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시성'과 '과작성', 김종원 평론세계를 집약해주는 두 키워드 이 평론집이 없었다면 한국영화 100주년은 그만큼 더 허전했을 터
[북리뷰] '시성'과 '과작성', 김종원 평론세계를 집약해주는 두 키워드 이 평론집이 없었다면 한국영화 100주년은 그만큼 더 허전했을 터
  • 전찬일(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 승인 2020.04.0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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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시대정신 - 한국영화 100년, 나의 영화평론 60년』

   “과작인 나에게조차 다섯 편의 연작을 낳게 한 <퐁네프의 연인들>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정詩情, 남루하고 상투적인 사랑마저 새롭게 일구어낸 연소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힘들이 레오 까락스를 랭보에 비유될 만한 시정신의 소유자로 평가받게 만든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 땅의 대표적 (원로)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생의 생애 세 번째 평론집 『영화와 시대정신 - 한국영화 100년, 나의 영화평론 60년』(작가, 2020. 01. 03)에 실려 있는 총 38편 중 마지막 원고 ‘문학과 영화 사이 — 상상력의 확대와 시각 체험’의 한 단락이다. 연작은 20대 초, 평론 이전에 시로 등단한 선생이 여주인공 미셸(줄리엣 비노쉬)을 위해 썼던 “사랑의 변주곡” 연작시를 가리킨다. 과작인 이유는 상기 평문을 계간 《시와 시학》 2002년 봄호에 발표했을 당시 이미 평론 40여년이 지난 뒤였건만, 선생이 낸 본격 평론집이 고작 1권—『영상시대의 우화』(제삼기획, 1985. 04. 01)—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두 번째 평론집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현대미학사, 2007. 04. 10)은 각 ‘학구적 접근’과 ‘실천비평의 시각’ 2권으로 나오는데, 22년 만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12년 만이다. 60년간 3권의 평론집이라니, 어찌 과작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시성’과 ‘과작성’은 선생의 평론세계를 단적으로 집약해주는 두 키워드다. 물론 그 둘은 자웅동체다. 과작성은 선생이 그만큼 조심·신중하며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것을 함축할진대, 그 성질은 시의 축약성·생략성과 직결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도입부 같은 근사한 평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비평 활동 30년도 채 되지 않는 후배인 나는 여태껏 레오 카락스(보도자료를 따랐다)는 말할 것 없고 그의 흑백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와 최대 대표작 <나쁜 피>(1986)에 이은 세 번째 장편(정확히는 ‘퐁뇌프’로 표기돼야 한다. 센Seine강의 ‘아홉 번째 다리Pont Neuf’!)을 향해 이처럼 최상의 평가를 바친 사례를 겪은 적이 없다. 그렇고 그런 여느 영화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시적 정취와 연소의 이미지를 넘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등의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비교하다니! 동의 여부를 떠나, 더할 나위 없는 극찬이다.

  하긴 레오 카락스 그는 <나쁜 피> 이후 한때, <퐁네프의 연인들>이 나오기 전까지 몇 년 동안 이 땅의 숱한 시네필들에게 과도하다싶을 정도의 열광적 지지·흠모를 받았었다. 유난히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 있었다는 ‘누벨 이마주’란 통칭 하에. <디바>(1981)로 그 포스트-누벨바그의 문을 열었고 <베티 블루 37.2>(1986)의 열기로 그 경향·스타일을 지속시켰던 장 자크 베넥스나, <마지막 전투>(1983) <그랑블루>(1988) 등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판 스티븐 스필버그’ 뤽 베송의 인기는 카락스에 견줄 수 없었다.

  7년이란 오랜 기다림 끝에 당도한, 센강 제9교 두 절박한 연인들의 구구절절 러브스토리는 하지만, 선생에겐 “화면에 깔리는 정감의 이미지에 자극 받아 시를 쓰도록 만”들었건만 내게는 속빈 강정이었다. 그때를 기해 나는, ‘포스트-고다르’요 프랑스, 아니 유럽 영화의 미래 아닐까, 싶은 기대를 모으기도 했던 카락스를 내 영화감독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봉준호(<흔들리는 도쿄>), 미셸 공드리(<아키라와 히로코>)와 더불어 공동 작업해 선보인 <도쿄!>(2008) 삼부작 <광인>은 단편이니 논외로 하자. 8년 만에 세상 빛을 본 <폴라X>(1999)는 허전하다 못해 공허했다. <광인> 모티브 등을 두루 활용해 빚어져 칸에서 월드 프리미어된 <홀리 모터스>(2012)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영화는 칸 본 상 수상은 말할 것 없고, 작품상 감독상 등 9개 후보지명된 2013년 프랑스 아카데미상 세자르상에서도 빈손에 그쳤다. 혹자는 “거의 완벽한 영화”, 라며 거품을 물었거늘….

  김종원 선생의 위 평문은 그러나, 20년 가까이 고수해온 내 확신을 마구 흔들고 있는 중이다. 혹 내가 카락스의 영화들에서 놓친 게 많은 건 아닐까, 그의 영화들을 오독·오해한 건 아닐까, 등의 반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레오 카락스를 다시 보고 듣고 느끼고 읽어야 하는 건 아닐까. 카락스가 결코 랭보는 아닐지언정, 그의 남다른 시정과 “남루하고 상투적인 사랑마저 새롭게 일구어낸 연소의 이미지” 등을 전격 동원해서 말이다.

  이번 신간의 38편 중 단 한 건도 빼놓지 않고 완독했음에도 이 마지막 원고에 이토록 집중하고 있는 까닭은, 별 다른 기대 없이 읽어나가던 원고가 그 이전의 다른 원고들보다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선사해서다. 그리고 기대 이상의 크고 깊은 자극·배움을 안겨줘서다. 난 선생처럼 이렇듯 통찰 넘치게 문학과 영화 간의 관계를 조망한 시각을 접한 적이 없다. “우리나라의 현대시 가운데서도 영화적 친화력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는 김광균의 「은수저」 분석 또한 <퐁네프의 연인들> 못잖게 압권이다.

  그런 압권은 적잖은 다른 원고들에도 해당된다. 일찍이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 2019년 10월호 특집 ‘한국영화 100년’ 등에서 제기했던 주장, 1부 「영화와 역사」의 첫 번째 평론 ‘한국영화의 기점은 <경성 전시의 경>이다’는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선생은 이 주장을 《쿨투라》 이전에 «공연과 리뷰» 103호(2018 겨울/2019 봄)의 영화 논단 「한국영화 백년과 기점의 문제점-<의리적 구토>에 가린 <경성 전시의 경>의 존재」에서 펼친 바 있는데, “실사 영화 <경성 전시의 경>이 연쇄극 <의리적 구토>보다 앞서 상영됐고”, “영화적 메카니즘적 측면, 곧 영화 촬영 등의 측면에서 더 뛰어나다고 보면서 비록 그 실체는 없어졌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첫 영화’라고 본다”는 것.

  선생은 일찍이 정중헌과 공동 저술한 역저 『우리 영화 100년』(현암사, 초판 2001. 12. 15)에서 “<의리적 구토>는 흥행 여건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상업적 타개책이라는 측면과 연극에 편승”했으며 일본 카메라맨이 촬영했다는 등의 한계가 명백하나, “우리의 손으로 연기를 촬영기 필름에 담아 낸 최초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 제작의 기점”으로 손색없다고 역설한 바 있는데, 이번에 그 입장을 바꿔 새로운 쟁점을 던진 것이다. 선생은 머리말에서 “하지만 나는 아직도 현역이다”라고 강변하고 있는데, 그 현역성을 이런 관점 변화보다 더 적절히 증거 하는 예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이어지는 ‘한국영화 검열시대’ 이야기, ‘전설이 된 수난기의 민족영화 - 나운규의 <아리랑>’이야기, ‘영화로 본 한일 관계의 명암’ 이야기, <미몽>(양주남, 1936)부터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에 이르는 7편의 ‘문화재로 거듭난 우리의 옛 영화’ 이야기 등은 어찌나 드라마틱한지 어지간한 웰메이드 극영화 못잖다.

  2부 「영화작가·배우론」 중에서는 ‘한국 문예영화의 대부 김수용 — 작품과 예술적 성과’가 단연 눈길을 끈다. “한국영화사상 고영남 감독(111편)에 이어 두 번째로 왕성한 활동을 한 다작의 보유자”. 어느덧 90이 넘은 노장은 “1958년 <공처가>로 데뷔한 이후 1999년 <침향>에 이르는 40년 동안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많을 때는 한해(1967년)에 10여 편이나 내놓은 의욕을 과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소위 ‘영화 작가적 면모’을 잃지 않았다, 고 선생은 감탄한다. “<혈맥>(1963)을 비롯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이상 1965), <만선>,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이상 1967)…등에서 거둔 질적 성과가 이를 말해준다…그는 특히 신상옥, 김기영, 유현목 및 이만희, 이성구 감독 등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끈 주역 중의 한 사람이다.”

  선생은 40년에 걸친 김수용의 영화세계를 연대기적으로 다섯 갈래로 나눈다. 1. 모색의 시기(1958~1963), 2. 전환기(1963~1965), 3. 전성기(1963~1967), 4. 답보기(1968~1976), 5. 변화 추구기(1977~1999)다. 선생은 역설한다. 김수용의 리얼리즘은 재평가돼야 한다고. 그의 리얼리즘은 “<도시로 간 처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극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화합의 여유를 갖고 있다.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그의 낙관주의적 경향은 여러 작품에서 감지된다. 비록 어두운 환경을 모티브로 했더라도 도달하는 지점은 밝고 희망적이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토속적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선생은 아쉬워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창화 감독과 더불어 김수용은, 다른 명장들에 가려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감이 없지 않다. 지난해 10회에 걸쳐 한국영화 100주년 연재를 하며 줄곧 느꼈던 안타까움이었다. 선생의 이 평론이 더 빛나는 이유다.

  신상옥 감독은 말할 것 없고, 정진우, 이형표, 고영남, 최하원, 석래명 등 대다수 평론가들로부터 상대적으로 홀대 받아온 감독들에 관한 이야기들도 합당한 주목을 요한다. 하물며 신성일, 김지미, 황정순 등의 스타 이야기는 어떻겠는가.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의 영화평론을 톺아본 ‘아메리카, 그리고 구라파적 취향과 관심’도 마찬가지다. 서른도 채 되지 않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나 시인에 평론가였으니, 선생의 선배 모델로 손색없다.

  3부 「영화 일반론」. ‘문학과 영화 사이’ 외에 한예종 2016 추계학술대회 ‘20세기 한국예술’ 발표 원고 ‘시대정신과 정체성의 모색 — 고전이 될 만한 10편의 영화’가 남다른 주목에 값한다. <아리랑>(1926), <임자 없는 나룻배>(1932), <마음의 고향>(1949), <피아골>(1955), <하녀>(1960), <오발탄>(1961), <장군의 수염>(1968), <바보들의 행진>(1975), <깊고 푸른 밤> (1984), <서편제>(1993)가 그들이다. 결국 선생의 20세기 한국영화 베스트10일진데, 이만희(<삼포가는 길, 1975>) 대신 이성구(<장군의 수염>)를, 이장호 대신 배창호를 선택한 안목이 흥미롭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어도….

  그 선정은 책 말미에 실린 ‘김종원의 한국 극영화 100선(제작순)’에 연결된다. 그에 대해서는 「한국영화 100주년 연재」 마지막 탄 ‘<청춘의 십자로>(1934)에서 <기생충>(2019)까지…전찬일의 한국영화 100선’에서 상술했으니 더 이상 논하지 않으련다. 이 리뷰를 마무리하면서 밀려드는 감회는 이것이다. 2020년 1월 3일 자로 발행되긴 했으나, 만약 선생의 이 세 번째 평론집이 없었다면 한국영화 100주년은 그만큼 더 허전했으리라는 것이다. 제목에도 명시됐듯 “한국영화 100년과 현역으로 살아온 자신의 ‘60년 영화 인생‘을 정리한” 기념비적 저서. 그 역사성 때문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오자들이나, 더러 눈에 띄는 크고 작은 오류들, 종종 어긋나는 관점의 차이 등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리라. 이 자리를 빌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크고 깊은 존경과 감사를 다시금 전하고 싶다.

 

 

* 《쿨투라》 2020년 3월호(통권 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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