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일상 바깥에서 만난 공동체: 클로이 자오 〈노매드랜드〉
[영화 월평] 일상 바깥에서 만난 공동체: 클로이 자오 〈노매드랜드〉
  • 나원정(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 승인 2021.05.05 0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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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말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시작된 재택근무로 하루중 많은 시간을 반려묘와 단둘이 보내고 있다. 고양이 나이론 중년에 접어든 녀석을 위해 사료 선택에 신경을 쓰고 있는데 주로 재료·기능성으로 나뉘는 사료 종류 중 ‘인도어’ 사료란 게 있다. 말 그대로 ‘산책냥’ ‘외출냥’이 아닌 집에서만 머무는 ‘집냥이’를 위한 사료다. “체중 조절, 변 냄새, 피모 관리에 특화된 제품”이란 설명을 읽으며 요즘 나의 처지가 겹쳐졌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운동량이 줄었고, 집에서 나는 냄새에 더 민감해졌으며 건조한 실내 공기에 피부가 탄력을 잃어가고 있는. 한편으론 이 모든 게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다. 혼자 집에만 있느라 신경쓸 사람도 없는데. 가만, 그럼 그동안은 누군가한테 보여주려고 살았던 걸까? 혼자 있을 때의 나라는 사람은 뭘까. 애당초 나를 위한 삶이란 게 뭐지?

  ‘집콕’이 뉴노멀이 된 지난 1년여 팬데믹 속에 다들 그렇게 방구석에서 잠시 길을 잃었던 모양이다. 61세 여성이 홀로 내몰리듯 낯선 여정에 나선 현대판 유목민에 관한 영화 〈노매드랜드〉가 이토록 각광받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제목의 ‘노매드(Nomad)’가 바로 흔히 우리가 ‘노마드’라 불러온 21세기형 유목민을 뜻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수십년간 살아온 광산 기업 도시가 경기침체로 붕괴한 후 남편이 죽고 직장과 이웃까지 잃고 나자 정들었던 집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버지가 물려준 추억까지 예순 넘게 쌓아온 전재산을 작은 밴 한 대에 싣고서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을 뒤로 떠나왔을 뿐 아니라, 이제 밴에 실린 그의 세상은 안과 밖의 구분조차 불분명하다. 그가 발을 내딛는 미지의 세계엔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과 영국에서 자랐고 지금은 미국에서 활동 중인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가 각색과 제작, 연출, 편집까지 겸했다. 그는 첫 장편 〈내 형제가 가르쳐준 노래〉로 2015년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됐고 이어 장편 〈로데오 카우보이〉로 2017년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진출해 ‘아트시네마상’을 수상했다. 아트시네마, 다시 말해 예술영화상 말이다. 한국에선 배우 마동석의 할리우드 진출작인 마블 히어로 영화 〈이터널스〉 감독으로도 알려졌지만, 이 영화는 아직 언제쯤 볼 수 있을지도 요원하다.

  여기까지 들으면 이런 반응도 있겠다. ‘예술영화’ 하던 여성 감독의 나이든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뭐 얼마나 대중에게 호소하겠냐고. 그런데 이 영화, 센세이셔널하다. 지난해 배우 틸다 스윈튼이 “시네마, 시네마, 시네마. 사랑밖에 없다”고 외친 이탈리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이 글을 쓰는 4월 12일까지 무려 222개 영화상 트로피를 차지했다. 올 2월 골든글로브 작품상·감독상에 이어 현지 시간 10일 개최된 미국감독조합(DGA)상 감독상, 11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선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촬영상 4관왕 수상을 포함해서다. 트로피 개수와 세간의 주목도론 이번 시상식 시즌 단연 최고 화제작이다.

  코로나19로 평소보다 2달 밀린 4월 25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 윤여정이 출연한 재미교포 가족영화 〈미나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작도 〈노매드랜드〉다. 이 영화는 제작을 겸한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여우주연상, 촬영상 등 모두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는데 제작부터 시나리오 작업, 편집까지 직접 참여한 클로이자오 감독은 작품상·각색상·감독상·편집상 후보로 이름이 호명되며 여성 감독으론 역대 아카데미 최다 4개부문 노미네이트 신기록까지 세웠다. 〈파고〉 〈쓰리 빌보드〉로 이미 두 차례 아카데미상을 받은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여우주연상 수상도 유력하게 점쳐진다.

  이런 화려한 수상 기록을 이끌어낸 영화의 출발점은 바로 이런 질문이다. ‘나를 정의하는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는가.’ 원작자인 제시카 브루더가 몸소 밴거주생활 끝에 동명 논픽션을 쓰며 새겨낸 명제이자, 클로이 자오 감독이 원작을 각색하는 동안 등불로 삼았으며,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을 흔들어 놓을 문장이다. 밴생활 초기 마트에서 만난 옛이웃에게 “나는 노숙자가 아니라 그냥 집이 없는 거야” 라고 조금은 확신 없는 얼굴로 말하던 펀이 저마다 무언가를 떠나온 밴거주자들의 공동체와 사는 곳과 관계없는 우정을 맺고 광활한 미국 서부의 장관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용감한 생존자로 거듭나는 여정은 그 자체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된다.

  집 안까지 들이닥쳐 안락한 침대에서 우리를 내모는 위협은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이전에도 있어왔다. 삶이 전쟁터가 됐을 때, 그 전쟁을 끝내는 것은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펀은 사우스다코타의 드넓은 황무지와 네바다 사막, 태평양 북서부 연안까지 미국 서부의 웅장한 대자연을 삶의 개척자처럼 발길 닿는 대로 뛰어들며 ‘자기’를 단련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실제 밴에서 거주하는 노매드들과 다큐멘터리를 찍듯 어우러져 빚어낸 장면들 속에서 공허하던 펀의 눈빛에 빛이 차오르고 그가 세상을 두려움 없이 껴안으며 살았던 과거의 에너지를 되찾는 순간들을 여실히 와닿도록 연기해낸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가 그리는 길 위의 삶은 결코 낭만적이지만 않다. 자동차를 댈 곳 없어 헤매는 밤들, 영하의 날씨 탓에 옷이며 담요를 있는 대로 둘러야 하는 무수한 날들, 기댈곳이 없다는 막막함을 수시로 그린다. 그런 자기와의 싸움 속에서 펀은 자연 그 자체를 벗하는 방식을 발견하면서 진화한다. 황무지, 바위, 나무, 별, 허리케인조차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그 감각을 깨달은 후 혼자여도 괜찮아진다. “고독 속에서 평화를 찾는다면 여전히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클로이 자오 감독의 설명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손 뻗을 거리에 있지 않아도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함께 나눈 시간과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그 의미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혼자일 때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가슴 시린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

  이 영화엔 그런 용감한 생존자가 펀 말고도 많이 등장한다. 린다 메이, 스웽키, 밥 웰즈…. 영화에서 펀이 길에서 만나는 밴 거주자들은 모두 원작자 제시카 브루더가 ‘할렌’이란 애칭의 캠핑카를 몰고 노매드랜드로의 여정에 나섰을 때 길에서 만난 친구들로 본인 역을 직접 맡아 영화에 출연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본사람이면 누구든 길을, 가보지 않은 삶을 개척하고 싶어진다는 점에 있다. 경험은 훌륭한 선생님이고, 길은 직접 발견해야만 하니까. 코로나 시대 우리 모두에게 건투를 빌며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나원정
《스크린》 《무비위크》 《맥스무비 매거진》 《매거진M》 등 영화잡지를 거쳐 지금은 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영화의 안과 밖을 들여다보는 게 '일'이자 '취미'인 성공한 덕후이다.

 

* 《쿨투라》 2021년 5월호(통권 8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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