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뎐(傳) 7] 굿바이 서울극장
[극장뎐(傳) 7] 굿바이 서울극장
  • 김호일(휴먼경제연구소 소장)
  • 승인 2021.09.04 0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무로에서 단연 최고의 영화관이었죠.”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서울극장의 추억을 묻자 이런 답을 건넨다. 심 대표는 1987년 대학 졸업 후 이극장 기획실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해 ‘친정’ 같은 곳이기에 애틋함이 남다를 것이다 .

  그런 서울극장이 문을 닫았다. 1978년 개관해 청춘남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극장이 43년 만에 간판을 내렸다. 서울극장은 홈페이지에 고별인사를 한 뒤 8월 31일 마지막 손님을 받고 영사기 불을 완전히 껐다.

신작이 개봉되는 주말이면 영화관객들로 서울극장 주변은 인산인해

  # 한국영화 흥행거점, 출발은 ‘삼류극장’

  ‘한국영화 흥행거점’이었던 서울극장은 원래 삼류극장이었다. 그 역사는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5년가량이 흐른 1958년 종로구 관수동에 자리 잡았던 ‘메트로극장’이 본래의 모습이다. 이후 1960년 세기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메트로극장부터 기원을 따진다면 서울극장 역사는 환갑을 훌쩍 넘긴 63년에 이른다.사실 종로 뒷골목에 있던 이 극장은 신작이 아니라 재개봉작을 틀어주던 싸구려 극장이었다. 극장한 켠에서 지린내나 담배 냄새가 풀풀 났지만, 합동영화사 곽정환 회장이 1978년 이를 인수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영화배우 고은아 씨의 부군이기도 한 곽 회장은 1964년 합동영화사를 설립한 이후 25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동시에 영화배급과 외화유통까지 장악한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다.

  상영관이 하나뿐이고 재개봉관인 세기극장을 인수한 곽 회장은 먼저 서울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개봉관으로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특유의 마당발 행보로 〈미션〉 〈청춘스케치〉 〈인디아나 존스〉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취권〉 같은 홍콩 무협 영화 상영을 통해 ‘명품극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물론 〈애마부인〉 〈변강쇠〉 같은 성인영화도 종종 틀었는데, 이마저도 관객동원에 성공하면서 인근의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과 쌍벽을 이루며 ‘한국영화 종로시대’를 활짝 열었다.

1978년 서울극장 개관작 〈마지막 겨울〉

  #단성사 피카디리와 ‘골든 트라이앵글’ 구축

  서울극장은 1989년 한차례 변신을 했다. 극장 후면을 매입해 3개 관으로 증설한 것. 이를 계기로 경쟁 극장과의 격차를 벌려 나갔다. 예컨대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 주연의 〈사랑과 영혼〉은 170만 명을 동원, 당시로선 전무후무한 ‘백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

  특히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 인근의 서울극장은 단성사, 피카디리와 함께 ‘골든 트라이앵글’을 구축하며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이런 탓에 곽 회장은 충무로에서 ‘영화왕’으로 통했다. 실제로 영화전문지 《씨네21》이 1995년 “누가 영화계를 움직이는가”라며 ‘충무로 파워 1인자’ 설문조사를 한 결과, 숱한 영화인들을 제치고 그가 1위를 차지한 것. 이를 미뤄 짐작할 때 당시 그의 권세와 파워가 어떠했는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서울극장은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나갔다. 1997년 7개 관으로 확장하며 한국영화 최초의 복합영화관 시대를 열었다. 이는 1998년 CJ가 서울 강변 CGV를 개관하며 대기업이 한국에 처음 멀티플렉스를 선보인 것보다 1년 앞선 것이다

  서울극장의 권세는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웬만한 한국영화 화제작들이 이곳에서 언론배급 시사회를 열었다. 배우들의 무대 인사나 팬 사인회도 극장 안팎에서 진행됐다.

  환갑을 넘긴 탓일까. 서울극장도 지쳤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대기업 멀티플렉스 공세에 파김치가 된 것. 한때 극장을 가득 메웠던 관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화려했던 극장 건물은 구시대의 유물로 변했다. 게다가 변화를 주도하던 곽 회장이 2013년 타계하면서 추진동력마저 잃었다.

  그래도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예술과 다양성 영화를 상영하고 요금제도 폭넓게 개편했다.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에게 공간을 내주기도 했다. 미장센단편영화제, 서울환경영화제 등 작은 영화제를 개최하는 장소로 새로운 살길을 모색했고, 건물을 리뉴얼해 편의시설을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지난해 코로나19가 엄습한 이후 영화관을 찾는 발길이 뚝 끊기자 서울극장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2013년 타계한 서울극장 곽정환 회장

  # ‘흥행 바로미터’ 소문에 영화인 집결소 역할도

  충무로 사람들에게 물으면 서울극장과 얽힌 에피소드를 가감 없이 들려준다. 무엇보다 ‘흥행의 바로메타’라는 소문에 영화인들의 집결소 역할을 했다. 요즘과 달리 당시엔 영화 개봉일은 토요일. 그래서 주말이면 서울극장 카페 ‘팡세’나 인근 커피숍, 골목길 선술집에는 영화관계자들로 넘쳐났다. 개봉 당일 서울극장 매진 속도를 보면 흥행 예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서울극장맨’ 출신인 이준익 감독은 “당시 극장 매표소에 관객이 얼마나 줄을 길게 섰느냐를 두고 영화관계자들이 엄청 신경전을 펼쳤다”며 “인근 극장의 개봉영화와의 기싸움에서 지지 않을려고 꼼수를 쓰거나 매표 담당자에게 발권 속도를 늦춰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며 당시를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서울극장의 명성은 비디오테이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영화가 종영되면 곧바로 비디오테이프로 출시되곤 했는데 문제는 가격. 극장 미개봉작, 극장 개봉작, 그리고 서울극장 개봉작의 가격이 달랐다. 특히 ‘서울극장 개봉작’은 겉표지에 커다란 스티커를 붙여 다른 작품에 비해 배 이상 높게 대여료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소위 ‘듣보잡 영화’를 서울극장 조조나 심야에 단발 상영 후 ‘서울극장 개봉작’이라고 붙이고 영화정보가 부족한 시골 비디오가게에 비싸게 팔아먹는 얄팍한 상혼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 숱한 영화인 배출한 ‘영화 사관학교’

  서울극장과 합동영화사를 거쳐 간 영화인들이 꽤나 많다. 그래서 마치 ‘영화 사관학교’처럼 다가온다. 196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트로이카 여배우였던 윤정희는 22세였던 1967년 합동영화사에서 공모한 영화 〈청춘 극장〉 오디션에서 선발돼 스크린으로 데뷔했다.

  원조 한류스타 배용준은 합동영화사 연출부에서 일을 배웠다. 출연자 섭외, 장소 헌팅 등을 맡으며 현장 경험을 쌓은 배용준은 1994년 드라마 〈사랑의 인사〉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됐다.

  박중훈도 무명시절 〈깜보〉(1986)에 출연하기 위해 학교도 안 가고, 합동영화사로 출퇴근하며, 매일 청소를 하며 눈도장을 찍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충무로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감독은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1985년 합동영화사에서 시행한 감독 공채에 합격해 조감독으로 충무로에 입성한 케이스.

  〈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를 매만진 이준익 감독도 이곳에서 영화를 익혔다. 디자이너와 선전부장으로 디자인, 카피, 포스터를 만들다가 1987년 씨네월드를 설립하며 독립했다. 〈해피엔드〉 〈섬〉 〈건축학개론〉 등을 제작한 명필름 심재명 대표도 기획과 홍보를 맡았던 ‘서울극장맨’이다.

  문 닫는다는 소식에 영화 팬들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초등학생인 두 아이의 엄마인 강상미 씨는 “20대 중반 직장인 마포에서 동료들과 자주 영화 보러 간 곳”이라며 “지금도 종로를 지날 때마다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설렌다”며 당시를 추억했다. 50대 중반인 황금희 씨는 “남편과 연애할 때 자주 갔죠. 특히 극장 앞에서 팔던 쥐포와 튀김이 아주 맛있었는데 폐관한다니 많이 아쉽다”고 전했다.

  아무튼 한때 ‘한국영화 흥행거점’으로 충무로를 호령했던 서울극장은 폐관 이후 도심 슬럼가 재개발 바람을 피해가기 어려워, 화려했던 그때 그 시절 모습은 이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김호일
휴먼경제연구소 소장. 30년간 《부산일보》에 몸담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부 기자로 취재 일선을 누볐다. 《부산일보》 서울지사장과 《BS투데이》 편집국장, 사장을 역임했다. 2009년 출범한 한국영화기자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자문위원, 연합뉴스 수용자권익위원, 부산콘텐츠마켓 자문위원 등을 거쳤고 모교인 경희대 언론정보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 《쿨투라》 2021년 9월호(통권 86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