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 4월의 드라마] ‘전문직 츤데레’의 빛과 그림자
[드라마 월평 - 4월의 드라마] ‘전문직 츤데레’의 빛과 그림자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0.04.22 16: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BS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낭만닥터 김사부>(이하 <김사부>)와 <스토브리그>는 인생사를 녹여낸 듯한 현실적인 이야기로 ‘인생 드라마’라고 불리며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두 드라마는 ‘내 인생의 멘토’로 삼고 싶은 두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직업의 달인과 작은 정의

  평범한 회사원 출신으로 단장 자리에 오른 ‘백승수’와 천부적인 능력으로 전설적인 외과의가 된 ‘김사부’는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캐릭터 같다. 하지만 둘은 매우 유사한 삶의 철학을 설파한다. 의사는 의사답게, 단장은 단장답게. 각자 맡은 일을 잘 하자.

  <스토브리그>의 백승수 단장은 단장으로 임명되고 나서 일련의 일들을 진행한다. 그리고 그 일들은 스카우트 비리, 코치 파벌싸움 등등 그동안 묵인되었던 적폐청산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만년 꼴찌팀인 드림즈를 우승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일 뿐. 그가 회장 조카인 권경민 상무에게 번번이 이견을 내는 것도 비열한 갑질에 저항하기 위함이 아니라 단장으로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다.

  <김사부> 속 김사부의 직업적 사명의식은 백승수 단장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한창 진행 중인 수술실 안으로 의사를 인질 삼은 협박범이 들어온다. 모든 수술실 스태프가 공포에 휩싸인 가운데 김사부는 홀로 침착하다. “수술 끝내고 마음대로 하세요. 난 판사가 아니니까 나는 내 일을 하고 당신은 당신 일을 하란 뜻이야.” 예정된 환자 수술을 미루고 VIP환자 수술을 먼저 하라는 병원장의 지시를 받았을 때도 김사부는 한결같이 강조한다. “환자 앞에서는 중립을 지켜라. 너한테는 환자야.”

  누군가는 김사부와 백승수 단장의 거침 없는 행보에 대해 ‘소신’을 읽어낼지 모른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굴복하지 않고 절망을 강요하는 세상의 논리에 반기를 드는 용감한 히어로. <태양의 후예> 속 유시진 특전사 대위가 재난 현장에서 사람을 구출하고 테러를 막고 심지어 총에 맞고도 살아나는 불사조의 면모를 보이면서 “제가 이 어려운 걸 또 해냅니다.”를 연신 외쳐대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활약에 손뼉 치고 감탄하기에는 김사부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내 앞에서 척하지 말어. 잘난 척, 아는 척, 정의로운 의사인 척. 의사로서 당연한 걸 해놓고 뭐 대단한 걸 해낸 척.” EBS 다큐 <극한직업>에서 장엄한 배경음악을 빼면 무엇이 남는 줄 아는가. 바로 SBS <생활의 달인> 속 현실적인 직업의 세계다. 도자기 장인은 뜨거운 가마 앞에서 도자기를 굽고, 건물청소부는 높은 빌딩에 올라 창문을 닦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 김사부도 백승수 단장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한 명의 직업인이다. 다만 일을 좀 많이 잘할 뿐. 그들은 절대 자신의 직업적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낭만적 개인주의자와 큰 정의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직업의 달인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스토브리그>에서 대가성 선수 영입을 한 스카우트 팀장을 질책할 때 백승수 단장은 말한다. “최소 무능.가능성 높은 건 무책임한 직무유기. 최악의 경우에는 아직 전례 없는 스카우트 비리.” 스카우트 팀장의 무능과 직무유기는 개인의 몫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구단 내 다른 선수들, 나아가 야구계에 악영향을 끼친다. 나의 ‘작은 정의’는 이렇게 우리 모두를 품는 ‘큰 정의’와 연결되고, 나는 나이면서 너인 하나의 우주가 탄생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아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자기 일을 제대로 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가 된다. 전설적인 외과의 김사부가 괜히 ‘낭만닥터’라는 타이틀을 부여받고 “낭만 빼면 내가 시체지.”라는 말을 자신 있게 내뱉는 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난 몇 년 동안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 일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우리는 왜 그토록 기를 쓰고 광장으로 나왔던 것일까. 학생이 학생답지 않게 책상을 박차고 나와 촛불을 들고 아기 엄마는 엄마답지 않게 잠든 아기를 깨워 유모차에 태우고 거동이 힘든 어르신은 노약자답지 않게 지팡이를 짚고 힘든 걸음을 옮겨야만 했던 걸까. 부조리한 현실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소신’이 되고 ‘낭만’이 되는 세상. 우리는 낭만적 개인주의를 동경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SBS

  고독한 아웃사이더와 낭만 보존의 법칙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두 주인공의 거침없는 행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들은 우리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백승수 단장은 궁지에 몰려 자신을 배신한 윤성복 감독을 비난하는 대신 담담하게 말한다. “저는 말을 안 듣는 사람이라 주변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유대가 꼭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렇듯 그들은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고 혼자 고독하게 지낸다. 직업 밖 그들의 삶은 단조롭고 외롭다. 로맨스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김사부> 시즌1의 번외편에서 김사부의 첫사랑이 등장하지만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일하는 그녀의 존재는 일곱 군데 병원에서 치료를 거절한 에이즈 환자의 수술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김사부가 어렵게 마음을 열게 된 ‘제자’ 의사들도 시즌1과 2에 걸쳐 여러 가지 이유로 김사부의 곁을 떠날 것을 종용받는다. 전설적인 외과의였으나 병원에서 추방당한 김사부, 우승하였으나 매번 구단 해체와 함께 쫓겨난 백승수 단장.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평범한 일상 밖에서 내부의 질서를 바로잡는 고독한 아웃사이더.

  해체 위기에 놓인 구단의 매각에 성공하고 홀로 방출된 백승수 단장은 “처음으로 무언가를 지켜낸 것으로 기억”하며 “이것만으로도 힘이 많이 날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낭만적인 고백과 맞물려 <김사부> 시즌1의 번외편 제목이 ‘낭만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의 낭만은 그들의 외로움에 기대어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열렬한 응원과 지지에 힘입어 그들은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되는 자기만의 싸움에 내몰려 있는 건 아닐까.

ⓒSBS

  전문직 츤데레와 자본주의

  <검법남녀>의 백범 법의관, 미드 <하우스>의 닥터 하우스, 영드 <셜록>의 셜록 홈즈…  백승수 단장과 김사부를 포함해 고독한 아웃사이더들이 전문직드라마에 자주 출몰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김사부에게 전설적인 외과의로서 독보적인 수술 실력이 없었다면 돌담병원에 정착해 의사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백승수 단장에게 핸드볼과 씨름 구단을 연이어 우승팀으로 이끌 압도적인 추진력이 없었다면 구단 해체 후 실업자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무자비한 재벌 갑질과 부조리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끄떡없다. 자신만의 특화된 전문성으로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는 동시에 정의를 구현하는 ‘전문직 츤데레’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로맨스 장르의 ‘재벌 츤데레’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물질 자본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지킨다면 ‘전문직 츤데레’는 천재적인 지능과 탁월한 업무 능력으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지킨다.

  전문직 츤데레의 화려한 영웅담은 부조리한 현실에 강력한 한 방을 날리는 듯한 쾌감을 준다. 하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도 함께 남긴다. 전문적인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갑질 앞에서 굴욕적으로 무릎을 굽히거나 ‘소신의 대가’로 혹독한 추락을 경험해야 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는 어린 강동주에게 김사부는 진짜 복수 같은 걸 하고 싶다면 “분노 말고 실력”을 키우라고, 이상과 현실 앞에서 갈등하는 의사 강동주에게 “최고의 의사”나 “좋은 의사”가 아닌 지금 여기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필요한 의사”가 되라고 충고한다.

  전문직 츤데레를 향한 우리의 뜨거운 환대는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나는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인가. 임동규 선수의 영입과 방출에 앞서 백승수 단장은 그가 왜 드림즈에 ‘필요’하고 ‘불필요’한지에 관해 설명한다. 그 프레젠테이션에서 임동규 대신 우리 이름을 넣어보자. 나는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인가. 전문직 츤데레의 성공은 우리의 존재 가치가 사회적 생산성과 자본주의적 유용성에 있다는 냉정한 현실 논리를 되새기게 한다. 전문직 츤데레의 빛과 그림자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 《쿨투라》 2020년 4월호(통권 70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