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일본의 벚꽃 여행
[벚꽃] 일본의 벚꽃 여행
  • 김응교(시인,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 승인 2023.04.03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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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하도록 벚꽃 꽂송이가 흩날리는 저 장면이 가능할까. 거짓말 아닐까. 거짓말이겠지. 아니면 과장된 장면일 거야. 어쩜 저리 까닭없이 쏟아질 수 있을까.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1995) 앞부분에 벚꽃잎이 흩날리는 등굣길 씬을 보고 나는 믿을 수 없었다.

1996년 2월에 일본에 유학 가서 4월 첫 학기가 시작되던 어느날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체험했다. 어느 날 밤, 눈이 내리나 싶게 흰 것들이 펄펄 쏟아지는데 바로 벚꽃 꽃송이들이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 〈4월 이야기〉(1998)에 나오는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벚꽃잎이 쏟아지는 장면은 거짓이 아니었다.

벚꽃さくら과 물내음에 취해서 나는 벚꽃이 만개한 에도가와 동네로 이사해서 십여 년을 살았다. 내가 살던 동네는 오하시大橋부터 시모메구로下目黒까지 4킬로 정도 벚꽃이 늘어선 꿈길 동네였다. 양쪽에 벚꽃이 늘어선 메구로강目黒川의 물내음을 맡으며 꽃구경과 함께 쇼핑과 라멘을 즐기며, 걷고 하냥 걸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3월 말에 도쿄에 간다면, 우리로 말하면 지하철 2호선이라 해야 할까, 도쿄를 순환하는 야마노테선 다카다노바바 역에서 내려 이 코스를 즐기시기 바란다.

꽃으로 인해 일본의 봄은 눈 아리다. 흰 벚꽃, 에메랄드 벚꽃, 옥빛 벚꽃으로 한참 벚꽃 아래 있으면 몽롱한 기분까지 든다.

3월 말부터 일본 전역에 벚꽃이 피어난다. 벚꽃 여행에 한번 취하면 꽃이 개화하는 시기에 가만히 집에서 머물 수 없다. 일본인은 벚꽃을 보며, 다가오는 봄을 기뻐하며 맞이하는 것을 하나미花見, はなみ라고 한다. 우리말로 꽃놀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미는 중세시대에도 영주나 사무라이들이 즐기던 연례행사였다. 밤에 즐기는 하나미, 밤벚꽃놀이를 ‘요자쿠라夜桜를 본다’고 한다. 

매년 연초에는 일본 기상청에서 지역마다 벚꽃이 피는 개화예정일을 ‘사쿠라 전선桜前線’이라는 선으로 표시하여 발표한다. 올해 2023년 일본 본토에서 벚꽃을 가장 일찍 알리는 곳은 도쿄와 후쿠오카로 모두 3월 21일에 개화하여 도쿄는 3월 29일, 후쿠오카는 4월 2일에 만개한다고 일본 기상청은 보도했다. 가장 늦은 삿포로는 4월 29일에 개화하여 5월 2일에 만개한다. 한 해의 가장 늦은 벚꽃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당연히 홋카이도에 가야 한다. 4-5월의 홋카이도는 벚꽃의 섬이고, 12-2월의 홋카이도는 눈의 섬으로 그야말로 환상 자체다.

도쿄에서는 단연 에도시대 초기부터 벚꽃길이 펼쳐진 우에노공원上野恩賜公園에서 즐기는 ‘하나미’를 빼놓을 수 없다. 시즈오카로 가면 후지산을 배경으로 한 벚꽃을 찍을 수 있다. 관서 지역에서는 오사카성 공원大阪城公園의 ‘하나미’가 아름답다고들 하는데, 나는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현대판 오사카성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우라가 사라져 버려, 별로 감흥이 없다.

관서지역에서 ‘하나미’를 볼 수 있는,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은 단연 히메지성姫路城이다. 처음 히메지성에 ‘하나미’를 보러 갔던 날, 나는 며칠 동안 꿈에 흐드러진 벚꽃에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히메지성의 환상에 빠지기까지 했다. 조명이 켜지는 야간에 보면, 오사카성과 비교할 수 없는 중세시대 그대로의 아우라가 압권이다.

2023년 1월에 돌아가신 은사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과 해마다 4월이면 가마쿠라나 교토 등지로 벚꽃 여행을 다니곤 했다. 벚꽃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에게 벚꽃은 인간존재론을 상상하게 한다.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은 벚꽃의 환상에 취한 나에게 일본인은 벚꽃을 보면 ‘죽음’을 떠올린다고 말씀하셨다.

사쿠라가 만발할 때 술 한 잔 들고
사쿠라가 질 때 함께 죽노라
- 하이쿠의 한 구절

두 주 정도 만개해 있다가 어느날 비가 내리면 한꺼번에 길가에 떨어져 짖물려 질퍽이는 벚꽃을 보면 당연히 ‘죽음’이 떠오른다. 이 지점에서 벚꽃은 미화된 죽음을 상징하기도 했다. 아름답게 미화된 죽음. 대의를 위해서는 죽어도 된다는 이미지가 벚꽃에 숨어 있다.

많은 가지에 가득 찬 사쿠라와 군복 깃의 색깔
사쿠라는 요시노 산에 피고 있는데 바람이 세차게 분다.
일본 남아로 태어났으면
싸우는 전쟁터에서 사쿠라처럼 져라
- 일본 구 육군 보병가

일본과 ‘천황’을 위해 사쿠라처럼 목숨을 던진 이들이 신으로 전시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의 벚꽃은 비극적으로 아름답다. 피고 지는 사쿠라는 일본인이 전통적 미덕으로 여겨온 사무라이의 기질을 보여준다. 태평양 전쟁에서 목숨을 던진 카미카제의 비극도 읽을 수 있다. 진퇴進退가 분명하고 목숨을 던질 때는 ‘아싸리’ 던져야 한다는 사무라이와 카미카제의 룰은 벚꽃의 피고 짐과 비슷하지 않나.

올해도 3월 말이면 일본 전역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벚꽃이 만개할 것이다. 4월 1일부터 시작되는 신학기와 새 회계 연도의 풍경도 하얗다. 신입생들 교복의 하얀 칼라, 신입 사원들의 희디흰 와이셔츠, 은은한 핑크빛 바탕에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눈부신 사쿠라의 잔치가 펼쳐진다.

저 아름다운 사쿠라가 죽음을 미화하는 꽃이 아니라 서정적 아름다움으로만 빛나기를, 벚꽃을 좋아했던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이 영원한 벚꽃에 취하시기를, 나는 이 봄날에 손 모은다

 


김응교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으로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 『씨앗/통조림』과 세 권의 윤동주 이야기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나무가 있다-윤동주 산문의 숲에서』 『서른세 번의 만남-백석과 동주』, 평론집 『좋은 언어로-신동엽 평전』 『그늘-문학과 숨은 신』 『곁으로-문학의 공간』 『시네마 에피파니』 『일본적 마음』 『韓國現代詩の魅惑』(東京: 新幹社) 등이 있다. 번역서로 다니카와 슌타로의 『이십억 광년의 고독』, 양석일 장편소설 『어둠의 아이들』 『다시 오는 봄』, 오스기 사카에의 『오스기 사카에 자서전』, 일본어로 번역한 고은 시선집 『いま、君に詩が來たのか: 高銀詩選集』(사가와 아키 공역, 東京: 藤原書店, 2007) 등이 있다. 현재 숙명여대 교수, 신동엽학회 학회장으로 있다.

 사진 원태희

 

* 《쿨투라》 2023년 4월호(통권 1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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