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시인의 감성으로 톺아본 러시아의 황홀한 속살
[북리뷰] 시인의 감성으로 톺아본 러시아의 황홀한 속살
  • 손희(본지 에디터)
  • 승인 2020.04.03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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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찬 기행에세이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

겨울 햇살에 눈은 수정처럼 빛났다. 빙판 위를 걸으며 수국을 떠올렸다.
수국이 있던 자리의 눈을 헤쳐보았다. 단단한 얼음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눈밭에 어린아이처럼 러시아어로 미르(Мир, 평화)와 류보비(любовь, 사랑)라고 써보았다.
- 「겨울 수묵화」 중에서

  쿨투라에 6개월간 연재하며 화제를 낳기도 했던 송종찬 시인의 러시아 기행에세이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시인이 러시아에 체류한 4년여 동안 현장을 답사한 기행에세이지만 책의 행간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한 나라에 대한 행적을 기록한 기행집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학적 품격이 느껴지는 창작의 산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나 이사벨 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 송종찬은 그동안 세 권의 시집을 상자한 중견시인이다. 지난 2011년 재직 중이던 회사가 추진한 러시아 천연자원 개발 프로젝트에 자원하여 현지로 출발,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러시아인의 삶과 문화를 깊이 목도하게 된다. 이 책은 그 객관적 경험에 시인으로서의 주관적 해석과 문학적 자의식을 덧입힌 산문집으로 현단계 러시아를 다룬 산문집 중 최고 수준의 문학 텍스트라 할 만하다.

  국가 이름보다는 ‘시베리아’라는 공시성을 가진 기표로 통칭되기도 하는 러시아는 한국의 독자들에겐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도 단순히 하나의 외국이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국가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로서, 반도의 분단적 조건에 갇혀 있는 우리 국민에겐 이미 그 광활함만으로 경외의 대상일 수밖에 없고, 근현대 역사를 통해 러시아와 맺은 여러 가지 협력과 대립, 갈등과 부조의 관계들은 러시아에 대해 우리가 단순한 인식이나 인상에 머물 것을 허락하지 않는 요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차이코프스키나 무소르그스키를 위시한 고전음악과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로 상징되는 문학의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전파된 슬라브 문화에 대한 동경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 러시아에 대해 환상과 호기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송종찬 시인이 러시아를 처음 방문한 것은 2005년 러시아 현지에서 활약했던 조명희 시인의 시비 건립행사에 동행하면서부터다. 짧은 일정으로 마무리된 그 러시아행에서의 미련을 계속 쌓아두던 저자는 2011년 가족과 지인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끌린 듯 러시아행을 결심하고 결행한다. “러시아에 대한 동경은 꽤나 길었는데 첫 만남은 너무 짧았다. 가슴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바이칼호수를 떠나며 야생에서 피어난 붉은 양귀비꽃 한 송이를 책갈피 속에 넣어 왔다. 서울로 돌아와 책상 위에 횡단열차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자작나무 그림을 올려놓고 언젠가 다시 러시아로 가겠다는 소박한 꿈을 키웠다.”는 책 속의 술회 속에서 그의 러시아행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드디어 꿈에서 그리던 러시아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그가 맞이한 것은 해가 지지 않는 러시아의 백야와 겨울의 혹독한 어둠과 추위, 우랄산맥, 바이칼호, 그리고 눈이었다. 저자는 이 낯설고 이질적인 자연과의 조응을 통해 열악한 생존의 조건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생성하고 진화해온 슬라브적 감수성과 그 세계의 비의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촉지해 나가기 시작한다.

시아의 문화 예술, 문명의 감수성에 대한 섬세한 수용

  “러시아로 떠나는 나를 향해 꼭 가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가고 싶다고 했다. 누가 기다리고 있느냐며 그대는 다시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춥고 햇살 드문 곳에서 어떻게 지낼지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냥 견디어보겠다고 했다. 그곳은 아주 드넓어 길을 잃거나 어쩌면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프롤로그에서의 진술처럼, 저자는 그곳에서 시인의 시선과 감성으로 혁명가 레닌과 크룹스카야, 이네사의 행적을 좇으며 사랑과 혁명이라는 키워드를 읽어내기도 하고, 깊고 맑은 바이칼호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슬라브인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정령에 대해 상상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제정러시아 시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의 동선을 오갔던 수많은 예술가와 혁명가들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러시아인의 면면에 흐르고 있는 사랑과 기다림에의 열정을 소구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톨스토이의 작품들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이 구체적으로 소환되어 저자의 소회를 돕는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표피적 감각으로 외국의 문물에 대한 인상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육화하고 내면화하기위해 노력하면서 주관적인 해석과 수용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의 풍부한 문학적, 예술적 소양이 효과적으로 동원된다. 예컨대 혹독하고 긴 러시아의 겨울밤, 저자는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생가에 갔던 것을 떠올리고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들을 소환하면서 러시아가 겪은 역사와 그것에 연동된 러시아인의 사랑과 이별의 의미를 비범하게 성찰하는 것이다.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이 빛났던 것은 내일을 알 수 없는 현재성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 혁명, 내전이 차례로 이어지던 시기로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 다녔다. 전쟁과 혁명이 있었기에 그들의 사랑은 빛났고 이별은 참혹했다. 고난은 사랑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었고 비극적인 사랑은 불멸의 사랑을 완성했다.”

  그뿐 아니라 사랑을 위해 정적과의 결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당해 죽은 러시아 국민시인 푸시킨의 삶과 자살을 통해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한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삶을 돌아보고 거기에 자신의 자의식을 섬세하게 대입하면서 인간의 삶에 관여하는 문학의 책무와 구원의 가능성 등을 심도 있게 탐문한다. 이 책이 단순히 이국의 문물에 대한 인상비평에 머무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작은 몸으로 채울 수 없고, 시로 노래할 수 없었던 광활한 대륙을 위해 산문의 발자국을 더해 본다. 다가서면 멀어지고 보면 볼수록 아득해지던 시베리아.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며 눈보라처럼 떠돌았건만 북국은 여전히 낯설기만 할 뿐, 누군가가 러시아에 대해 물어온다면 차라리 모른다고 대답하리라. 그리고 침묵할 것이다. 대륙의 밀실에 갇혀 지내던 네 해 동안 내가 보고 찾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저자는 4년여 동안 러시아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녔지만 누가 러시아에 대해 물어온다면 모른다고 대답할 거라고 말한다. 이 말은 러시아에 대해 온전히 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일 터이다. 그의 겸양처럼 책 속에서 저자는 러시아를 단정하거나 자신의 추정을 섣부르게 확인하기보다는, 성실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러시아의 내밀한 속살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는 데 집중한다. 그것은 어쩌면 시인으로서 그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시베리아로 표상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와 동경의 근거를 지켜내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쿨투라》 2020년 3월호(통권 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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