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처음 본 여인의 눈빛 하나에 밤잠 설치는 그런 것들
[북리뷰] 처음 본 여인의 눈빛 하나에 밤잠 설치는 그런 것들
  • 손희(본지 편집장)
  • 승인 2020.08.26 17: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작시 10편 선보이는 박동규 수필집 『보이지 않는 마음의 순례』

  문학평론가 박동규 교수가 『어머니의 눈사람』 이후 4년 만에 신작 수필집 『보이지 않는 마음의 순례』(도서출판 역락)를 펴냈다.

  1939년 경북 경주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출생한 저자는 1962년 《현대문학》 평론으로 등단하였다. 저서로 『현대 한국소설의 성격 연구』 『한국 현대소설의 비평적 분석』 『현대 한국 문제 작품 분석』 『전후 한국 소설의 연구』 등의 논문집과, 문장론집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수필집 『별을 밟고 오는 영혼』 『당신이 고독할 때』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오늘, 당신이라 부를수 있는 행복』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삶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 등을 출간하였으며, 출간한 많은 저서들이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정년한 저자는 훌륭한 후학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목월 시인이 창간한 월간 시 전문지 《심상》의 편집고문을 맡고 있다.

  이번에 펴낸 수필집 『보이지 않는 마음의 순례』는 총 4부(1부 ‘닮아가는 가족의 마음’, 2부 ‘따뜻한 말 한마디’, 3부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인연’, 4부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자국’)로 나누어 66편의 주옥같은 에세이를 수록했다.

  저자는 이 책에 실린 글들에 대해 “의식의 바닥에 내려앉아 있는 분별되지 않는 기억들 중에서 밤하늘에 떠다니는 반딧불이를 닮은 사연을 찾아내려고 하였다”고 고백한다. 비록 조금은 지나간 세월의 먼지에 덮여 낡은 문화의 흔적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세월 따라 변해버린 삶의 행태가 아름다운 생명의 본질을 털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꽃을 볼 때가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꽃이 지닌 예쁜 모습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살아오는 동안 겪은 일들이 마치 개울물이 흘러가며 돌이나 나뭇가지에 부딪히면서 생겨난 물방울처럼 금세 생겨났다 사라져버리곤 한다. 나는 그런 기억들을 적어보고자 했다. 왜 아무것도 아닌 자질구레한 일에 매달려 사연을 찾아보려 하느냐고 묻는 이도 있다. 그러나 사는 것은 일들과의 교접을 통해서 얻는 체험의 기억에서 그 의미를 건져내는 것이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길에서 만난 친구의 말 한마디로 용기를 얻고, 처음 본 여인의 눈빛 하나에 밤잠을 설치는 그런 것들이 나를 만들어온 과정이 되고 있다. 그 체험의 기억은, 무어라고 꼭 제목을 붙이진 못해도 나에게는 소중하고 진실한 삶의 이야기이자, 나의 보이지 않는 마음이기도 하다.

  원효로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50년 넘게 살았다. 결혼해서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서도 원효로 집은 내 생명의 탯줄이었다. 초등학생 때 원효로행 버스를 타고 남영동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구부러진 길을 돌아가면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얼굴을 막아섰다. 대학교수가 되어서도 집으로 가는 길에 내 얼굴을 막던 플라타너스 잎들은 그대로였다.그렇지만 대학교에 붙여놓은 합격자 명단을 보고가던 길에는 잎들은 손을 들어 축하해 주었고, 하루 힘든 일을 끝내고 힘없이 창밖을 볼 때면 마치 그들도 시달려 겨우 매달려 있는 듯이 흐늘거렸다. 어려운 시련을 안고 집으로 갈 때는 잎들은 나에게 무서움을 주었다. 남영동 굽이길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 잎사귀는 나와 함께 살면서 서로 묵언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 서문 「잔잔한 개울물에 떠오른 물방울처럼」중에서

  너무나 빛나는, 아름다운 문장의 서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이 하나의 생명 안에 존재해 있는 반짝거리는 잔잔한 조약돌이 되고 깨끗한 물에 깎여 동그랗게 다듬어져 물속에서 빛나는, 그런 ‘좋은’ 돌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일까. 본문 속의 행간들을 따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맑아진다. 한없이 낮고 쓸쓸해지다가도 따스해지는 그런 행복한 기분이 스며든다. 이런 기분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평론과 수필을 써온 저자지만 이번 에세이집에서는 그동안 꼭꼭 숨겨온 자신의 심상을 새롭게 시로 선보인다 .

목월 시인

  저자가 서른여덟 살 되는 해 아버지(목월 시인)가 돌아가셨다. 그 다음 해 흰 머리카락이 귀 위에 조금 생겨났다. 아버지가 물려준 시 전문 잡지를 맡아서 운영하느라고 노심초사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심리적 충격이 그를 긴장시키고 힘들게 했던 탓이라고 「흰 머리카락」편에 쓰고 있다.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우산 속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지만 돌아가시고 나자 맨머리에 그대로 비를 맞는 것처럼 허허롭게 혼자 서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는 박동규 교수. 그의 흰머리는 이러한 사정을 아는 듯이 해마다 번져갔다. 그리고 오십이 가까이 되던 어느 날,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계신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책에서 보고서야 ‘아버지의 짧은 머리는 흰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섯 형제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동안 남보다 더 빨리 머리칼이 하얗게 되어서 스포츠형 머리로 짧게 자르셨던 게 아닌가 싶었다는 저자의 반면교사는 그의 자작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손등에 주름이 가득하다
누가 내 손등에 고생의 강을 그려준 것도 아닌데
내 머리는 백발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생긴 흰 머리카락이
이제는 흰 눈처럼 하얗다
굽이치는 삶의 계곡을 건너는 일들은 언제나 내 심장에 그대로 살아있다
자갈이 물을 만나 둥글게 바뀌는 것을
세월의 무늬가 살아있음의 즐거움인 것을
- 「흰 머리카락 한 올에도」

  시 속의 화자는 “자갈이 물을 만나 둥글게 바뀌는 것”처럼 “세월의 무늬(손등에 가득한 주름, 흰 눈처럼 하얀 백발)가 살아있음의 즐거움인 것을” 고백한다. “굽이치는 삶의 계곡을 건너” 본 자만이 던질 수 있는, 아름답고 명징한 화두가 아닌가!

  박동규 교수는 “이 시는 흰 머리칼 하나에도 삶의 흔적이 얹힌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오는 동안 나와 함께해온 것들에 대한 연민을 그려본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사과가 익어갈 무렵」에는 “새가 파먹은 사과가 더 맛있다”고 말씀하신 어머니와 과수원을 했던 고모의 빨간 사과 홍옥에 대한 사연을 추억하는 시도 실려 있다.

아버지 박목월 시인과 어머니 유익순 여사
아버지 박목월 시인과 어머니 유익순 여사

고향에 가면 탱자나무 울타리 위로 빨간 사과들이
꽃처럼 달려 있다
고추잠자리들이 꼭꼭 찔러도 파란 하늘만 보고있다
장시고모는 까만 얼굴에 흰수건을 머리에 쓰고
사다리에 올라 사과를 딴다
새가 파먹은 사과를 따서는 바구니에 넣지 않고 자루에 넣는다
콕콕 새가 파먹은 사과는 고모의 까만 손등을 할퀴고 간 상처다
빨간 사과밭, 장시고모는 빨간 사과는 눈이 부셔서 따서 먹지 않는다
- 박동규, 「고모는 새가 파먹은 사과만 먹는다」

  이 시는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보는 것 같다. “탱자나무 울타리 위로 빨간 사과들이/꽃처럼 달려 있”는 고향, “빨간 사과는 눈이 부셔서” 따먹지 못하고, “콕콕 새가 파먹은 사과”만 먹는 장시고모는 가난했지만 영혼만큼은 순수했던 우리의 유년시절을 자꾸만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다보면 꽃과의 소중한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시도 있다.

담장 밑에 숨어서 피는 손짓을 한다
저 하늘 꽃구름도 편지를 펼쳐든다
아무렇지도 않게 발끝만 보는 나는
꽃의 사연을 잊고 산다
따뜻한 화로처럼 가슴에 스쳐간 바람소리가
그리운 날이면 알지 못하는 꽃잎은
서러운 사연을 뿌리고 있다.
- 「꽃과의 인연」에 수록된 시

  뿐만 아니라 겨울, 기다림의 계절에 씌어진 「겨울 암울한 회색 안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며칠 뒤에 사라져 버린 죵구에 대한 추억을 그린 「충직한 죵구를 기억하며」, 한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처럼 ‘서로 하나이면서 모두’가 되는 선의의 경쟁을 노래한 「한 팀으로 살기」 등 이번 책에 수록된 그의 시편은 무려 열편이나 된다.

  이처럼 박동규 교수의 신작 에세이를 읽으며 아버지 목월시인과 선한 마음바탕이 꼭 닮은 그의 자작시를 음미해보는 것도 무척 새롭다. 그렇다고 뒤통수를 후려치듯 인생의 감동과 서늘한 영혼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그의 에세이를 절대 간과할 수는 없다.

  사춘기 시절 고향에서의 설렘을 담은 「석류와 왕사탕」을 비롯하여 모자간의 뜨거운 사랑을 체감할 수 있는 「산 사과와 염소」, 아들 용돈을 주기 위해 책보에 싼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셨던 목월 시인의 가족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아버지의 도시락」 등 그의 에세이는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문학과 삶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통섭의 미학을 선사한다.

  곧 맞이할 여름 휴가철, 방구석에 뒹굴며, 또는 여행길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박동규 교수의 수필집을 읽어보자. 어느새 영혼이 맑아지고 가난한 내 마음이 파란 풍선처럼 부플어올라 하늘을 두둥실 날아다니는 환상을 체험할 것이다.

 

 

* 《쿨투라》 2020년 8월호(통권 74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