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불문학자 황현산의 시민을 위한 프랑스 시 수업, 그 유일한 기록: 『전위와 고전: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
[북리뷰] 불문학자 황현산의 시민을 위한 프랑스 시 수업, 그 유일한 기록: 『전위와 고전: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
  • 양진호(본지 에디터)
  • 승인 2021.10.01 01: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평가와 대중이 모두 사랑한 비평가, 고전 텍스트부터 SNS의 짧은 글들까지 모두 읽어 나간 전방위적인 비평가, 그리고 불문학자이자 에세이스트였던 이 시대의 ‘스승’ 황현산. 작고 3주기를 맞아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관한 그의 강의록을 책으로 펴낸 『전위와 고전』이 출간됐다. 책은 수류산방의 ‘아주가리 수첩 시리즈’ 제3권으로 나왔으며, 19세기 중반 보들레르부터 20세기 초 아폴리네르까지 아우른다. 이밖에 책에는 베를렌, 랭보, 로트레아몽 백작, 발레리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다.

  황현산은 2016년 1월 21일부터 2월 18일까지 실천적 인문 공동체 ‘시민행성’에서 여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전공인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를 했다. 생전에 그가 한 유일한 대중 강좌였던 이 강의에서 그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100여 년에 걸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계보를 정리하고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반인들이 난해하게 느낄 수 있는 프랑스 상징주의 작품들을 그는 쉽고 흥미롭게, 그러면서도 핵심적 개념들을 놓치지 않고 설명했다. 이 책의 제목 『전위와 고전』은 당시의 프랑스 시인들의 움직임이 실상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어떤 지점들에 가닿으려는 움직임일 수 있으며, 가장 미래적이며 가장 고대적일 수 있다는 뜻을 담아 정했다.

  황현산은 그들이 무엇을 해냈는지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를 이야기하려 했다. 제2공화정 시대 격변하는 대도시 파리에서 보들레르는 감각을 통해 감각 너머의 세계를 통찰하는 시를 시도한다. 이후 프랑스 시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 허위적 정치 현실 속에서 무(無)와 절대 순수를 지향한 말라르메를 거쳐 발레리에 이르는 흐름과, 혁명 속 로트레아몽과 랭보의 격렬하고 열정적인 흐름이다. 고도로 정제된 차가운 지성을 바탕으로 상징주의 시 체험의 극한을 완성해 낸 발레리에서 상징주의는 역설적으로 종언을 맞는다. 아폴리네르는 상징주의 시의 습득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시성과 현대성으로 나아갔다. 그는 형식을 무너뜨린 자유시, 시적 체험의 순서를 무시한 상형시(칼리그램) 등의 실험으로 동시대 미술과 건축 등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전방위로 영향을 미쳤다. 도시화, 혁명, 전쟁을 거친 그들의 실험은 이제 우리에게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문학적 교양이 아니라 전위의 태도로서, 현실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황현산은 이렇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고전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현재적 의미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부분까지 강연에서 강조했고, 이번 책은 그가 그렇게 강조한 부분들을 잘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전위와 고전』은 황현산 선생의 강의 체제를 가급적 따르고 살리려 한 흔적들이 돋보이는 책이다. 마치 독자가 강의실에 함께 있는 듯, 이 책 읽기가 또 하나의 공감각적 체험이 되기를 바라며 기획한 편집자의 의도가 책 전체의 구성을 통해 드러난다. 선생의 몸 상태에 따라 강의가 예상보다 조금 일찍 끝나기도 했고, 발음이 불분명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현장의 분위기를 존중해 강의 중 없던 말을 본문에 가감하지 않았다. 그 대신 황현산 선생이 평생 집필한 저서와 논문, 기고문등에서 행간의 의미를 발췌해 주석으로 덧붙였다. 그 짧은 몇 개의 단어와 문장이 황현산 선생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펼쳐지는지 확인할 수 있다.

  보들레르는 보통 현대 시의 아버지라고 이야기합니다. 보들레르가 없었더라도, 보들레르 대신 누가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보들레르가 딱 그 시기에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시의 개념 자체를 바꾸고 시가 할 수 있는 일 자체를 바꾸고, 시의 임무를 바꿔 놓다시피 했습니다.
- 본문 19쪽

  여기 있는 여러분은 문학에 운명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문학에다가 운명을 걸 때 분명 여러분을 사로잡는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문학이 가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게 가장 순결하게 남아 있는, 그러니까 모든 시적 열정을 한데 모으는, 시 쓰는 사람들에게 모든 시적 열정을 다시 발견하게 해 주는 힘이 행보의 시에는 있습니다.
- 본문 282쪽

  결국 시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갇혀 있는 상태를 깨뜨릴 수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깨뜨릴 것인가를 다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어떤 징후가 있는가를 찾는 것이 시를 쓰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 본문 565쪽

  책에는 290여 개의 사진과 도판이 자료로 첨부되어있다. 황현산의 평생지기였던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해설, 김정환·송승환·함돈균·김민정 등 후배 문인들의 회고 글 역시 곁들여져 3주기 추모의 의미를 더한다. 

 

 


 

* 《쿨투라》 2021년 10월호(통권 88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