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길을 걷다가 미끄러지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경험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있 을 것이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 일도 없었 던 것처럼 재빨리 일어난다. 사실은 엉덩이가 욱신거리고 발목이 쑤시지만 그런 아픔 따위야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안 아파서 얼른 일어나는 게 아니라 창피해서, 주목받는 게 싫어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조금만 늦게 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괜찮아요?”라는 말이라도 날아올까봐. 나중에 집에 가서 아픈 부분에 파스라도 한 장 붙일지언정, 넘어진 현장에서는 훌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1980년 벽두의 조용필을 강렬하게 착색한 이미지에는 여러 차원의 새로움이 있었다.단색이 아닌 다양한 그의 흡인력에는 목소리의 짙은 호소력, 다양한 장르 소화력, 해맑은 소년의 미소 같은 것들이 만만치 않은 새로움으로 버티고 있었다. 더구나 언뜻 왜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소박한 비인공非人工의 외관은, 이 나라의 평범한 소녀들에게 그가 친근하고도 사랑스러운 ‘오빠’ 이미지로 각인되게끔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객석에서, 안방에서, 그의 브로마이드가 담긴 잡지를 들추면서 ‘오빠’를 목놓아 부

소설가 한강(46)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Vegetarian』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후보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녀를 만난 지 일주일쯤 지난 뒤였다.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적인 권위를 지니는 이 상 후보로 한국 작가가 오른 건 처음이다.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영국 명문 출판사 포르토벨로에서 데버러 스미스 Deborah Smith의 유려한 번역으로 『채식주의자』가 출간 된 이래 『소년이 온다Human Act』가 올 초 다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오고, 프랑스와 미국에서도 연달아 같은 책들 이 번역 출간되면서 뉴욕타임

현역에게 딴죽 걸지 말라장재선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어막노동판에서 돈을 벌면술만 마시던 청춘을 지나왔다고 했다빵처럼 영화를 찍던 시절에성공할 리가 없는 것을 하면서도포기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바람이 부는 만큼 드러누웠다가도바로 일어서는 풀그렇게 한평생을 다스렸다고 했다서양 것을 어설피 흉내 내지 않고내 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부대끼고 또 부대끼며 살았다고 했다늙어 영화 만든다고 걱정하는 이들에게즈그들 일이나 잘하면 좋겄다며현역에게 딴죽 걸지 말라고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라고 그를 칭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 영화가 2019년 올해, ‘제작’ 100주년을 맞이했다. 3·1혁명1, 임시정부 수립,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 출간 등과 더불어. 1919년 선보인 최초의 한국 영화는 2다. 따라서 관객들의 수용이 아닌 제작을 기준으로 우리 영화 100주년을 기린다는 전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극영화 제1호”로 “1923년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장려용으로 만든 계몽영화”(『한국 영화사 - 開化期에서 開花期기까지』) (윤

최수진 (남) 건축과 교수.강안나 (여) 최수진 교수의 스승의 딸.민대표 (남) 건축 스튜디오 대표정남 (여) 최수진 교수의 제자지선 (여) 연극과 학생그 밖의 사람들그의 연출작도 물론 좋아하지만, 신연식은 내게 '각본을 잘 쓰는 연출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다. 박찬욱, 이무영의 시나리오 연재를 마치면서 응당 그에게 숨겨두었던 아이가 있으면 보여달라고 청했다. 그는 까마득한 옛날에 만든 이야기라며 쑥스러워했지만, 편집위원들은 '안나'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공감대를 형

제주국제공항에 내릴 때마다 떠오르는 섬이 있다. 이탈리아 반도 남쪽 지중해에 자리 잡은 시칠리아다. 팔레르모 공항에 착륙할 때면 제주국제공항에 내릴 때처럼 비행기의 선회 각도까지 비슷하다. 팔레르모 시장에 가면 섬 아낙네들 특유의 목소리가 떠들썩한 고성으로 오간다. 제주도에 비하면 시칠리아는 광활해서 섬이 아니라 대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면적은 제주도보다 열세 배 이상 넓다. 20여 년 전 처음 갔을 때만해도 유명한 시칠리아 와인은 거의 없었다. 저렴한 화이트 와인 마르살라 정도가 가장 많이 알려진 와인이었다. 와인에 대해 잘 알

나는 젊은 날 대부분을 독일에서 보냈다. 모태신앙인 나는 그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교회를 오갔다. 유럽에 머물렀던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에서 오르간으로 예배 반주를 했고, 그 유서 깊은 악기의 울림에 한껏 빠져 지냈다. 돌이켜보면 많은 연주회를 하며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뜨겁게 누렸던 감사한 시간이다. 독일이 통일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동독 지역에 속해 있던 음악 도시 라이프치히를 방문했다. 두 주 동안 유명 교수님의 마스터클래스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 옛날 오랜 세월을 성 토마스 교회에서 칸

모스크바의 봄은 사과나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월이면 거리, 공원, 다차 주변에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꽃의 생김새나 색깔이 벚꽃과 비슷했다. 봄눈이 한두 번 지나고 나면 사과나무는 놀란 듯 화들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개화 기간은 고작 열흘 남짓, 일상에 쫓기다 보면 사과꽃이 피었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모스크바에 사과나무가 많은 이유를 속 시원히 들어본 적은 없지만 봄의 전령사로 손색이 없었다. 5월 중순이면 사과꽃을 보기 위해 서민이 자주 찾는 깔로멘스꼬예 공원을 찾았다. 인공호수와 어우러진 짜리찌노, 귀족의 영

두 차원장재선연기에 몰입하면서도13년째 공대생이었지극중 차가운 남자지만스태프들에 점퍼 선물예의 차리는 청년인데칭찬은 사양 모드였어현실과 판타지 보듬고세상 사람과 두루 통해두 차원 열심히 오가며30년 후 기다리게 하네. “배우들이 가장 인정하는 동료 배우 중의 한 사람인데, 대중 스타로서는 이름이 확 뜨지 못했다. 유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압박감은 없나.” 배우를 앞에 두고 이렇게 직설적으로 묻는 것은 결례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들은 상대방은 수굿이 경청한 후에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최선을 다한다고 했으나 100%

121. 호텔 뒷문 멀리 바다가 보이고, 이훈과 수영이 회전문을 열고 들어온다. 라운지쪽에서 여가수가 부르는 이 구슬프게 들린다.수영…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미소 지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지는 수영. 라운지 바로 향하는 이훈.122. 라운지 여가수의 노래 이 계속 흐른다. 몽구와 수영이 노피아니스트를 만났던 곳과 동일하다. 이훈, 편안한 소파를 발견하고 가서 앉는다.123. 8층 복도 엘리베이터 열리고 수영 내린다.124. 라운지 잠시

나의 꿈을 알까 – ‘화려한 도시’와 ‘고향의 향기’ 조용필이 1991년에 펴낸 13집 앨범은 《The Dreams》다. 그야말로 ‘꿈들’이다. 여기에 그는 , , , , , 등 일련의 ‘꿈’ 노래들을 실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은 이 가운데서도 단연 대표곡으로서, 조용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싱어 송라이터로 각인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조용필의 시대였던 1980년대가 저물고 새로 열린 1990년대에 그가 던진 시대적 화두로서

연말이 되면 서점들마다 한해의 베스트셀러 순위를 발표한다. 가령 교보문고에서 2018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은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였다고 한다. 통상 이 책은 서점의 ‘에세이’칸에 놓이고 있지만 사실은 잠언집이나 화집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위로가 될 법한 문구들을 의 일러스트에 얹어 놓은 페이지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양이나 참신함으로 보면 높이 평가하기 힘든 이 책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그만큼 위무를 구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베스트셀러의 순위를 더 살

언제부터였을까.로맨스 드라마의 남자주인공들에게 가슴 아픈 사연들이 생겨나고 나르시시즘으로 충만하던 그들의 삶이 엄마 잃은 불쌍한 어린 아이마냥 연민과 동정의 아이콘이 된 것이.한때 ‘실장님’으로 불렸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고속 승진하여 ‘대표님’과 ‘부회장님’ 사이를 오가며 깊은 불황에 허덕이는 한국 경제에 보기 드문 족적을 남기는 불사(不死)의 슈퍼맨들. 그들이 바로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주인공들이다. 그중 (2013)의 도민준은 유독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었는데, 당시 그는 나이 400살의 외계인이었다. 공간이

지금 우리가 듣는 (거의) 모든 음악은 서구의 12음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피아노 위 도에서 시까지 흰건반과 검은건반의 개수를 생각해보자). 인류가 이 12음들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나열해서 멜로디를 만들어온 지 최소 몇 백년, 팝의 역사만 해도 거진 100년이 흘렀으니 더 이상 ‘전에 없던 새로우면서도 좋은’ 일련의 음들의 조합이 나올 가능성은 수학적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실제로도 대중음악의 전성기였다고 흔히들 얘기하는 80,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이후로는 창의적이면서 주옥같은 멜로디의 노래가 나

설날오세영새해 첫날은빈 노트의 안표지 같은 것,쓸 말은 많아도아까워 소중히 접어 둔여백이다. 가장 순결한 한 음절의 모국어母國語를 기다리며홀로 견디는 그의 고독,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충만하다. 새해 첫날 새벽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혀 하이얀 산과 들,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고요는신神의 비어 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눈길에문득 모국어로 우짖는까치 한 마리. 오세영 전남 영광 출생. 1965~68년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 시 등단. 『바람의 그림자』 『밤하늘의 바둑 판』 등 20여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 서 더 울다가/다시 누었다”(「풀」 1연)흰 벽면에 김수영의 시 「풀」이 검은색 필체로 돋을새김(양각陽刻) 되어 있다. 김수영이 타계하기 전에 남긴 시 「풀」이 의 입구이자 출구인 셈이다. 바로 제1전시실에 들어서면 컴퓨터그래픽 영상으로 묘사된, 초록빛 들판의 ‘풀’이 눈에 띈다. 우리는 김수영의 삶과 문학이 이뤄놓은 풀밭에 들어온 것이다.김수영의 문학은 ‘풀’을 닮아있다. ‘풀’은 하나의 개체를 지칭하는 단수이기도 하지만 일상적으로 우리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가 굉장히 자유로워졌어요. 그 철학가는 책에 끌려 다니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사실 어떤 책을 읽을 때 이해가 안 된다거나 할 때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책을 읽으면서 무얼 느끼고 있고, 책이 나에게 와서 무슨 의미가 되는지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준 책이 그 책이에요.” 가수 요조(본명 신수진·37)는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가 지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접한 뒤 독자가 책에 끌려가거나 잠식되지 말고 책을 이끌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고, 그가 최근 펴낸 독서일기 『눈이 아닌 것으로도

1. 향유와 확장의 동시대적 형상문학에도 일상적인 경제활동처럼 공급자와 수요자가 구분되어 있다. 공급자로서의 문학인은 ‘왜 쓰느냐“는 명제에 부합하는 표현욕구와 기록욕구의 원인행위를 그 창작 현장에 내포한다. 수요자로서의 문학인은 공감의 자기만족과 당대 문화현상에의 참여라는 계산법을 독서 시간에 대입한다. 이 양자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여러 가치 규범 가운데 문학의 향유와 확장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두기로 하면, 사회·역사적 가치나 윤리적 가치보다는 사적인 차원의 미적 가치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동시대 문화와 문학에

1974년 여름 원효의 『큰 수레 믿음 일으키는 글 풀이』를 읽고 있을 무렵이었다. 크다고 하려니 안이 없는 곳에 들어가 남음이 없고, 작다고 하려니 만물을 감싸고 남음이 있다는 대승의 의미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인과의 연쇄조차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혼자서는 그 뜻을 풀 수 없어 하케다의 영어 번역본(Yoshito S. Hakeda, The Awakening of Faith, New York :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7)과 대조하며 보았으나 종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명의 활동[業相]이 주관[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