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영화 - 문라이트]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힘
[2018 오늘의 영화 - 문라이트]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힘
  • 설규주(경인교대 교수)
  • 승인 2018.09.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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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젠킨스 감독 '문라이트'
ⓒCGV아트하우스

  흑인의 ‘모습’만으로도 은은하게 전해지는 인종 문제

  <문라이트>는 철저히 흑인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아마 ‘니거(nigger, nigga)’일 것이다. 많은 대사 속에서 이 단어는 마치 말버릇이나 일종의 접미어처럼 따라 붙는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금기시되지만 영화 속 흑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흑인들 사이에서 ‘니거’는 욕이 아니라 친밀감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영화에는 백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주요 등장인물의 주변 인물로도, 심지어 길거리 행인으로조차도 백인은 보이지 않는다. 샤이론을 체포하는 경찰, 케빈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 손님 정도가 얼핏 보기에 백인이라면 백인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백인에 의한 명시적인 인종 차별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속 등장인물 간의 모든 상호작용은, 인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흑인과 흑인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인종과 관련된 어떤 불편함 혹은 메시지를 계속 주고 있는 것 같다. 흑인들만 보이는 거리, 흑인 아이들만 다니는 초등학교, 흑인 아이들만 노는 운동장, 흑인 손님만 보이는 패스트푸드점, 흑인 학생과 흑인 교사만 보이는 고등학교 등은 마이애미 어디쯤엔가 속할 이 지역 흑인들이 다른 공동체와 분리되어 따로 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 지역은 마약, 가난, 폭력, 섹스, 무책임, 질 낮은 음식 등이 등장하는 장면과 함께 묘사되면서 자연스럽게 부정적이고 위험한 이미지와 연결된다. 그것은 곧 이 지역 거주자들인 흑인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이처럼 백인과의 눈에 띌만한 마찰이나 긴장 없이도, 흑인이 태생적으로 구조적으로 불리한 환경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인종 문제를 미묘하게 드러낸다.

ⓒCGV아트하우스

  세 개의 이름, 하나의 정체성

  <문라이트>의 영화 포스터에 크게 나와 있는 한 인물의 얼굴은 세 개로 나뉘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그 얼굴이 각각 샤이론의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의 그것임을 알 수 있다. 포스터의 얼굴처럼 영화도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주인공의 연령대에 따라 각각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제목은 주인공의 이름 혹은 별명이면서 각 시기 주인공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1부 [리틀]에서 유년기 샤이론은 리틀Little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별명처럼 샤이론은 작다. 게다가 연약하고 수줍어 보인다. 그리고 ‘게이’라는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한 경험은 샤이론을 더욱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는 아이로 만든다. 후안과의 만남이 일시적으로 샤이론을 두려움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고, 훗날 샤이론의 변화와 성장에 영향을 주는 씨앗으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 시기에 샤이론은 여전히 리틀로 남아 있다.

  2부 [샤이론]에 등장하는 고등학생 샤이론Chiron 역시 리틀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키는 커졌지만 몸은 비쩍 말랐다. 여전히 말수는 적고 겁이 많다. 동료 학생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게이’라고 놀리지만 샤이론은 그러한 괴롭힘에 익숙하다. 때로는 자신을 향한 부당한 말과 행동에 대해 욕을 하며 저항도 해 보지만, 상대방의 위협에 금세 꼬리를 내리고 만다. 그랬던 샤이론이 머지않아 진짜 ‘샤이론’이 된다. 더 이상 리틀이라는 이름이나 이미지에 갇힐 수 없는, 다시 말해서 샤이론을 샤이론이 되게 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표출한다. 거기에는 모두 케빈이라는 친구가 개입되어 있다. 한 번은 케빈과의 접촉을 통해 샤이론 자신의 성적 지향을 처음 발견하고, 다른 한 번은 믿었던 케빈이 행사한 폭력을 계기로 결코 “순하지 않은not soft” 자신의 본성을 드러낸다.

  3부 [블랙]에서 성인이 된 샤이론은 확 달라진 외모를 보여준다. 과거에 리틀이라고 불리며 괴롭힘 당하던 그가 맞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성인 샤이론은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를 가졌고 강한 이미지가 느껴진다. 마약 거래상으로 먹고 사는 샤이론이 그 위험한 현장에서 버텨 내기 위해서는 리틀의 유약함 대신 그런 강인한 모습이 필요했을 것이다. 약물중독으로 인생의 실패를 경험한 샤이론의 엄마는 샤이론이 마약 관련 일에서 손 떼기를 바라며 샤이론의 마음이 자기처럼 어둡지black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샤이론은 블랙이라는 이름과 이미지를 이미 자신과 결부시켜 놓은 것 같다. 샤이론의 자동차 번호판에 새겨진 알파벳의 배열이 BLACK이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샤이론이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어했던 그 폭력 사건 이후 10년 만에 운명처럼 어떤 전화를 받는다.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한 단서는 전화를 건 사람의 목소리나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부른 자신의 별명, 즉 “블랙”이었다.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케빈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10년 만에 다시 케빈에게 블랙이라고 불린 이후, 샤이론은 복잡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샤이론은 세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 것일까? 샤이론은 성장하면서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일까?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샤이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던 요소들이 마침내 분출한 것 같다. 샤이론은 이미 유년 시절에 후안에게 자신이 게이냐고, 자신이 게이인 것을 언제 알 수 있냐고 물었다. 후안은 리틀에게 너는 게이가 아니라고, 그리고 때가 되면 그냥 알게 된다고 일러 준다. 유년 시절부터 친구였던 케빈은 늘 당하기만 하는 리틀에게 넌 순한soft 아이냐고 물었다. 그때 리틀은 자신은 순하지 않다고 답한다. 성인이 된 샤이론이 마약 재활 치료를 받는 엄마를 껴안고 용서하는 모습의 뿌리도 이미 어린 샤이론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리틀은 후안이 자기 엄마에게 약을 파는 것을 확인하고는 실망스러운 듯 후안의 집을 떠나온 적이 있다. 비록 약을 하는 엄마이고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엄마일지라도, 샤이론에게 엄마는 엄마인 것이다. 성적 지향에 대한 인식, 순하기만 하지는 않은 본성,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마음은 모두 원래부터 샤이론의 것이었다. 후안의 표현처럼 “때가 되자” 드러난 것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샤이론은 늘 샤이론이다.

ⓒCGV아트하우스

  마이너 속의 또 다른 메이저와 마이너

  영화 속 학생들의 괴롭힘과 방관을 보면 자기 자신도 어떤 기준으로는 소수자로 차별을 당하면서 왜 또 다른 소수자를 괴롭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각 사람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복합적인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A라는 기준을 적용하면 동질적인 범주에 묶여 유사한 지위를 가질 사람들이, B라는 또 다른 기준으로는 서로 다른 계급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인종’이라는 기준에 따르면, 괴롭혔던 터렐과 괴롭힘 당했던 샤이론은 모두 흑인에 속한다. 자기들끼리 괴롭히고 복수하고 할 것이 아니라, 모두 사회적 소수자로서 오히려 서로 유대감을 갖고 여전히 남아있는 인종 차별적 관행이나 제도 등과 같은 거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마 ‘부’라는 기준으로 볼 때도 그 둘은 모두 하층 계급에 속할 것이다.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손을 잡아야 하는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는 사람을 평가하고 가르는 기준이 그것 말고도 많다.

  ‘인종’이나 ‘부’가 아니라, 예를 들어 ‘신체적 특징’이라는 또 다른 기준을 적용하면 금세 다양한 계급으로 분화될 수 있다. ‘키’나 ‘힘’과 같이 흔히 남성들의 무리 속에서 더욱 중시되는 것들을 기준으로 하면 키가 작고 힘이 약한 샤이론은 아래 계급으로 밀려나고 결국 놀림의 대상,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 ‘성적 지향’이라는 기준도 마찬가지다. 샤이론은 유년 시절부터 게이라고 불리면서 놀림감이 되었고 고등학교에서도 그러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남자인 샤이론이 생리대 바꾸는 걸 잊었다며 놀림 받을 때 여학생들은 그러한 농담에 대해 불쾌해하거나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식거리며 그 비웃음에 동조한다. 이는 곧 게이가 가장 낮은 계급의 하나로 취급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렇게 보면 인종이나 부의 측면에서 모두 소수자에 속하는 흑인이 흑인을, 빈곤층이 빈곤층을 괴롭힌 것이 아니다. 소수자가 소수자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메이저가 마이너를 괴롭힌 것으로 볼 수 있다. 폭력과 괴롭힘을 기획한 터렐도, 그것을 방관한 다른 학생들도 모두 인종이나 부가 아닌 다른 기준, 즉 힘이나 성적 지향의 측면에서는 메이저에 속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은 흔하다. 학연이면 학연, 지연이면 지연 등으로 기껏 동일한 범주를 만들어 놓고도 그 안에서 다시 직업, 성, 외모, 아파트 크기 등으로 서열을 매기고 계급을 갈라 메이저와 마이너를 구분하고 있지 않은가? A라는 기준으로 메이저인 사람이, B라는 기준으로는 마이너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러한 구분은 지극히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것인데도 말이다. 샤이론 역시 그 허수아비 같은 기준 때문에 마이너 속의 또 다른 마이너가 되어 고통을 겪어야 했다.

ⓒCGV아트하우스

  샤이론 속의 후안, 후안을 닮아가는 샤이론

  샤이론과 후안의 만남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연 같기도 하고 인연 같기도 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후안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사되었다. 후안은 왜 첫 만남에서부터 일부러 수고를 감내하며 리틀에게 다가갔을까? 그리고 왜 그리도 리틀을 챙겨 주었을까?

  일단, 이것을 흑인들 사이에서 자주 나타나는 일종의 흑인 공동체로서의 연대감 같은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당사자 간의 개인적인 친분이 없더라도 고통스러운 경험을 가진 선조를 공유한다는 점, 그리고 단지 과거의 역사뿐 아니라 여전히 현실 곳곳에서도 차별 받는 경험을 공유한다는 점이 그러한 유대감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어떤 인종 문제를 전제로 한 유대감은 아닌 것 같다. 괴롭힘 당하는 리틀뿐 아니라 괴롭히는 아이들도 흑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혹은 후안이 그저 시간 많은 ‘오지라퍼’ 정도였기 때문에 리틀의 삶에 개입한 것일까? 후안은 직업, 돈, 차, 집, 애인 등을 가지고서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가끔씩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등장하는 장면들을 보면, 후안이 그저 어느 아이들에게나 마음씨 좋은, 오지랖 넓은 아저씨라서 이번에는 (우연히) 리틀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기보다는, 리틀이라는 ‘바로 그 아이’에게서 후안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후안과 리틀에게서는 몇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우선, 둘은 키가 작았다. 후안은 리틀에게 수영을 가르쳐 준 이후 대화를 나누면서 “나도 너처럼 옛날에 키가 작았다.”고 말한다. 키가 작은 리틀은 유약했고 괴롭힘을 당했다. 마약 거리를 달려 지나갔던 여러 흑인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 중 유독 겁에 질린 채 쫓기고 숨어 있어야 했던 리틀에게 후안이 손을 내민 것은 어쩌면 키가 작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은 아닐까.

  다음으로 두 사람은 엄마를 싫어했다. 리틀은 후안에게 엄마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후안은 자신도 엄마가 싫었다고 말한다. ‘성인’이 아니라 ‘아이'가 엄마를 싫어한다고 말할 때는 엄마가 무슨 도덕적 결함이나 나쁜 짓을 해서라기보다는, 아이가 아이로서 엄마에게 당연히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 할 때이다. 어쩌면 후안의 엄마 역시 어떤 이유로 어린 후안이 엄마를 필요로 할 때 그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후안 역시 엄마를 싫어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과 닮은 리틀에게 후안은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을 수 있다. 그리고 후안은 샤이론의 아빠가 아닌데도 왠지 아빠 같은 느낌을 주고 아빠같은 역할을 한다. 용돈을 쥐어 주고 몸소 시범을 보이며 수영을 가르쳐 준다. 집에 드나드는 사람을 볼 수 있도록 현관문을 향해 앉도록 일러주며 언젠가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때로는 깨알 같고 때로는 굵직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후안이 어린 샤이론에게 해준 조언은 훗날 일종의 예언처럼 샤이론의 삶에서 실현이 되어 간다. 그리고 샤이론은 어느덧 후안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후안처럼 검은 두건 모자를 쓰고, 후안처럼 자동차에 왕관 장식을 달고 다니고, 후안처럼 기다란 금목걸이를 하고 다니고, 무엇보다도 후안처럼 마약상을 한다. 마치 아빠의 습관을, 아빠의 일을 물려받듯이. 샤이론은 그렇게 성장해 간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샤이론

  후안은 리틀에게 때가 되면 스스로 뭐가 될지 결정해야 한다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결정을 대신해 줄 수 없다고 가르쳐 주었다. 리틀이 그 말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웠지만, 후안이 말한 그 ‘때’가 정말 왔다. 터렐과 그 무리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후 그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아 주기로 한 결정은 샤이론의 학교생활을 끝내 버릴 수도 있는,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의 일상을 완전히 뒤바꿀 만큼 중대한 것이었다. 그 순간 그 결정은 오롯이 샤이론의 몫이었다.

  샤이론의 성장과 변화가 눈물겨운 것은 자신을 괴롭힌 학생을 응징하기로 결심하고 실행하는 그 순간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는 점이다. 리틀이라 불리던 유년 시절에 홀로 먼 길을 걸어 그의 집을 찾아갈 만큼 의지했던 후안은 이미 죽고 없었다. 유일한 피붙이인 엄마는 마약에 빠져서 샤이론을 돌봐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용돈마저 빼앗아갈 정도였다. 불과 얼마 전 자신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며 미묘한 느낌을 주고받았던 케빈은 비록 스스로의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에게 주먹을 날린 사람이었으니 그 배신감과 충격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사나 다른 학생들도 샤이론에게 힘이 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터렐 무리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나서 샤이론 홀로 차가운 얼음물에 얼굴을 담갔다가 막 꺼낸 후 굳은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본 것이 전부였다. 할 수만 있으면 자기 자신하고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샤이론,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샤이론은 자신의 결정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자신이 더 이상 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 폭력과 배신을 경험하고 난 후 충격에 의한 충동적 행동이라기보다는 이미 유년 시절부터 적어도 자신은 알고 있었던, 혹은 바라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 즉 순한 사람이 아니라 단단하고 거친 사람임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고등학생 시절 샤이론이 케빈과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언급했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안 되는 많은 것”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말이 안 되는 이유는 아마 그 스스로도 자신이 해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몸짓’에서 ‘꽃’으로, 그리고 자기 결정으로

  후안을 만나기 전까지 어린 샤이론은 그저 크고 작은 수많은 흑인 아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위험과 범죄에 노출된 동네에 살며 흑인 아이들이 전 부인 학교에 다니며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사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흑인 남자 아이의 모습이다. 김춘수의 <꽃>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그저 ‘하나의 몸짓’일 뿐이었다. 후안과 테레사는 그 ‘몸짓’이 ‘꽃’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후안은 샤이론이 혼자만의 은신처에 머물지 않도록 그를 이끌어냈다. 후안의 여자 친구 테레사는 문자 그대로 샤이론을 샤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했다. 리틀이라는 별명 대신. 샤이론의 외모나 성격, 처한 환경이 어떻든 샤이론은 샤이론 외에 다른 존재일 수 없음을, 그리고 샤이론 자신이 가진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함을 후안과 테레사는 가르쳐 주었다.

  10년 만에 케빈을 다시 만난 샤이론은 날 만진 사람은 네가 유일했다고 말한다. 10년 전의 그 터치touch는 샤이론에게는 단 하나의 특별함이었다. 샤이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한 터치였다. 그렇게 강렬한 터치였기 때문에 케빈이 샤이론에게 넌 누구냐고 물었을 때 샤이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나”라고 답할 수 있었다. 케빈은 근육질로 변해 버린 샤이론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고, 마약상이라는 그의 직업, 금속이빨이나 자동차 등이 예전의 샤이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샤이론은 자신의 겉모습과는 상관없이 본모습은 그대로임을 표현한다. “나는 나”라는 말로.

  아무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샤이론은 샤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샤이론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샤이론은 흑인이고, 샤이론은 성 소수자고, 샤이론은 마약 거래상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샤이론이 가진 조건이자 액세서리이지 샤이론의 본질은 아니다. ‘꽃’으로서, 고유한 존재로서 샤이론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나”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을 방치했던 엄마를 용서하는 것도, 마약상이라는 위험한 일을 자신의 직업으로서 유지하는 것도, 케빈에게 과거 그 터치의 의미를 알려주며 다시 찾아온 케빈과의 기회를 붙잡는 것도 모두 샤이론의 결정이다. 그것은 후안이 어린 샤이론에게 “네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했던 말, 그리고 고등학생 샤이론이 케빈에게 “말이 안 되는 많은 것을 하고 싶다”고 한 말이 마침내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라이트>는 흑인이면서 게이라는 이중적인 사회적 소수자의 애환을 전시하거나 그들의 삶을 괴롭히지 말라고 계몽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한 아이가 숱한 대가와 고통을 치르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자기 결정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우리 삶의 보편적 모습을 담아낸다. 그래서 <문라이트>는 특수해 보이면서도 보편성을 띤다. 고유함 속에서도 보편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케빈의 말처럼 “그게 인생”이니까.


설규주 _ qzoos@hanmail.net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 학사, 석사, 박사 졸업.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음.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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