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배우 김옥빈
[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배우 김옥빈
  • 장재선(시인)
  • 승인 2019.07.01 0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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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옥빈 金玉彬, 1987~
ⓒ문화일보 장재선

흩날리는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장재선

영화 <박쥐> 때였어.
뱀파이어의 흡혈 욕망에 사로잡혀
넋이 빠져 있던 그녀를 만난 후,
나는 중얼거렸지.
옥빈이 아니라 텅빈이다.
스물세 살의 여배우에게
무에 그리 적의가 깊다고
며칠 후 또 한 번 중얼거렸을까.

말의 칼을 휘둘러 놓고
그 죄를 잊고 살았구나.

그동안에 그녀는
꾸준히 자기 길을 걸었다더라.
쟤 뭐할까
누군가 궁금해하더라도 상관없이
자기 항아리에
연기를 채우는 일에 몰두했다더라.

단 한 순간의 몸짓에
십 년의 공력을 담을 수 있게 됐더라.

이제야
말의 칼을 휘두른 죄를 깨달아
죄인이 머리를 풀고
차가운 바닥에 엎드리듯
지난 시간을 살피니,
스물세 살의 그녀가
이런 다짐을 했더라.
“흩날리는 말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살고 싶습니다.”

 

 영화 <박쥐> 시사회 후 여주인공인 김옥빈을 만났다. 남자 주인공인 송강호와 함께한 자리였다. <박쥐>는 괴기스럽고도 아름다우며, 슬프면서도 유머러스한 작품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핏물이 줄줄 흐르지만, 화면 하나하나가 정교한 연출에 의해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부가 친구의 아내와 불륜의 사랑을 나누며 파멸해 가는 모습은 서글프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엔 신이 만든 피존재의 나약함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유머가 흐른다.

 <박쥐>의 여운이 컸기에 두 주연 배우와 함께 뭔가 격조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바람이었다. 내가 무슨 질문을 하면 김옥빈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짧게 내놓는 대답은 질문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었다. 옆에 있던 송강호가 나서서 “옥빈아, 그건 말이야….”하며 질문 의도를 다시 전해 주고 대답을 조정해야 했다.

 김옥빈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광양에서 성장했다. 3녀 중 장녀. 그녀의 막냇동생도 채서진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다. 네이버 얼짱 선발대회(2004) 출신인 김옥빈은 2005년 SBS 추석 특집극 <하노이 신부>로 드라마에 데뷔했다. 진짜 베트남 여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기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들었다. 같은 해에 영화 <여고괴담死—목소리>에 여고생 귀신 영언 역으로 나와 스크린에 첫선을 보였다. 이 영화로 크게 주목을 받으며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이듬해 드라마 <안녕하세요 하느님>(KBS2)과 <오버 더 레인보우>(MBC)에 출연해 대중에게 얼굴을 널리 알렸다. 영화 <다세포 소녀>에도 나왔던 이 시기에 소주 광고 등을 찍으며 얼짱 CF 모델로 눈길을 끌었다.

 이때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발언한 게 대중들의 질타를 받았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은 후 남자친구가 할인 카드를 꺼내 계산하는 게 분위기를 깬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20세였던 그녀는 프로그램 대본에 있는 답변이 자신의 생각과 같아서 선택했을 뿐이었는데, 세간의 이슈였던 된장녀 질타 분위기에 몰려 네티즌들의 거친 공격을 받았다.

 그녀는 이런 스캔들을 뒤로 하고 2007년에 드라마 <쩐의 전쟁:보너스 라운드>(SBS)에 나왔고, 2008년에는 이정재와 함께 영화 <1724 기방난동사건>을 찍기도 했다. 2009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는 그녀에게 시체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기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영화 <여배우들>(2009), <고지전>(2011), <시체가 돌아왔다>(2012), <열한시>(2013) 등에 출연했다. 이들 작품들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김옥빈은 다채로우면서도 개성적인 캐릭터를 잇달아 소화해 내면서 실력파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그녀는 철거민 문제를 다룬 <소수의견>(2015)에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여기자 역을 맡아 열연하면서 개념 배우 이미지를 심기도 했다. 드라마에도 꾸준히 나와 <칼과 꽃>(KBS2, 2013), <유나의 거리> (JTBC, 2014) 등을 선보였다.

 김옥빈은 연기 이외에도 다채로운 매력을 대중에게 선물해 왔다. 2011년 케이블 채널 XTM <탑기어 코리아>에 출연해 숨겨 온 운전 실력을 발휘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바이크와 자동차 운전이 취미라는 것이 그때 알려졌다.

 2012년에는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을 통해 각기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들을 모아 <김옥빈의 오케이 펑크OK PUNK>를 결성했다. 이 밴드는펑크록을 연습하는 과정을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며 주목을 받았다.

활달한 성격에서 가끔 터져 나오는 개념 발언은 과거 할인 카드 언급 논란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예컨대, 2016년 2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시크릿 리스트와 스폰서’ 편을 본 후 그녀가 SNS에 올린 글은 사안의 본질을 쉬운 언어로 꿰뚫어 본 것이었다. 돈으로 연예계 신인들을 농락하려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풍자가 설득력 있었고, ‘유명 연예인= 스폰서’라는 인식에 대한 반박이 적절했다. 동시에 ‘꿈을 갖고 노력하는 친구’들을 격려하고 싶은 연예계 선배의 절실한 마음도 잘 담았다.

 김옥빈은 2017년 영화 <악녀> 상영을 계기로 TV예능 프로그램에 잇달아 출연하며 대중들과 친화하는 시간을 누렸다. 얼굴을 일그러트릴 정도로 크게 웃으며 시원시원한 입담을 과시하고 능숙한 춤 실력을 과시했다. 여배우로서의 신비감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시청자 일각에서 나왔으나, 그녀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호의적 반응이 많았다.

 김옥빈은 <악녀>의 주인공으로 제70회 칸국제영화제에 초대됐다. 칸 레드카펫을 밟은 것은, <박쥐>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녀는 <악녀>에서 살인 병기로 길러진 조선족 최정예 킬러로, 자신을 둘러싼 비밀과 음모를 깨닫고 잔혹한 복수에 나서는 숙희 역할을 맡았다. 평소 꾸준히 운동을 해온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국내외에서 주가가 크게 올랐다. 김옥빈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8년 전 <박쥐>로 칸을 찾았을 때와는 마음가짐부터가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엔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고 그저 신기했는데 이번엔 덤덤하면서도 편안하게 좋더라고요. 레드카펫에서도 하늘을 보면서 ‘20대 때 왔는데 30대가 돼서야 왔구나. 40대에 다시 올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하자’고 다짐을 했어요.”

 김옥빈은 2019년 tvN 대작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에서 장동건 등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다. 정치적 야심이 있는 여성 태알하 역을 하면서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연기함으로써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렇게 성숙한 연기는 현장에서 오랜 시간 공력을 쌓아 왔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되돌아보니, 나를 만났던 만 22세 때 그 싹은 배태되고 있었다.

 “앞으로 작품 규모가 크든, 작든 제가 좋아할 만한 작품이면 열심히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쟤 뭐할까, 궁금해하더라도 상관없이 연기에만 몰두하며 흩날리는 말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살고 싶습니다.”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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