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영화 - 블레이드 러너 2049] 존재와 이름 그리고 정체성
[2018 오늘의 영화 - 블레이드 러너 2049] 존재와 이름 그리고 정체성
  • 강유정
  • 승인 2018.09.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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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 감독 '블레이드 러너 2049'

  1. 새로운 고전

  <블레이드 러너>는 반드시 봐야 할 SF 영화 추천 목록에 매번 이름을 올리는 작품이다. ‘리플리컨트’라고 불리는 복제인간이 보편화된 미래를 시점으로 한 이 작품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오랜 통념을 바꿔놨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는 손대기 어려운 명품으로 남아 있곤 했다. 다시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과연 전작 이상이 나올 수 있을까 의구심이 먼저 들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전작을 넘어서는 작품이다. 과거 회상 장면에 등장하는 레이첼(숀 영 분)이나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는 전편에 대한 절대적 ‘의존’이라기보다는 ‘계승’을 위한 의미 있는 오마주이자 연결고리가 돼준다. 진화한 AI조이의 모습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경찰 K를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의 건조하면서도 무료한 표정 속의 감정 변화는 놀랍고 감동적이다. 연출을 맡은 드니 빌뇌브 감독은 마치 소설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듯 전작을 깊이 있게 재해석하고 섬세하게 재가공해냈다. 전작의 주제를 뒤집거나 바꾸는 게 아니라 이어받으면서 훨씬 더 심도있는 질문의 수준까지 끌고 가기 때문이다.

  때는 2049년, 리플리컨트들의 자아 정체성 고민을 복제 사업 실패로 여긴 회사는 완전히 새로운 복제인간 사업에 도전한다. 이번엔 인간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복제인간을 개발한 것이다. 그들은 기계들처럼 일련 번호로 불리지만 아무런 거부 반응조차 없다. 영화의 주인공인 복제인간 K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껍데기 인간Skinner이라고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그런 비아냥에 K는 반응하지 않는다. K에게는 자존감이 없다. 모멸하고 비난한다고 해도, 자존감이 없는 K에게 분노가 생길 리 없다. 자존감이란 자아 정체성이 만들어진 이후에야 느껴질 수 있는 어떤 감각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기계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경찰 K는 어느 날과 다름없이 도망간 구세대 리플리컨트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기묘한 상자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자연적으로 탄생한 사람으로 치자면 그 상자는 유골함이었고, 그 유골함에 지금껏 이루기 어려웠던 ‘기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자연 생식이 불가능한 어떤 여성 리플리컨트가 출산을 하던 중 숨졌고, 이는 곧 다른 ‘기적’의 탄생을 암시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워낙 오이디푸스적 서사에 예민하고 유능한 감독이다. 그가 연출했던 <그을린 사랑>이나 <컨택트>는 오이디푸스적 발견으로 이뤄진 고전적 비장미와 비극미로 가득하다.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민한 관객들의 짐작마저 배반한다. 오이디푸스 서사의 진짜 의미, 그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과연 생의 비밀을 간직한다는 것, 그러니까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와 질문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그 질문이 바로 사물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삶을 존재라는 무거운 단어에 걸맞도록 바꾸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도록 말이다.

  언제나 느끼는 놀라움이지만 훌륭한 SF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결국 사람다움에 대한 윤리와 도덕과 만난다. 그 고민의 끝에는 인간, 삶, 죽음에 대한 존중과 고민이 있다. 드뇌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그렇다. 그 철학이 응축된 것이 바로 이름이다. 자신의 이름에 대해 고민하는 것, 멸칭에 고통과 분노를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존감을 가진, 인간의 특성 중 하나기 때문이다.

  2. 자존감과 이름

  영화로도 만들어진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에는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나온다.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피신인데, 영어권인 인도에서 그 이름은 오줌싸개(피싱)와 거의 똑같이 발음된다. 프랑스에서 가장 맑은 수영장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이 이름으로 살다가 피신은 평생 놀림거리가 될 듯싶다. 그래서 소년은 마음먹는다. ‘내 이름을 파이π로 바꾸자’라고 말이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되자, 소년은 “내 이름은 파이야”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잘했어, 오줌싸개”라며 비아냥거린다. 2교시가 시작될 때도 소년은 “내 이름은 파이야”라고 다시 소개한다. 다만, 무한대 숫자인 파이를 한 열 자리 정도 외워서 소개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마지막 수업 시간에는 칠판 가득 파이의 무한대 숫자를 외워 쓰고는, 자신의 이름을 파이라고 소개한다. 그날 이후 아무도 소년을 피싱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오줌싸개는 무한대로 이름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름을 바꾼다는 건 무엇일까?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은 없다. 개명이나 예명, 필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 태어나서 세상에 처음 새겨지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은 곧 운명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원해서, 자기 이름을 선택할 수 없다. 그건 부모도, 국적도, 성별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자마자 자의와 무관하게 갖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이름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 운명을 바꾸려면 적어도 파이의 무한대 숫자 정도는 외워 보는 노력을 해야한다. 그 정도는 해야, 운명과 맞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5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이름과 운명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번 반대로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는 왜 제대로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할까? 즉 누군가 나를 낮잡아 부르거나 아예 나라는 존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면 왜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아픈 걸까?

  가만 보면, 자존감과 인격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이름이다.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 준 부모들은 벌거벗고 태어난 우리를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해준 거의 유일한 사람들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만큼은 바라지도 않지만 결국 우리는 이름의 값을 정당히 대접받기 위해 세상에서 투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세상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말이다. 사랑이라면 그것도 사랑일 것이다. 내 이름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것 말이다. 반대로, 이름이 없어서 즉 무명의 존재라서 세상으로부터 괄시받는 느낌 역시 무척이나 아프다. 그 아픔은 결국 차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더 따갑고 아플 것이다. 

  3. 사랑, 가장 인간적인 것.

  과연 K는 마지막 순간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 K는 창조주의 그림자에 기대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른 채 스스로 너무나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K의 자아 정체감을 느끼게 했다면, 사랑받는다는 그 불확실한 착각도 무명의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만으로 복제인간의 마음이 움직이고 자존감이 만들어진다. 

  스스로를 추방한 오이디푸스처럼 K는 스스로 이방인이 된다. 이방인이기에 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의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 사랑을 갈구하는 순간 K는 유전자 배열만이 인간이 아닌 진짜 인간이 된다. 결국, 사랑이 인간다움의 열쇠라는 것일까?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허약하지만 분명한 증표가 아닐까? 마음이라는 수수께끼, 인간의 존엄과 마음의 실체를 돌이켜 보게 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이다. 


강유정 _ noxkang@hanmail.net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동아일보》 영화평론 입선. 저서로 『오이디푸스의 숲』이 있음. 강남대 교수.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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