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문학과 영화 사이
[movie] 문학과 영화 사이
  • 김종원(영화평론가, 영화사 연구자)
  • 승인 2020.04.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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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확대와 시각 체험

  문학이 인간의 생각이나 이미지를 문자를 매개로 제삼자에게 ‘읽히게 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영상이라는 수단을 빌어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가 이루어낸 문학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신 필름이 만들어낸 영상의 투시경은 허구도 실제처럼 나타낸다. 이와같이 문학과 영화는 표현수단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이야기에 의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기복은 서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흥미의 요체가 된다.

  그러나 문학이 일정한 공간이나 장치 없이 자유롭게 독자들에게 다가가는데 비해 영화는 그렇지 못한 한계가 있다. 문학은 책을 펴든 순간 바로 화자나 주인공의 활동이 시작된다. 영화는 영사기·극장이나전파 수상기 따위의 시설과 공간이 필수 요건이다. 그래야만 내용의 파악은 물론 감정이입(感情移入)이 가능하다. 따라서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이 순수 혈통의 ‘개인창작 행위’인 것과는 달리 영화는 출발부터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라는 기계장치와 더불어 성장한 협동체적 메카니즘의 소산이었다. 100년이 겨우 넘은 ‘기술적 영적 기초에서 진화’1아놀드 하우저, 『The Social History of Art』, New York, Knopf, 1951한 종합예술이다. 어찌보면 이런 현상은 박동하는 인체(예술)에 카메라, 필름, 영사기라는 인공심장을 단 특수체질의 경이로움을 방불케 한다.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영적 기초에서 진화된 기술’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새삼 반추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영화는 이 중 한 가지만 갖춰지지 않아도 성립되지 않는다는말이 된다. 여기에서 문학이 지니는 무한한 표현의 잠재력을 생각할 수 있다. 소설가나 시인이 자아내는 상상력의 결집은 그 자체가 독자성을 지닌 예술 행위지만 영화작가의 소재 선택은 이에 비해 제약적일 수밖에 없다. 제작비나 영상화의 실현성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는 태생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공존하는 영화

  아놀드 하우저는 『예술과 사회사』에서 현대를 ‘영화의 시대’라고 하였다. 문학에 비해 대중친화적인 영화가 오늘날 부가가치가 높은 문화상품으로 경쟁력을 갖게 되면서 이와 같은 견해는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 대학에 넘쳐나는 영화영상 관련 학과의 증가와 근년에 이르러 관심을 갖게 된 문예창작과의 ‘문학과 영상’에 대한 강좌의 신설 추세 등의 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만큼 영화는 현대인들에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술의 다른 장르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된다.특히 문학의 경우가 그러하다. 일찍이 서술형식을 가진 문화 가운데서도 고대의 신화, 근대의 소설에 이어 가장 뒤떨어진 영화가 현대에 이르러 가장 기세를 올리는저변에는 마술적인 영상의 위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영상이란 어떤 것인가? 뛰어난 영화 이론가 앙드레 바쟁의 말을 빌면 ‘시체마저도 향료로 방부시키는 힘’을 가진 것이 영상이다. 카메라에 의해 창출된 영상은 악취마저 여과시키는 저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향기는 더욱 강렬하게, 비극은 보다 극적으로 끌어 올린다. 소피아 로렌의 <엘시드>(1961)나 루드밀라 사벨리에바의 <전쟁과 평화>(1968)의 이슬 같은 눈물처럼 슬픔조차도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문학과 영화를 연관시키려는 의도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1908, 아르투로 암브로시오, 루이기 마기 감독, 이탈리아) 등 고전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던 초기 영화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영화제작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학에 빚을 져왔다.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 전례가 없는 예술처럼 보이지만 사실 문학은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기여했다.2로버트 리처드슨, 『영화와 문학』, 동문선, 2000 몽타주 이론을 체계화시킨 <전함 포템킨>(1925)의 에이젠슈타인은 일찍이 영화가 자립적이고 자족적이며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일부의 견해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영화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표현수단을 동원하여 주제나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다만 그 표현방법이 문자와 영상으로 달리할 뿐이다. 결국 서사예술로 귀착되는 영화도 명백히 문학성을 띨 수밖에 없다.

  1895년 루이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프랑스에서 영화가 처음 공개된 이래 스크린이 일정한 줄거리를 갖기 시작한 것은 마술사 출신 조르즈 멜리에스가 1902년 <달나라 여행>이라는 최초의 공상과학 영화를 선보이면서부터였다. 사실성의 재현에 충실했던 뤼미에르 형제와는 달리 그는 본격적으로 허구의 방식을 도입, 30여 개의 신으로 나눠 여섯 명의 천문학회 소속 학자들이 로켓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총알에 몸을 싣고 달나라 여행을 마치고 지구로 무사히 돌아오는 내용을 담았다. 서사성의 가미로 내용이 풍성해진 영화는 그 소재를 문학에서 찾기 시작했다. 문학이 영화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그 결과 <폼페이 최후의 날>을 비롯하여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1913),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1923),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1935),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1946) 등 명작들이 영화화되었다. 이중 <레 미제라블>은 1912년 프랑스 파테 영화사에 의해 처음 제작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0여 편에 이를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춘원 이광수 원작 <개척자>(1925, 이경손 감독)가 그 출발점이다. 잇따라 감옥에서 나온 전과자가 은혜를 입은 여자를 위해 살인을 한 나머지 다시 감옥으로 가는 심훈의 <먼동이 틀 때> (1927, 심훈 감독)가 나오고 봉건적인 지주의 며느리를 사모하는 벙어리 머슴의 애달픈 사랑을 그린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1929, 나운규 감독), 두메 산골 숯 굽는 부부의 행복과 비애를 담은 정비석의 <성황당>(1939, 방한준 감독) 등이 그 뒤를 장식했다. 특히 문예영화로 우대 받은 소설 원작 작품인 <오발탄>(1961, 유현목 감독),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신상옥 감독), <갯마을>(1965, 김수용 감독), <싸리골의 신화>(1967, 이만희 감독) 등은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누비면서 해방 후 손꼽히는 수확으로 평가 받았다. 일반 영화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다사로운 문학적 감성과 정서, 품격의 완성도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 체험은 원작 소설이 제공한 상상력의 확대로 가능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문학의 도움으로 상상의 공간이 넓어졌다고 하더라도 영화 고유의 문법이 없이는 이루지 못할 성과였다. 영화에는 문학이 따르기 어려운 특이한 시점이 있다. 플래시백이 빚어내는 섬광과 같은 상념, 클로즈업 앵글이 갖는 긴장감과 표현의 깊이, 페이드(faid) 기법처럼 자유로운 시간의 압축과 경과, 이중노출이 만들어 내는 현실과 환상의 동시성 등이 마술처럼 엮어질 때 관객들은 매료된다. 이런 요소들은 물과 불의 이미지로 현란하게 뿜어내는 편집광적인 광기의 러브 스토리 <퐁네프의 연인들>(1991, 레오 까락스 감독)이나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클르두 룰르슈의 <남과 여>, 칠레의 망명시인 파블로 네루다(필립 누아레)와 집배원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치) 사이에서 교감되는 우정의 이중주 <일 포스티노>(마이클 래드포드 감독) 등에서 단연히 빛난다. 그래서 바닷가의 조약돌이나 집배원이 모는 자전거, 그 패달이 스치고 가는 길가의 풀꽃에까지도 영화작가의 정겨운 시선이 느껴진다. <시네마 천국>의 영사기사로 출연한 필립 누아레는 <일 포스티노>에서 ‘시란 바로 은유’라고 말한다. 그는 집배원인 마리오를 향해 “정말시를 쓰고 싶다면 바닷가를 혼자 걸어 보라.”고 전제한 후 “그대의 느낌을 글로 옮기는 거야.”라고 훈수한다.

시적 영화, 그 정감의 영상

  문학에 있어서 특히 시와 영화는 각기 이미지와 영상을 모체로 하는 특징이 있다.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시)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물의 모습’(영화)은 ‘마음’과 ‘머리’로 대상(사물)을 받아들이는 감도(感度)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시가 ‘읽는 그림’이라면 영화는 ‘보는 시’가 된다.3김종원, 「시와 영화」, 《시와시학》, 2001년 봄호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시적 영감을 안겨준 대표적인 영화를 꼽는다면 1930년대의 프랑스 염세주의의 거장 줄리앙 뒤비비에의 <망향>(1936)과 <나의 청춘 마리안느>(1955)를 비롯하여, 멜로드라마의 고전 마빈 르로이의 <애수>(1940), 죽음으로 사른 춤의 화신 마이클 포웰의 <분홍신>(1948), 탁월한 인생파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1954),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 폴커 슐뢴도르프의 <양철북>(1979), 환상의 마술사 스티븐 스필버그의 <E·T>(1981), 희생과 구원의 영상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향수>(1983), 영화의 전도사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1988), 누벨 이마쥬의 상징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 (1991)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은 한두 편을 제외하고는 비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별과 죽음으로 요약되는 슬픔이다. 거기에는 가슴을 저리게 하는 아픔이 배어 있다. 이처럼 나는 비애의 영상에서 강렬한 시를 느낀다. 이 가운데 <향수>를 뺀 대부분의 영화를 시로 녹여 내었다. 어떤 것은 전편이 아니라 부분적인 이미지로 살려내기도 했다. <길>, <망향> 등의 경우가 그것이다.

  <애수>는 「백조의 노래」(1999)로, <양철북>은 「북치는 소년」(1988)으로 <E·T>는 「E·T가 머물다 간 마을」(1985)로, <퐁네프의 연인들>은 「미셀을 위한 사랑의 변주곡」(2001)이라는 제목을 붙여 발표하였다. 그 밖의 작품은 영화 제목 그대로 사용하였다. 앞의 영화가 시적 영감을 자아내게 하는 대표적인 예라면, 정지용의 「별똥」, 김광균의 「은수저」, 서정주의 「부활」, 박목월의 「가정」, 백석의 「여우난곬족」 등은 현대시 가운데서도 가장 영화적 구조를 갖춘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시의 공통점은 서사적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이다. 이는 정감의 이미지로 시를 쓰도록 자극한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니까 정서적인 분위기의 영화에 시적 모티브가 잠재하고 있는 반면 이야기가 들어간 시에는 극적 상상력을 이끌어내 영화가 갖는 영상체험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화면에 깔리는 정감의 이미지에 자극 받아 시를 쓰도록 만든 영화 가운데 하나가 <퐁네프의 연인들>이다. 이 영화의 특징은 불과 물로 대비되는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영화에서 불은 물로 인해 수식되고 물은 불을 만나면서 모성(母性)의 대상으로 승화되는 모티브가 된다. 물이 수평적인 포용의 성격을 지닌다면 불은 수직적 공세를 암시한다. 그래서 여주인공인 미셀은 사나이에게 눈이 멀기 전에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하고 그 사나이인 남주인공 알렉스는 거리로 나가 뽐내듯 불을 뿜는 묘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상충되는 불과 물의 이미지는 서로 이반되는 것이 아니라 어우러져 보완하면서 절묘한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이 영화의 서사구조, 이를테면 가진 것이라곤 고작 불을 뿜는 재주밖에 없는 거리의 부랑자 알렉스(데니 라방)와 멀어져 가는 눈을 한탄하며 거리로 나온 무명화가 미셀(줄리엣 비노쉬)이 도달하게 되는 사랑의 과정은 상대적으로 가라앉아있다. 일반적인 영화가 내세우는 네러티브가 살지 못한 대신 장면 하나 하나가 연출해내는 마법 상자와 같은 현란한 영상언어들이 영화를 지배한다. 물론 이 영화에는 미셀로 표상되는 부르주아와 미셀이 암시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사랑에 계급적 알레고리가 내재하고 자유와 평등, 박애 등 프랑스대혁명의 이상이 오래 전에 증발해버린 애정 없는 현대 프랑스 사회의 불모성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깔려 있기는 하다.

  레오 까락스 감독의 비판적인 사회의식은 영화의 전반부에 나타난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두운 지하도를 질주하는 트럭의시점 샷으로 거리를 절뚝거리며 지나가는 알렉스가 차에 치어 쓰러지는 모습을 포한다. 곧 이어 경찰차가 달려와 부랑자 수용소로 실어 간다. 여기서 감독은 개인의 행복과 사회복지를 추구하는 나라의 병든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여기까지는 시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의지라는 볕을 쪼이게 함으로써 시의 고리를 만들어 준다. 폐쇄된 세느강변의 다리에서 알렉스는 미셀이라는 구원의 존재를 만나면서 빛을 찾는다. 실제로 이 사나이는 영화 도입부에 거리로 나가 생활의 한 방편이기도 한 불을 뿜는 묘기를 보여준다. 불을 뿜는 연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치솟는 불길과 절묘하게 연결되는 곡예비행의 삼색 연기는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음을 예고한다. 이는 또한 이 작품의 서두에 보였던 사실주의적 묘사에서 탈피하여 표현주의 방식으로 선회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퐁네프의 연인들>은 생동하는 이미지 중심의 정적 분위기로 전환된다 .잇따라 파리의 밤하늘을 가르며 터지는 축제의 폭죽, 두 연인들이 모터보트를 타고 세느 강을 미끄러져 갈 때 강변에서 솟아오르던 불의 물보라, 동료인 한스 노인의 도움으로 무등을 타고 미셀이 렘브란트의 그림을 볼 때 주변을 밝혀준 적막의 촛불 등 불과 물의 영상은 시적 상상력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런 순간의 감흥을 다음과 같이 한 편의 시로형상하였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대
내가 열망하는 당신을 위해서만
혼절하리.
우리들 서로를 위해서만
심연의 춤을 추리.
지금은 나락도 두렵지 않은
축배의 시간
지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대의 한쪽 눈 되어
불꽃으로 터지리
당신의 하늘에만 머무는
여명이 되리.
- 「불꽃놀이- 미셀을 위한 사랑의 변주곡 2」 전문

  이 작품은 연작시 형식으로 쓴 「미셀을 위한 사랑의 변주곡」 중 두 번째 편에 해당하는 「불꽃놀이」의 전문이다. 가난하지만 숙명처럼 유지돼 왔던 이들의 관계는 여자에게 눈을 치료할 길이 열리면서 일단 깨어진다. 미리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나이는 미셀을 찾는 포스터를 불태워 정보를 차단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사람을 죽이게 된다. 몇 년 후 알렉스가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오자 그들은 모래를 운반하는 증기선을 타고 세상의 끝에 있다는 아틀란티스로 떠난다. 여기에서 레오 까락스는 밀착두 연인이 파도를 가르는 뱃머리에 서서 날아갈 듯이 팔을 벌려 환호하는 라스트 신을 연출하여 뒷날 <타이타닉>이 패러디로 활용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과작인 나에게조차 다섯 편의 연작을 낳게 한 <퐁네프의 연인들>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정(詩情), 남루하고 상투적인 사랑마저 새롭게 일구어낸 연소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힘들이 레오 까락스를 랭보에 비유될 만한 시정신의 소유자로 평가받게 만든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적인 시, 서사적인 이미지

  김광균의 「은수저」는 우리나라의 현대시 가운데서도 영화적 친화력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그 자체가 시나리오의 지문이 될 수 있을 만큼 영상 전환이 쉽게 되어 있다. 시의 한 구절 한 구절마다 그림이 선명하고 카메라의 위치까지도 지정해 놓은 영화감독의 콘티뉴이티(각본을 바탕으로 한 촬영 대본)를방불케 한다. 연(聯)과 연의 구분 또한 장면 구성으로 바꿔 놓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먼저 이 시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김광균, 「은수저」 전문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하나의 상념에 잠기게 될 것이다. 한때는 단란했을 가정에 드리워진 우수의 그림자, 그 당사자인 젊은 부부는 어떤 연고로 애지중지하던 어린 자식을 잃게 되고 그로 인해 슬픔을 깨물어야 하는 고통을 겪는다. 처음 얼마 동안은평소처럼 자식이 사용하던 은수저를 밥상에 챙겨 놓기도 했으리라. 아이가 생일 때 받았을지도 모를 은수저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쩔 것인가. 그들이 환상 속에서나마 죽은 아이를 만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김광균은 화자의 모습이나 아기의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맨발 벗은 애기”라는 표현으로 아기의 죽음을 암시하고 은수저를 매개 삼아 세상에 없는 자식과 교감한다. 그는 아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성별(性別)을 초월하는 대상의 확대를 노린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화면을 통해 보여 주어야 하는 영화의 경우는 등장인물이 사내인지 계집애인지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상상으로 해석하게 놓아둘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이 시와 영화가 다른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은수저」를 영화의 구성방식으로 분류하면 모두 2시퀀스, 5신으로 나눌 수 있다. 연극의 경우 2막 5장에 해당된다. 막(幕)과 동일한 시퀀스는 1행인 “산이 저문다”부터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까지 5행 1연의 현실장면과 “먼-들길을 애기가 간다”로 시작되는 3연의 환상장면으로 이루어진다. 시퀀스보다 하위 개념인 신은 장소의 이동에 따라 달라지므로 ①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야외) ②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실내) ③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야외) ④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실내) ⑤먼- 들길을 애기가간다→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야외) 등 이렇게 다섯 가지가 된다.

  그런데 연의 구분이 내용의 한 단락을 뜻한다는 점에서는 3연으로 짜여진 「은수저」도 당연히 3시퀀스가 돼야 하겠지만 2연은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영화적 단락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2연의 경우는 현실(1연)과 환상(3연)을 매개시키는 고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연은 영화기법상으로 볼 때 교차편집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에 비해 정지용의 「별똥」은 불과 다섯 행밖에 안된 짧은 글로 인생 그 자체를 담아내고 있다. 다양한 해석과 광의한 드라마로서 가능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주성분만으로 압축해 놓은 느낌이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러,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 정지용, 「별똥」 전문

  「은수저」가 한 소시민의 슬픈 가족사라면, 「별똥」은 유년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체험했을 인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을 보며 날이 새면 눈여겨본 그 지점으로 찾아가 보려던 그 시절의 소년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 있을까. 「은수저」가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엮어지는 시라면, 「별똥」은 너무 범위가 넓어 주제를 살려 내용을 꾸밀 수 밖에 없는 장단점이 있다. 이처럼 나는 서사적 이미지가 강한 시에서 영화가 필요한 의미의 함축성과 여운의 향기를 발견한다. 반면에 정감의 영상에서는 시적 이미지의 투명성과 창작의 욕구를 느껴왔다. 시와 영화는 영상과 이미지라는 공통점을 지니면서 고유의 독자성을 갖는다. 시는 이미지 중심인 대신 영화는 서사성을 떠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쿨투라》 2020년 4월호(통권 7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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