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배우 강석우
[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배우 강석우
  • 장재선(시인)
  • 승인 2019.05.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일보 장재선

나이든 소년의 독백

장재선

 

스턴트맨이나 대역이 왔을 때
대신 일을 맡겼어야 했다.
그분들에겐 생계가 달려 있는 일인데,
내가 왜 직접 한다는 만용을 부렸을까.

그 젊은 나이에 몰랐던 것을
이제 안다고 해서
후회가 엷어지진 않지만,

피리 부는 소년의 얼굴에
세월이 묻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웃어 넘길 수 있는 것은
역시 세월을 겪은 덕분이다.

갈망하던 것을 이루기보다
꿈꿀 때가 행복하다고
후배들을 다독일 수 있는 것은
비와 바람의 시간을 견딘 덕분이다.

그토록 꿈꾸고 또 꿈꿨던
음률과 함께 하는 이 행복,
맘껏 누리며 중얼거린다.
이제부터 천천히 갔으면.

 

  “당신은 젊었을 때와 똑같아.”

  단아한 외모를 한 중년 여성이 옆에 있는 남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건강 음료 광고에서다. 그 남성의 젊은 시절 사진이 화면에 떠오른다. 우수에 찬 눈빛을 하고 있는, 수려한 외모의 청년. 이 청년이 저 푸근한 얼굴의 중년 남성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화면이 다시 바뀌면 중년 남성은 쑥스럽게 웃고, 여성은 ‘건강 음료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멘트를 날린다. 중견 배우 강석우와 그의 아내 나연신이 함께 찍은 광고 내용이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오롯이 투사됐다. 강석우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따뜻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주고 있다. TV 예능 프로그램 등을 통해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하면서도 가정적인 모습을 보여 줬다. 나는 이런 그에게 호감을 지니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그에게서 ‘피리 부는 소년’의 환영을 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가 젊은 시절에 출연했던 영화 <겨울 나그네>(1986)에서의 이미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떠도는 순수한 영혼의 우수와 슬픔을 암암히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때 나도 만 스무 살의 대학생이었다. 자취방이 있는 서울 안암동에서 충무로의 명보극장까지 혼자 걸어가서 영화를 봤다. 극장 중간 좌석에 앉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야 했다. 극중 대학생 연인이었던 민우(강석우)와 다혜(이미숙)의 이별이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영화를 다 보고난 후에 다시 안암동까지 걸어갔다. 차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걸어가고 싶었다. 그 걸음 속의 감상에 자리 잡은 강석우의 이미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피리 부는 소년’이었다. 물론 그는 그 후에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끝없이 자기 혁신을 이뤄냈다. 특히 안방극장에 활발히 등장하며 대중과 친화하는 배우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강석우는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강만흥康萬興. 서울에서 중·고교를 나온 후 재수를 해서 1977년 동국대 연극영화학과에 들어갔다. 책 『강석우의 청춘 클래식』은 그의 프로필을 이렇게 적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온갖 인생을 대신 살아 본 배우로서 세상의 허무를 다 알면서도 그것을 껴안고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그의 친구인 배우 송승환이 했던 말, 즉 ‘강석우는 가슴이 따뜻하고 깊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다. 독후의 여운을 간직한 채 그에게 전화를 했더니 “책을 읽어 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담백하면서도 따스함이 스며 있는 음성이었다. 이런 배우와 동시대를 살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뿌듯함! ‘피리 부는 소년’에의 향수를 잊을 수 있을 듯싶다.

  ‘1978년에 영화진흥공사 제1회 남녀 신인 배우 모집에서 최종 선발되었고 <여수>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겨울 나그네>, <잃어버린 너>, <상처> 등여러 편의 영화와 <보통 사람들>, <학교>, <아줌마>, <반올림2>, <열아홉 순정> 등 수많은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여성시대> 등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오랫동안 활동했다. 백상예술대상 남자 신인연기상(<보통 사람들>, 1984), 부산평론가협회 남우주연상(<겨울 나그네>, 1986), MBC 연기대상 최우수상(<아줌마>, 2001), 한국PD대상최우수상(<여성시대>, 2012) 등을 수상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도 유명하며 클래식 음악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CBS라디오 음악 FM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진행자로 인기를 얻고 있다.’

  책 『강석우의 청춘 클래식』은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을 담고 있는 에세이집이다. 클래식을 즐기며 삶을 윤기 있게 가꿔 나가려는 그의 생활을 헤아릴 수 있다. 책의 구석구석에 배우로서 살아온 삶의 궤적이 절로 묻어날 수밖에 없다. 22세 신인 연기자 때 상대역이었던 당대의 여배우 윤정희에게 느꼈던 경외는 그녀의 배우자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고백. 그는 <겨울 나그네> 감독 곽지균과 친한 사이였는데, 곽 감독이 극 중 민우처럼 자살을 하고 난 뒤에 그의 외로움을 더 살뜰히 살피지 못했던 것을 뼈아프게 후회했다고 썼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온갖 인생을 대신 살아 본 배우로서 세상의 허무를 다 알면서도 그것을 껴안고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그의 친구인 배우 송승환이 했던 말, 즉 ‘강석우는 가슴이 따뜻하고 깊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다. 독후의 여운을 간직한 채 그에게 전화를 했더니“책을 읽어 주셔서 고맙다.” 고 했다. 담백하면서도 따스함이 스며 있는 음성이었다.

  이런 배우와 동시대를 살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뿌듯함! ‘피리 부는 소년’에의 향수를 잊을 수 있을 듯 싶다.

 

 

* 《쿨투라》 2019년 5월호(통권 59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