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Theme] 식물의 빛
[4월 Theme] 식물의 빛
  • 최설희(정원사)
  • 승인 2022.04.01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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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생활의 시작

언젠가 작은 씨앗 하나를 흙에 심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고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

나의 식물 생활의 시작은 매우 작은 씨앗 하나를 흙에 심었던 그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매우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실 잠을 잘 시간도 부족하기만 했다. 뮤지컬과 연극의 조명 디자이너로 일한 오랜 시간 동안 하늘 한 번 바라볼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어떤 바람이 부는지, 비가 오는지, 하늘은 어떤 모습인지, 그런 것들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극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안에서 하루종일 인공의 빛을 바라보며, 빛을 잘 통제하기 위한 일들에 매진했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빛을 컨트롤하는 일. 통제가 가능한 빛을 상대로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공연 한 편을 올리기 위해 수백 번씩 똑같은 뮤지컬 넘버들을 계속 들었다. 오랜 꿈이었던 조명 일에 매달리던 긴 시간은, 잠시 뒤를 돌아다 볼 시간도 없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음악을 듣지 않았고 쉬는 날엔 조용한 곳을 찾았다. 음악을 듣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던 그 어느 날, 준비했던 공연 하나가 무산되었다. 앞만 보고 내달리다, 갑자기 찾아온 휴식의 시간은 내게 낯설기만 했다. 안절부절못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가만히 누워 조용한 햇살이 비치는 창가를 바라보다가 씨앗 하나를 심었다. 남향의 햇살이 비치는 낮의 창은 따뜻하고 풍요롭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바라본 하늘은 맑고 환했다. 씨앗을 심어놓고 매일 흙을 들여다 보았지만, 흙은 움직이지 않았고 변화가 없었다. 3일 정도면 발아를 하겠거니 생각했다. 일주일 동안 매일 그것을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고,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싹이 트지 않자 미련이 남았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식물 공부. 여름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느껴질 무렵, 나는 다시 흙에 씨앗을 심었다. 씨앗은 싹을 틔웠는데, 그 새싹이 어찌나 반갑던지. 그렇게 식물에 빠져들었다.

우주, 정원

결국 오래된 동네의 작은 건물에 식물가게를 시작했다. 이 장소를 선택한 단 하나의 이유는 빛이었다. 빛이 좋아서 시작했던 조명 일을 그만두고, 다시 새로운 빛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빛이 가득 들어오는 공간. 그것은 다른 모든 요인을 감수하게 했고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정원사의 꿈을 꾸며 이 가게의 이름은 정원, 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전시에서 본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잊히지 않았다. 넓고 황량한 사막과 같은 벌판 한가운데, 드문드문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곳은 그의 정원이었는데 생명의 기운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 척박한 땅에 씨앗을 심고, 식물을 가꾸고, 물을 주는 모습. 정원이 진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정원사의 마음, 어떻게든 식물을 키우고 싹을 틔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마음에 공감하며 웃었다.

식물은 시대를 넘나들어, 다 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식물을 키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식물을 오랫동안 키우며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을까. 키우던 식물이 건강한 새잎을 내줄 순간을 기다리는 다 같은 마음. 추운 겨울이 지루하기만 하고, 입춘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간절한 그 마음에 식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작은 씨앗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는 식물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우주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주정원이라는 작은 공간의 정원사가 되었다.

식물의 시간

식물의 시간은 나와 다르다. 식물은 나와는 다르게 매우 느긋하다. 성질 급한 마음에 화분을 들었다 놨다, 다음날 눈 뜨자마자 출근해서 온종일 애정이 어린 눈길을 아무리 보내봐도, 식물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자라난다. 식물을 재촉할 수도 없다. 결국 식물의 시간에 나를 맞추게 된다. 식물은 조용하지만 소란스럽다. 내가 가게를 비우는 시간을 가차없이 알아내고, 소란스럽게 물을 달라고, 빛이 부족하다고 말을 건다. 식물들에 정성을 쏟으면, 식물들은 내게 아름다운 새잎을 보여준다.

식물을 기르면서 온전히 계절을 느낀다. 오늘은 어떤 바람이 부는지, 어떤 햇살이 비치는지, 밤 기온은 또 어떤지. 우주정원을 운영하면서부터 하늘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올려다본다. 하늘의 빛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도 없이 밖으로 나가 바람을 느끼고, 기온을 체감한다. 오늘 문을 열어 둘지를 결정하고, 밖에 내놓은 식물들이 춥지는 않은지, 창가에 둔 식물들에 햇살이 너무 따갑지는 않은지 수시로 체크한다. 식물을 기르는 일은 단순히 작은 화분 하나를 들이는 일이 아니다. 그 식물을 시작으로 온몸과 마음으로 자연을 느끼는 일이다. 식물이 느끼는 계절과 시간을 관찰하고 체감하며, 그렇게 나는 더 느긋한 사람이 되고, 계절을 아는 사람이 되고, 하늘을 올려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된다. 통제할 수 없는 빛과 바람에 나를 맞추기 시작한다.

식물

식물은 누군가에게는 식테크의 도구, 누군가에게는 인테리어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는 친구, 하나뿐인 반려, 퇴근 후 발길을 재촉하게 되는 집에 있는 누군가가 되기도 한다. 우주 정원에 있다 보면 봄이 되자마자 밖에 내놓은 식물들에 발길을 멈추며, “예쁘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식물들은 누가 봐도 예쁘다. 식물들은 신기하게도 모두에게 예쁜 존재들이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튤립 한 송이가 핀 포트 하나를 사 들고 “예쁘다” 하고 가신다. 동네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서 “예쁘다” 한다. 옆 상가의 아주머니들께서 수시로 지나가며 “예쁘다” 하신다. 식물은 모두에게 하나의 마음을 품게 한다.

만나보지 못한 누군가가 SNS로 우주정원의 사진을 올린다. 퇴근길에 위로가 된다고 했다. 택배 아저씨가 우주정원의 사진을 찍는다. 밤 산책을 하던 부부가 발길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본다. 많은 사람이 오가고, 나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주정원의 식물들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 사실이 다시 나에게 돌아와 위로가 되어준다.

오래전 흙에 심은 그 작은 씨앗 하나가, 이렇게 큰 우주가 되었다.

올봄, 모두 따뜻하고 커다란 우주를 하나씩 품고, 예쁜 마음들을 함께 나누기를.

 

 


최설희
식물가게 우주정원 운영. 전 무대조명디자이너.

 

 

* 《쿨투라》 2022년 4월호(통권 9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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