특별히 이기적이거나 못돼서가 아니라 사실 타고난, 그래서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CGV 무비꼴라쥬
ⓒCGV 무비꼴라쥬

남이나 다를 바 없이 행동하는 아빠와 달리, 미란은 미라에게 확실한 ‘내 편’이다. 미란이 천지의 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미라를 감싸는 모습이 만지에게 좋게 보일 리는 없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만지는 어쩌면 기시감旣視感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지 앞에서 동생을 보호하는 미란의 행동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지가 죽은 후 미란의 집에 초대를 받아 떡볶이를 먹을 때도 만지는 그러한 모습을 보았다. 식탁에서 미란이 미라를 살갑게 챙겨 주는 모습을 보고 울컥해서 도중에 자리를 일어섰던 만지는, 쪽지 내용이 공개된 후 미란이 (만지에게는) 다소 공격적인 방식으로 동생을 변호하는 모습 앞에서 어떻게 내 동생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대꾸하지 못한다. 미라의 손을 잡고 떠나가는 미란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만지에게는 이제 더 이상 보호해 줄 동생이 없으니까……. 자신은 미란만큼 동생을 품어 주지 못했으니까…….

천지의 가족: ‘평범한’ 엄마, 그리고 ‘평범한’ 언니

천지의 엄마는 무난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마트에서는 매너 좋고 솜씨 좋은 판매원이고, 동료 직원의 조카가 겪은 학교 폭력 피해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위로와 함께 용돈도 건네는 따뜻한 마음씨도 가지고 있다. 집에서는 야무진 살림꾼이고 두 딸과 아등바등 살아가는 평범한 엄마이다. 천지의 언니 만지 역시 학교와 학원에 다니며 친구들과 군것질하러 돌아다니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객관적으로도 대체로 평범한 이 두 모녀는 천지에게도 평범했다. 물론 혈연적으로는 특별한 관계이지만, 천지가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특별히 ‘내 편’이라고 느낄 만한 계기는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없다. 천지는 학교생활 중에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과 자신의 힘든 마음을 엄마와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던 것처럼 착하고 반듯한 딸이자 동생으로만 남아 있었다. 왜 천지는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을까……. 엄마나 언니에게 이야기를 해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그들을 힘들고 불편하게 할 거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이미 죽음을 결심한 상황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을 ‘방해’ 받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CGV 무비꼴라쥬
ⓒCGV 무비꼴라쥬

미라의 가족을 잠시 떠올려 보자. ‘나쁜’ 아빠는 가족을 해체시킬 수 있다. 가족이라는 법적 관계는 유지될지 몰라도 나쁜 아빠는 가족의 기능과 가족 간의 관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사실상 정상적인 가족이 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편’인 언니가 있어서 미라는 버텨 낸다. 가족 구성원 중 지독히 나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때문에 삶을 놓아 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낄 수도 있지만, 가족 구성원 중 확실히 ‘내 편’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냐 아니냐 보다 ‘내 편’이냐 아니냐이다.

괴로움과 모욕감을 주는 ‘나쁜’ 사람이 주변에 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함께 하는 것은 물론 극한 상황에서도 지켜 줄 거라는 기대와 믿음을 주는 ‘내 편’이 있다면, 후자가 전자를 상쇄할 여지가 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이 계속되고 천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쌓여 간다면 미라도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픈 충동을 느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란이 있는 한, 미라가 그러한 충동을 실행에 옮길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천지의 가족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천지에게는 미라와 달리 ‘나쁜’ 가족 구성원이 없다. 가족 때문에 고통 받을 일도 없다. 그렇지만, 가족 때문에라도 살아야겠다고 느끼게 하는 가족 구성원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천지의 엄마와 만지의 책임을 추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난하고 평균적인 여럿보다 때로는 나쁨과 좋음의 조합이, 아니 더 정확히는 나쁨 따위야 있든 말든 단 하나의 좋음만이라도 있으면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그것이 더 유효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쁜 것’을 제거하기보다는(어차피 우리의 삶에서 그것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상쇄할 ‘좋은 것’ 다시 말해서 ‘내 편’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천지의 죽음에 한몫을 하게 된 미라도 한때는 천지에게 ‘내 편’이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천지의 ‘내 편’이었음을 무효화해 버린 미라가 지금은 ‘내 편’(즉, 언니)의 존재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는 점은 묘한 아이러니를 이룬다.

천지의 죽음에서 ‘many hands’의 문제

many hands[많은 손길]는 말 그대로 많은 사람들의 손 또는 힘을 가리킨다. Many hands make light work.[백짓장도 맞들면 낫다.]와 같이 긍정적인 맥락에서도 쓰일 수 있지만, 나쁜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형 사고가 났을 때 많은 경우에 우리는 명백히 잘못을 저질렀거나 어떤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한 특정인 몇몇을 지목해서 그 책임을 무겁게 묻곤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러한 사고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관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고 그에 따라 져야 할 책임에도 경중이 있겠지만, 그 중 일부만 다르게 행동했더라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거나 적어도 피해의 규모라도 줄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고에는 늘 many hands가 개입되어 있다. 그 중에 더 큰 손, 더 작은 손은 있을지라도…….

ⓒCGV 무비꼴라쥬
ⓒCGV 무비꼴라쥬

천지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천지는 다섯 개의 쪽지를 남겼고 그 중 두 개는 미라와 화연을 향한 것이었다. 영화 속에 묘사된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미라와 화연은 쪽지를 받을 만하다. 그렇지만 영화의 모든 조각을 맞추어 놓고 보면, 미라와 화연 외에도 매우 많은 손들이 천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단체 카톡방에서 천지를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던 천지의 반 친구들, 이른바 ‘은따’로 통하는 천지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담임선생님, 싫다는 천지 엄마에게 구애를 하다가 미라에게 들키는 바람에 미라와 천지 사이에 찬물을 끼얹은 미라의 아빠도 결과적으로 천지의 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지를 그저 착하고 무난한 딸이자 동생으로만 여겼던 천지 엄마와 만지는 천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방향에 서 있지는 않았지만, 천지의 고통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천지의 죽음을 막아 내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런데 many hands는 불공평하다.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사태의 원인에 주로 관련된 many hands와 사후 수습 혹은 사태의 후폭풍에 관련된 many hands가 같지 않다. 천지의 죽음에 대해 비교적 ‘큰 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연이나 미라가 천지의 죽음 이후에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천지의 죽음이 화연이나 미라를 그리 많이 힘들게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화연의 경우 미라와 달리 사실상 따돌림을 주도했고 공개적으로 그것을 즐겼다는 점에서 더 큰 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특별히 그것을 인지하기보다는 부정하려고 애쓴다. ‘왜 나만?’이라는 생각을 드러내 놓고 표현하며 자신에게 향하는 친구들의 비난을 일종의 ‘접대(노래방 쏘기)’로 해소하려고도 하고 그 전략이 실패하자 아예 이사 가기를 원하며 현재의 상황을 피하고 싶어한다. 미라 역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누린다. ‘은따’였던 천지에게 그나마 잘해 주었던 사람이 자신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하기도 한다. 화연이나 미라에 비해서는 ‘작은 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학급 친구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평소처럼 수다를 떨고 운동을 하고 뜨개질을 하고 놀러 다닌다.

화연, 미라, 그리고 반 친구들이 이른바 작위作爲[commission]에 해당하는 큰 many hands라면, 만지와 엄마는 부작위不作爲[omission]에 해당하는 작은 many hands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천지의 죽음으로 인해 흐르는 눈물에 목이 메고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어야 하는 것도, 천지가 죽은 이유를 밝혀내야만 하는 것도 고스란히 천지 가족의 몫으로 남는다. 죽음의 원인에서는 수많은 손들 중 하나, 그것도 ‘아주 작은 손들’에 속했던 엄마와 만지는 천지의 죽음 이후에는 가장 큰, 그것도 ‘압도적으로 큰 손들’이 되고 만 셈이다.

작은 말에도 힘이 있다

천지가 남긴 다섯 개의 쪽지 중 네 개는 당사자에게 전해진다. 이 네 개의 쪽지는 모두 ‘과거’를 향한 천지의 메시지이다. 엄마와 언니에게는 미안함과 사랑을, 화연과 미라에게는 온건한 질책과 용서를 전한다. 도서관에서 천지가 보던 책 옆에 놓인 털실 속의 다섯 번째 쪽지는 ‘미래’를 향한 메시지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언젠가 천지와 비슷한 이유로 그 책을 집어들 수 있는 또 다른 천지에게 들려주고 싶은, 혹은 어쩌면 천지가 듣고 싶었던 한마디를 남긴다. “잘 지내고 있지?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지. 고마워. 잘 견뎌 줘서.”

이 쪽지는 누가 보냈느냐에 따라, 그리고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저 평범하고 흔한 격려 메시지 정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천지가 보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천지가 그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살아 있을 때 ‘내 편’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지 못했던 천지가 미지의 누군가에게 그의 ‘내 편’으로서 한마디를 건넨다. 이 경우 천지가 남긴 메시지는 의례적이고 가벼운 인사가 아니라, 또 다른 천지에게는 매우 절실하고 꼭 필요한 한마디가 될 수 있다. 단 몇 문장, 겨우 수십 자의 글자가 얼마나 힘이 있을까 싶지만, 또 다른 천지가 처한 맥락에서는 그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CGV 무비꼴라쥬
ⓒCGV 무비꼴라쥬

러시아의 동화 중에 「커다란 순무」라는 작품이 있다. 할아버지가 밭에 순무 씨앗을 심었는데 거기서 아주 큰 순무가 자란다. 할아버지가 그 순무를 뽑아 보려고 했지만 어찌나 크고 무겁던지 혼자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할머니, 손주도 힘을 모아 같이 뽑아 보지만 역시 뽑히지 않는다. 함께 사는 고양이, 개 등 힘을 보탤 수 있는 사람, 동물이 모두 나서 보지만 역부족이다. 마지막에 생쥐가 힘을 보태면서 결국 순무가 뽑히고 그것으로 맛있는 요리를 해서 같이 먹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중 ‘아주 작은 힘’ 하나가 가지는 결정력도 빼놓을 수 없다. 생쥐의 힘이라고 해봐야 할아버지, 할머니 등에 비해 아주 작을 것이고 그 이전까지 모아진 힘에 비하면 극히 보잘 것 없는 것에 불과하다. 힘의 단순 크기로만 보면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생쥐의 힘이 보태지지 않았다면 순무는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통장 잔고에 9,999원만 있을 경우 단 1원이 부족해서 현금 인출기로 출금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천지 또래의 아이들에게 세상의 절반이나 차지한다는 ‘친구들’에 의해 고통 받았던 천지가 진정 원했던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화연과 같은 친구를 제거하거나 따돌림을 즐기고 방관하는 반 친구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고 다독여 주는 작은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남긴 마지막 쪽지에 있던 것과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갈등했을 천지는 생쥐의 힘처럼, 단돈 1원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위로의 말만으로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작은 말의 힘은 이 반대의 상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켜켜이 쌓여 온 괴롭힘, 모욕, 무시 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견뎌 내고 이겨 내려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여기에 더해지는 무관심한 작은 말 한마디가 그동안 버텨 오게 했던 의지와 결심을 와르르 무너뜨릴 수도 있다.

학교 폭력이라는 일종의 거대 담론 속에서 막대한 비용과 함께 복잡한 제도들이 움직이고 있고 계속 그 덩치를 불려 가고 있다. 그러한 거시적인 움직임 못지않게, 우리의 일상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놓치고 있는 작은 것들에 대한 세심한 감수성을 회복시키는 일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때로는,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제도보다 ‘내 편’인 사람이 들려주는 작은 말 한마디가 더 큰 힘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설규주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 학사, 석사, 박사 졸업.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부교수. 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음. qzoos@hanmail.net

 

* 『201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