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사랑의 근본주의: 이승우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
[문학 월평] 사랑의 근본주의: 이승우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1.01.2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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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이승우의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 5개는 전부 구약성경의 일화를 소설로 다시 쓴 것들이다. 나는 유물론자이지만, 이승우가 이런 책을 낸 것은 주목할 만한 문학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신학대를 나오고 기독교에 관심이 많은 작가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등단작 『에리직톤의 초상』(1981년) 이후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성찰을 포함하고 있을지언정 종교 자체를 핵심적 소재로 삼진 않았다. 그의 소설은 ‘생의 이면’에 대한 통찰을 담은 ‘지상의 노래’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던 작가가 갑자기 성경 이야기를 소설로 옮겨 적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사랑이 한 일』이 성경과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권두에 수록된 작품 「소돔과 하룻밤」을 주요한 예시로 삼아 이야기를 계속해보고 싶다. 이 작품은 어떤 서사적 허구도 더하지 않고 롯의 일화를 재현하고 있다. 타락한 도시 소돔에 거주하고 있던 롯은 어느 날 행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마을의 불한당들이 와서 외지인을 범하겠으니 내놓으라고 협박하지만 롯은 거부했다. 이 유명한 서사에서 선과 악의 경계는 명확하다. 불한당은 나쁜 놈들이고 롯은 착한 의인이다. 당연히 성경에서는, 신이 나쁜 놈들을 벌하고 착한 의인을 구원했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런데 불한당들이 찾아왔을 때, 롯은 손님 대신 자신의 딸들을 데려가라고 제안했다. 이 말은 문제적이다. 손님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한 도덕적 의무 중 하나였겠지만, 생면부지의 손님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딸들을 불한당들에게 넘긴다는 생각은 정상인의 도덕관념을 아득히 벗어난다. 그러니까 의문이 생긴다. 왜 롯은 딸들을 버리면서까지 생면부지의 손님들을 지키려고 했을까? 그를 의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은 왜 그런 인물을 의인으로 치켜세웠을까? 신자들로 하여금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이웃사랑을 실천하라고 권하기 위함이었을까?

  신자가 아닌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말해보자면, 성경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 것 같다. 성경은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측면이 있는 책이지만 그 자체로 문학이나 철학인 것은 아니다. 문학처럼 인간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다거나 철학책처럼 윤리에 대해 치밀한 논증을 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종교적 경전은 다소 애매한 질문을 던질 뿐이고, 거기에서 삶의 교훈을 찾는 것은 신자들의 몫이다. 실제로 지금껏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성경에 대한 해석을 갱신해 왔다. 성경이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독자를 계속 고민하게끔 만드는 보편적 질문들을 던지기 때문이라는 생각까지도 든다.

  그런데 소설은 종교적 경전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소설은 세속적 인간이 세상과 교호하고 행동하는 양상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한다. 이승우는 그런 설명에 능통한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이전의 많은 작품들에서 그랬듯, 그는 「소돔과 하룻밤」에서도 특정한 인물들이 왜 어떤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하고, 그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분석한다. 예시를 들기 위해 롯이 손님들을 도와주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을 인용해본다.

  “그는 그들을 데려왔으므로 그들을 책임져야 했다. 누군가를 보호하려고 데리고 들어온 사람은 자기가 데리고 들어온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는 손님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 명령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어서 다른 모든 것을 조건화하고 상대화한다. 이 명령의 이행을 위해서는 포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없다. 딸들이라고 제외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손님은 신과 같다.”(『사랑이 한 일』, 34~35쪽)

  인용문에 따르면, 롯의 초대가 손님에 대한 ‘책임’을 떠맡은 것이고, 책임을 가진다는 것은 손님을 절대적 존재(신)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의의 소산이다. 그 결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딸들의 안위를 포기할 때 그 결의는 비로소 진정성을 인정받게 된다… 이 설명은 롯의 행동이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음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또한 이 소설은 또한 롯의 선택이 갖는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도 암시한다. 성경에서 롯의 딸들은 중요한 존재로 그려지지 않지만, 소설은 그런 부차적인 인물들의 처지에 대해서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소돔과 하룻밤」을 읽을 때, 독자는 롯의 딸들의 입장도 생각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롯의 ‘결단’이 다소 무책임한 희생을 대가로 삼은 것이었음을 조금 더 처연하게 체감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한 일』의 표제작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은 신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식 이삭을 죽이려 했다. 이 일화를 배경으로 삼은 이승우의 소설은 이삭의 독백(방백)으로만 채워져 있다. 이삭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왜 신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라 명했고, 아브라함은 그 말을 따르려 했는가. 여러 가능성을 고민해보지만 이삭은 항상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아브라함의 근친살해(미수)는 ‘사랑이 한 일’이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소돔과 하룻밤」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성경의 ‘사랑’(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란, 모든 현실적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오직 한 가지 대상만을 오롯이 추구한 인간의 실존적 결단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껏 나는 『사랑이 한 일』의 수록작품 중 2개만을 살펴보았다. 언급하지 않은 작품들에서는 조금 다른 주제의식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지만, 월평의 성격 상 모든 수록작품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글은 그래서 『사랑이 한 일』이 롯과 아브라함 같은 인물들을 일종의 근본주의자로 묘사한다는 점만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주관적 확신에 의해 행동하는 ‘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롯과 아브라함 같은 근본주의자들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마땅히 거부되어야 하는가? 이승우의 소설은 이런 질문들에 답해주지 않는다. 이 작품은,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익숙할 만한 텍스트인 성경을 다소 변주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그런 질문들을 던져보게끔 유도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그래서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는 철저하게 비판받고 있다. 이승우의 이전 작품들은, 이런 세속적 세상에서 인간이 점점 무기력하고 왜소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다소 카프카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사랑이 한 일』을 통해 맹목적인 ‘사랑’에 대해 탐구를 수행한 것은, 이런 종류의 ‘사랑’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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