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 미장센의 승리: 〈별들의 고향〉 50주년에 부쳐
[이장호 감독] 미장센의 승리: 〈별들의 고향〉 50주년에 부쳐
  • 방민호(문학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교수)
  • 승인 2024.03.2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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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이장호 감독과 지인들이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고 최인호 작가의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장호

모두 알듯이 이장호 감독과 작가 최인호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이장호 감독이 1972년 당시 장안의 지가를 올린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이 동창의 권리로써 영화 제작 판권을 얻어낸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두 예술가의 동반자적 관계는 최인호가 불행히 이르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이장호 감독의 초기 영화 〈별들의 고향〉과 〈어제 내린 비〉의 두 작품이다. 〈별들의 고향〉은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고 〈어제 내린 비〉는 최인호의 또 다른 문제작 『내 마음의 풍차』를 작가 김승옥의 각색을 거쳐 영화화한 것이다.

최인호의 소설이 빨리, 널리 알려진 만큼, 신상옥 감독의 그늘 밑에서 잡일을 이어가던 이장호 감독의 성공은 친구의 덕택으로 이야기 되곤 했다. 이장호 감독 또한 여러 곳에서 같은 뜻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영화의 성공은 그렇게 단순하게 많은 논단될 수 없을 것이다.

1950-1970년대 영화를 보면 세계적으로 소설에 원작을 둔 것이 많다. 그런데 이들 영화들은 대부분 원작 소설 전체를 영화로 옮긴다기보다는 그 일부를 옮기거나, 전체의 줄거리에 해당되는 부분만을 옮겨놓은 듯한 양상을 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영화는 보여주는 예술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소설이 보여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기가 어렵다. 이것이 영화의 어려움이고, 바로 그 때문에 영화는 소설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옮겨놓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언제나 영화의 원천으로 작용해 왔고 특히 1950-1960년대 영화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 시대의 영화들은 소설 원작의 깊이나 넓이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최인호의 소설이 어떤 문학사적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충분한 논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별들의 고향』만 해도 단적으로 그런 예의 하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아예 읽지도 않은 사람들은 이 소설을 그 시대의 흔한 통속극 정도로 치부하고 만다. 그러나 이 소설을 가리켜, 보다 낫게, 도시가 망쳐놓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라 한다 해도 이 작품의 비밀을 다 풀어헤쳤다 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작중 미술학도 문오와 경아가 서로의 분신임을 독자들에게 반복해서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문오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경아의 희생을 딛고서야 세속적 삶의 메커니즘 어느 한 귀퉁이에 자기 실존의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이야기가 된다.

화천공사 제공.

이렇게 작중인물들이 일종의 ‘더블’, 분신적 존재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최인호 소설의 하나가 바로 『내 마음의 풍차』다. 이 소설이 단행본으로 출간될 때 감동어린 해설을 붙인 김병익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형과 아우를 “동전의 양면”이라 갈파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사실은 “더블”이다. 이 소설은 영후 영민, 두 배다른 형제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첩’에게서 낳은 아들인 영후는 고등학생이 된 후에 아버지가 본처와 함께 사는 집에 들어간다. 이 집에는 원래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월남전 나가서 죽고, 외출하지 않고 장난감 도시를 만들어 놓고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동생만 있다. 이야기는 배다른 형 영후의 내레이션으로 이끌어지는데, 영후는 이 집의 모든 것을 다 훔쳐버리겠다고, 파괴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 끝에 가면 영후는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친어머니가 혼자 살아가는 ‘원래’의 집으로 돌아간다. 하나, 달라진 것이 있는데, 이는 한명숙이라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그 집으로 초대하면서라는 점이다.

작중의 영후와 영민을 분신적 존재로 본다는 것은 두 인물이 자아의 서로 다른 두 측면, 곧 사회에의 욕망을 품는 방향(영후)과 자기 안에 안존하려는 방향(영민)을 각기 의인화하여 인물 성격화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자아의 두 측면을 각기 보이는 인물로 성격화 한 소설이 바로 『내 마음의 풍차』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작업이 된다.

〈별들의 고향〉에서도 양상은 꼭 같다. 문오는 시골 바닷가 태생의 미술학도인데 서울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그림(예술)에 집중하지 못한 채 술집에 가서 술이나 마시고 여자와 함부로 자는 나날을 보낸다. 그런 그의 앞에 경아라는 아주 귀여운 여성이 나타나는데, 그녀는 이미 각기 부여된 역할이 다른 세 남자를 거쳐 온 후다. 자신의 아이를 갖게 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리는 책임감 없는 남자, 가부장적인, 의처증을 앓는 남자, 술집 포주 같은이 난폭한 남자가 그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경아를 가리켜 『별들의 고향』의 내레이터 역할을 맡은 문오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라고 거듭해서 말한다. 매우 통속적인 술집 여자로 ‘분장’하고 나타나기는 하지만 경아는 도시에 의해 훼손되는 순수한 자아를 가리키며 문오는 이러한 자아를 예술로써 구제하고자 하는 자아를 가리킨다. 도시를 살아가는 자아의, 이 두 측면은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지향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문오가 경아의 희생 과정을 끌어안고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는 존재로 ‘정상화되는’ 과정은 이렇게 자아의 어떤 측면이 훼손되고서야 인간은 서울로 표상되는 대도시의 존재로 적응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국제영화흥업주식회사 제공.

요컨대,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과 『내 마음의 풍차』는 이렇듯 공히 자아의 두 측면을 의인화하여 이들에 각기 다른 인격성을 부여한 독특한 알레고리 소설들이다. 이 소설들 속의 사건과 행위는 아주 일상적인, 리얼리스틱한 ‘의장’을 띠고 나타나지만 실은 어떤 지시성을 내포한다는 뜻이다.

이제 영화 감독 이장호의 차례다. 먼저 〈어제 내린 비〉 쪽부터 보면, 이장호 감독은 이를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1951) 같은, 도시로 간 젊은이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었다.

원래 “젊은이의 양지”는 시어도어 드라이저Theodore Dreiser(1871-1945)의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American Tredegy』(1925)과 그 연극(1931)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다.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 영화는 비극적이다. 큰 도시로 간 시골 청년이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다 자신의 아이를 갖게 한다. 그러나 곧 상류 계급의 아리따운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출세의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죽이고 결국은 체포되어 사형을 면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대작 『아메리카의 비극』은 영화로 재탄생하는데, 여기서 원작의 앞 부분은 대부분 ‘잘려 나가고’ 전체 이야기의 절정에 해당하는 대목‘만’이 스크린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효과는 아주 극적이다.

〈어제 내린 비〉 국제영화흥업주식회사 제공.

이장호 감독의 〈어제 내린 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라스트신’이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민정’과 아주 죄없는 배다른 동생 ‘영욱’이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 다리에서 추락해 폭발사고로 죽어버린다. 뒤늦게 민정의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직감한 영후는 격분하며 떠나버린 영욱과 민정의 자동차를 뒤따라 달려간다. 하지만 자동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이를 따라잡으려는 영후의 달리기는 영화의 첫 시작부터 계속된 달린다는 이미지의 연속선상에 있다. 첩의 아들로 이 사회의 그늘에서 자라난 영후는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새벽마다 달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승부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패배주의자다. 이 영후가 아버지의 본처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사건은 처음에는 그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이런저런 사건들에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가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동차를 타고 떠나버린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계속해서 달려가는 영후는 이윽고 어두운 터널 속에 들어선다. 카메라는 이 영후가 터널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롱쇼트의 롱테이크로 잡아준다. 영후를 다그치는 “돌아보지 말라”는 엄한 목소리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려는 영후의 귓전을 때린다.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가라는 것인데, 이렇게 라스트 신이 정리됨으로써 영후의 미래는, 배다른 동생 영욱과, 원래 소설에서의 ‘명숙’과는 달리, 영욱의 약혼녀로 나타났던 ‘민정’의 죽음을 뒤로 하고, 그들이 없는 아버지의 집을 차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작중에서 이미 영후의 어머니는 ‘첩’ 생활을 청산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해버리기 때문에 이제 영후에게는 어떤 남은 ‘과거’가 있을 수 없다. 미국영화 〈젊은이의 양지〉에서와는 달리 〈어제 내린 비〉의 영후는 자신의 애인과 배다른 동생이 죽음으로 ‘내몰린’ 뒤에도 살아남아 삶의 나머지 여정을 달리게 될 것이다. 감독 이장호는 소설을 할리우드 풍이 묻어나는 ‘젊은이의 음지’로 ‘개작’한 것이다.

〈별들의 고향〉 화천공사 제공.

〈어제 내린 비〉가 할리우드 풍이라면 〈별들의 고향〉은 완연 멜로물 풍이다. 여기서 원작의 문오는 또 다른 주인공이 되기를 ‘포기하고’ 오경아의 비극을 따라가는 충실한 관찰자가 된다. 아니, 신성일 분이니만큼 문오 또한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로되, 소설에서와는 달리 하나의 자아의 분신으로서의 주인공이 아니라, 경아의 비극적인 삶을 지켜보는 충실한 관찰자적 주인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역시 오경아(안인숙 분)다. 문오(신성일 분)는 소설에서 대학생으로 나타났던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 이미 꽤나 성숙한 화가로 등장한다. 이미 성장을 거쳐 현실세계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신성일’은 술집에서 일하는 말괄량이 ‘안인숙’을 자신의 세계 속에 품었다가 다른 남자들처럼 그 바깥으로 내어버리는 존재다. 스물다섯 살의 경아를 그녀의 옛날 남자 품으로 떠나보내고, 문오는, 서울을 떠났다 돌아와 술을 끊고 후배 양성에나 전념하겠다는 생활인으로 정착한다. 이 사태에 이르러 경아는 마침내 삶의 의욕을 잃고 죽음을 향한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몹시 아름답다. 화면 가득 펼쳐진 하얀 눈 들판이며, 이 눈 들판 위를 옛일들, 옛 남자들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걸어가는 경아의 모습, 이 풍경을 함뿍 받아내며 흐르는 음률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다.

실로 〈별들의 고향〉의 영화로서의 독자성, 감독 이장호의 거장으로서의 면모는 실로 이 마지막 장면에 응축되어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잦은 플래시백flashback과, 이야기의 배경에 간단없이 흐르는 음률과, 그 이전의 영화들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을 컬러 색조의 감각으로 관객들을 마지막 장면에까지 능숙하게 실어나른 감독은 이 처연하다 못해 처절한 장면에서 관객들을 녹아웃시켜 버린다. 이 비극적 장면의 연출 앞에서 관객들은 경아의 비극적 생애와 이른 죽음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소설의, 음악의 승리가 아니요 ‘미장센’의, 감독의 승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방민호 1965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창작과 비평》 제 1회 신인 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 평론집으로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 『행인의 독법』 『문명의 감각』 『납함 아래의 침묵』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가 있다. 2001년 《현대시》로 시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 『숨은 벽』 『내 고통은 바닷속 한방울의 공기도 되지 못했네』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2012년 《문학의 오늘》에 「짜장면이 맞다」를 발표하면서 소설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대전스토리, 겨울』 『연인 심청』이 있으며 창작집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이 있다. 산문집으로 『서울문학기행』 『명주』가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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