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뎐(傳) 1] 이리극장과 삼남극장
[극장뎐(傳) 1] 이리극장과 삼남극장
  • 신귀백(영화평론가)
  • 승인 2021.03.3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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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김지미가 데뷔한 영화 〈황혼열차〉 간판그림의 이리극장

《쿨투라》에서는 이번호부터 극장뎐(傳) 연재를 시작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도시와 시골 방방곳곳의 필자들이 써내려가는 극장 이야기(傳)다. 다양한 빚깔로 풀어낼 극장뎐 연재는 매혹적인 대한민국 극장사가 되리라 기대하며…
- 편집자 주

 

  육중하지만 부드러운

  허허벌판에 호남선 철도를 놓고 정거장 앞에 건설한 도시 이리(裡里)는 당구장과 제과점 그리고 다방이 많은 도시였다. 거기 네 개의 극장이 있었다. 영정통의 남쪽 끝에 이리극장이 자리하고 북쪽에는 삼남극장이 있었다. 시공관은 영화와 더불어 시청 주관의 문화행사 공간이었고 일본인 창고를 개조한 동성극장은 싼 요금에 두 편을 볼 수 있는 지린내 진동하는 3개봉관이었다.

  간이 작은 나는 ‘세코(개구멍)’를 뚫고 영화를 보러간 적이 없다. 기도나 간판쟁이를 통해서 극장에 들어가는 영화 같은 인연은 없었다. 극장문은 육중하지만 부드럽게 열렸다. 2층이 좋지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깡패형님들은 모두 2층 맨 앞줄에서 발을 걸치고 있었기에. 길게 늘어진 벨벳 커튼과 ‘탈모’와 ‘반공’이 드러나면 대한늬우스가 시작되었다.

  극장에서 잡혀와 반성문을 썼다는 짬바리들의 조잔한 이야기와 ‘학주’의 만행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까짓 영화가 무슨 레드라인이라고, 참 못난 선생들이다. 학생주임 스토리는 극장이 공공선을 헤친다고 믿던 시절의 근엄함이 만든 ‘도시전설’이라고 믿는다. 우리들은 그렇게 많이 영화를 보고 ‘쇼’를 즐겼지만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다닌 학교의 선생님들은 더한 것도 봐주셨다. 학교를 못 다니던 수출자유지역의 내 또래들에게 미안하다.

1975년. 이리극장 전단(대한민국역사박물관)

  식민도시의 극장

  이리극장이 쌀 수탈을 위해 달려온 일본인들이 1914년에 설립한 극장이라는 것은 새치를 염색하고서 알았다. ‘이리좌(座)’로 시작한 극장에는 전설의 무희 최승희가 무대에 섰다는 기록도 있다. 여하튼 나는 트로트를 무시했고 한국영화를 업신여겼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한국영화는 끝나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는 나름의 룰도 있었는데…. 나는 거기 형사들이 앉는다는 임검석에서 룰을 깨고 〈육체의 약속〉을 보았다. 추파와 눈물이 아니었다. 훗날 알고 보니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리메이크한 김기영 감독의 작품이었다. 오동도에서 올라온 귀향죄수와 청년이 열차가 멈춘 시간 동안 사랑을 나누고 온 그 역이 이리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리메이크한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

  단체관람으로 보았던 〈돌아오지 않는 강〉을 비롯해 〈내이름은 튜니티〉, 〈록키〉의 스토리는 알겠지만 〈대부〉를 보고선 도대체 왜 이게 명화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 175분의 러닝타임을 120분이 안 되게 자른 신공은 누가 부렸을까. 그러니 ‘거절할 수 없는 제안’ 같은 명대사보다는 톨게이트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던 잔상 같은 것만 남아있다. 고난과 역경을 물리치는 영웅서사에 박수를 치던 끝물의 시절, 황당한 기억이 있다. 〈지옥의 묵시록〉 중에서 베트콩 어린 여자애가 미군에게 수류탄을 던졌을 때 박수가 터졌다. 오싹했다.

175분을 120분 안 쪽으로 잘라 신공을 부린 〈대부〉

  요즘이야 영사실이 있으면 무대가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당시 극장은 연극과 쇼, 리사이틀에 반공궐기대회까지 벌어지는 곳이니 무대가 제법 높았다. 김추자 ‘쇼’를 하면 무대 아래서 쌍욕을 하는 건달들이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추자 누나는 딱 붙은바지를 입고 파도여 춤을 추라면서 〈무인도〉를 불렀다. 요즘 말로, 지렸다.

 

  이리역폭발사고와 삼남극장

  삼남극장에서는 와이어 티가 팍 나는 중국영화, 정확히는 홍콩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정무문〉, 〈당산대형〉, 〈맹룡과강〉, 〈용쟁호투〉에 이르기까지 노란색 추리닝을 걸친 이소룡의 과장된 표정과 도장깨기를 보았다. 일당백의 롱테이크 장면 뒤 구체적인 선빵과 효과음 그리고 부서져나가던 문짝, 극장문을 열고나서면 동작만 남는 장면들 말이다. 그의 복근을 흉내내 쌍절곤을 들고 다니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야 뭐 그렇게까지.

앞으로는 ‘삐끕’영화라 무시하면서 뒤로는 이소룡 형님 동작을 따라하던…

  혼자 열심히 때리는 이소룡과 많이 맞는 성룡의 쿠키영상을 보려고 오래 앉아 있었다. 〈백인도장〉, 〈13인의 무사〉를 지나 액션과 코미디로 범벅된, 1.5배속으로 보아도 좋을 영화들도 기억난다, 외팔이 왕우 선배님과 홍금보 그리고 윤발이 형을 제외하면 유덕화와 양조위에 주성치까지 모두 앨범 속 동창생 같이 느껴진다. ‘샤오링 템플’의 우슈명인으로 변발한 이연걸이 아프다니 속상한다. 아, 임청하 누님은 잘 계시는지?

  1977년 11월 11일,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군산 친구 집에서 대한민국 대 이란 국가대표 팀의 축구경기를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었다. 9시 15분 이리역에서 화약열차에 실은 다이나마이트가 폭발했다1. 역에서 가까운 삼남극장은 지붕이 내려앉았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부상을 당한 하춘화를 업고 나온 이주일은 그 뒤부터 스타가 된다. 10여명의 철도원이 순직했고 삼남극장 주위에 있던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유곽의 여성들이 많이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은 사실이었다. 쓰러진 극장은 일어서지 못했다.

1977년 하춘화쇼를 하던 삼남극장 간판

  패, 경, 옥과 도시재생 공간

  영화만 보았겠는가. 대가리에 피가 마르면서 복수의 여성들과 함께한 곳이 극장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여배우와 함께 내 곁에 앉았던 그들과의 에로스와 눈물을 잊지 못한다. 지나 롤로브리짓다나 소피아 로렌 같은 센 언니를 좋아하던 것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생머리의 알리 맥그로우, FBI 초짜수사관 조디 포스터, 다리와 함께 마음까지 들썩이게 한 샤론 스톤 누님과 공리와 장만옥은 나에게 ‘패, 경, 옥’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내게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 딸 같은 배우들은 생략하자.

왜식풍이 남은 익산 영정통거리의 모습

  복어요리와 국화꽃과 단팥빵의 흔적이 진한 도시의 이름은 익산(益山)으로 바뀌었다. 안젤리나 졸리, 모니카 벨루치와 기네스 펠트로우는 신도심에 생겨난 멀티플렉스에서 만났다. 이제 저 옛날 권태를 달래던 동네는 모두 도시재생을 걱정하는 공간이 되었다. 극장주인의 딸은 국회의원이 되었고 깡패두목이 인수했던 극장은 무랑루주라는 나이트클럽으로 한창 번성하더니 극장은 헐렸다. 이후 상가로 지어졌으나 요양병원이 들어선다 한다. 삼남극장은 진즉 요양병원이 되어 있다. 거기 눕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1 2007년 장률 감독은 윤진서와 엄태웅이 주연한 이리역 폭발사고의 후유증을 다룬 〈이리〉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 《쿨투라》 2021년 3월호(통권 8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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