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Theme] 덧없는 혹은 봄풀같은
[4월 Theme] 덧없는 혹은 봄풀같은
  • 박미경(콘텐츠큐레이터)
  • 승인 2022.04.01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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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죽고 모든 생명은 소멸한다. ‘약육강식’이라는 용어가 인간 문명의 어그로 혹은 허언이라고 믿고 있는 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전제하는 논리들을 얼추 귓등으로 듣는 편이다. 먹는 것은 강하고 먹히는 것은 약하다는 생각은 일면 그런 듯 보이지만 생명의 순환을 생각하면 단편이라 생각해서다. 적자가 생존하건, 생존하므로 강자이건 시간 축을 무한정 늘여서 보면 개체도 문명도 모두 소멸할 테니까. 그리고 대개 생물은 먹기도 하지만 종내에는 먹힌다.

밑도 끝도 없는 우주의 모든 것을 결코 알 수 없는이 불가지 세계에서는 개나 꽃이나 벌레나 사람이나 ‘졸지에 생명으로 생겨나 당연히 소멸한다’는 점에서 해 아래의 원 오브 더 삼라만상, 똑같다. 우리는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 간빙기의 잠시 동안 우리들 스스로 첨단이라 이름 붙인 현세기 문명을 이룩해놓고는 기록된 역사 속 많은 문명들이 생멸하였음을 알면서도 짐짓 우리 문명은 영원하리라 아웅하며 눈 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전방위 신기술을 구가하며 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기껏 백 년 안팎을 헤아리는 인간 수명을 훌쩍 넘어서는, 지구나 우주 관점에서의 시간을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집 안에 식물들과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듯하다. 나는 언제나 풀, 꽃, 나무와 심지어 밭과 산의 나물들마저 예정해왔지만 가내에 이들을 들인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봄이 오면 들썩들썩 매해 꽃화분을 왕창 들이곤 했지만 으레 철 지나며 꽃 지고 뿌리까지 싸그리 시들면 쫑나곤 하던 한 철 정원.

처음 알로카시아와 꽃 피는 극락조를 주문할 때만해도 그저 인테리어 식물로만 생각했다. 그러다 시처럼, 법문처럼 불현듯 교지라도 받은 듯 식물세계와의 공생을 염두하고 열렬히 봄꽃화분을 들였던 때는 나무를 들인 다음 해 봄이었던 것 같다. 출장이거나 여행이거나 무시로 집을 비울 때 돌봐줄 가족이 없는 나로서는 개, 고양이는 언감생심, 식물들이라고 긴 출장에 마르도록 둘 수는 없는 노릇. 무어라도 반려할 생명이 필요해서 식물을 들였던 건 아니지만 어느새 내 집에 온 생명을 가족으로 돌보는 집사가 되어있는 것이다.

낮달맞이, 미모사, 엔젤트럼펫, 닥풀, 색색의 란타나들과 에니시다, 목마가렛, 목엉겅퀴, 히야신스, 향제비꽃, 선인장들까지 이름만 불러도 작고 어여쁜 꽃이 귓가에 피어나는 듯한 아이들을 들여놓고 하나하나 꽃피우기를 기다리던 봄은 그 기다림만으로 충만했다. 꽃이 피어나던 날은 개화처럼 환희가 터졌다. 햇빛 찬란하던, 꽃들과의 봄날들.

엄청난 귀차니스트인 내 아침의 잠도 번쩍 깨우고, 뭉개려던 몸도 벌떡 일으키는 것은 식물들 밤새의 목마름을 생각할 때다. 강제하는 이 아무도 없는데 생명을 건사하는, 대가 없는 책무를 느낀달까. 엄마처럼 언니처럼. ‘얘들아 음악 듣자’하고 아침음악을 틀어두고 함께 듣는 아침, 흙마른 화분을 살피고 물을 듬뿍 주며 말을 건네는 일은 하루 일과의 첫 루틴이 되고 있다.

인간을 제외한 생물들은 파동으로 소통한다는 것을 기억해내고는 자주 말없는 말들 혹은 생각의 파동으로 아이들 마음에 귀 기울이다 보면 그대로 식멍 혹은 방향없이 흐르는 생각의 삼매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식물의 입장에서 생명, 지구나 우주를 생각하다 보면 뭇 생명은 무목적, 무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지에 이른다. 소멸을 내포한 생명일 뿐인 인류는 어쩌다 그저 존재하는 것을 초과한 목적적 세계를 부려놓고 있나. 여타 생명세계와 달리 인간만 유독 작위의 당착 속에서 서로를 괴롭히고 있나. 인간이 구축한 사회에서는 무도한 악행이 무수히 번성하는데도 야생의 평화를 커닝하지 못하나, 잡초마냥 생각의 뿌리들이 끝모르게 뻗기도 한다.

결핍 혹은 과잉, 문명의 제반 부작용에 스스로 압사당하면서 누구도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가는지 묻지 않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인간계는 과잉, 허위가 없는 야생의 현재를 보면서도 인류의 미래라고 생각지 않는 것 같다. 인류보다 오래 지구에서 생존해온 모든 생명체는 지구나 우주에 대한 빅데이터를 인간보다 많이 축적하고 있을 테지만 야생이 이룩한 도저한 평화를 인류는 아직도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 지구의 새내기 인류는 지금껏 자기 중심성을 벗지 못한 채 호기심 가득 끝 간 데 없는 문명 실험을 열혈 목하 진행 중인 것이다.

우리들은 왜 식물을 키우나. 인류가 생존을 위해 집(건물)을 발명하면서 포기한 야생과의 연결감을 복원하거나 향유하려는 생명 본성 아닐까. 화분 안에서만 뻗어야 하는 내 식물들의 답답한 뿌리들을 생각하면 더는 식물을 들이지 말자 생각하게 된다. 나가면 볼 수 있는 꽃들, 풀들을 화분에 가두어 집 안에 가두는 것조차 인간 편의 아닌가 싶어서다. 그래놓고도 나는 또 꽃화분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살랑살랑 불어대는 봄바람에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리며 동네 꽃집 앞을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요즘 내 머릿속 한 켠에는 투명한 온실정원이 자라나고 있다. 풀은 자기 이름을 모르고 꽃은 홀로 잘도 핀다. 무명의 어여쁜 독존들과 동거하노라면 모든 존재는 목적 없이 이유 없이 제각각 아름다운데 사람들은 어이 번잡한지 밑도 끝도 없는 우주처럼 알 수가 없다. 물을 적게 주는 경우보다 과습으로 죽는 경우가 많다지. 어느 때까지는 결핍 해소가 문명의 과제였지만 이제는 과잉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숙제 아닐까. 나는 나풀나풀 식물들과 흔들며 모두가 함께 먹고 놀다 죽는 세계를 상상한다, 봄풀마냥. 덧없이.

 

 


박미경
다수 영화제 총괄기획 및 프로그래머 씨컬처(CCULTURE) 대표 영화문화콘텐츠 기획, 큐레이팅. 2020-2022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 프로그래머.

 

 

* 《쿨투라》 2022년 4월호(통권 9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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