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물줄기와 이장호의 행보: 〈바람 불어 좋은 날〉, 〈과부춤〉, 〈어둠의 자식들〉
[이장호 감독]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물줄기와 이장호의 행보: 〈바람 불어 좋은 날〉, 〈과부춤〉, 〈어둠의 자식들〉
  • 문학산(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교수, 영화평론가)
  • 승인 2024.04.0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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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좁쌀에서 시작하여 끝은 공룡처럼 창대해진다. 반대로 출발은 잠실 종합운동장의 주경기장에서 비롯되었지만, 결승점은 이름없는 골목의 막다른 길에서 끝나는 레이스도 있다. 전자와 후자의 중간은 출발을 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중간에 내리막길을 치닫다가 나중에는 다시 정상으로 오르는 상승과 하강의 곡선운동이다. 이장호의 행보는 정상에서 출발하여 깊은 계곡으로 추락하였다가 다시 수직으로 상승하여 정상을 밟고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을 걷다가 다시 정상을 향하는 곡선의 궤적을 보인다.

1965년 메이저 영화사 신필름 입사와 1974년 〈별들의 고향〉의 성공으로 첫 출발점이 정상을 찍었다. 대마초 흡연 혐의로 감독직 박탈은 추락의 끝을 입증하였다면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로 복귀는 다시 정상을 향하는 걸음을 보여준다.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은 상승 곡선에 자리하거나 능선을 밟고 전성기의 완만한 곡선을 그어나간다. 이장호의 산업적, 작가적 행보가 정상과 바닥의 왕복운동에 가깝다면 작품의 경향은 리얼리즘과 멜로드라마를 기반으로 한 에로티시즘 자장 사이에서 파동한다.

1974년 4월 개봉한 〈별들의 고향〉의 흥행은 1970년대의 청년문화와 신파성이라는 시대 분위기를 흡수한 에로티시즘과 멜로드라마의 합작품이다. 유신시대에 감독직에서 박탈되고 1979년 12월에 복직되어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충무로에 귀환하면서 동시에 1980년대 한국 리얼리즘의 새로운 좌표를 찍었다. 1970년대 지배문화는 〈별들의 고향〉의 문오와 경아가 만났던 카페에서 들었던 통기타 음악과 그들이 입은 청바지 그리고 낭만적 청춘이었다면 1980년대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도시노동자가 주인공인 민중이라는 새로운 계급의 울분과 저항을 탑재한다. 부상하는 민중문화는 한국 영화에 수혈되어 리얼리즘과 민중영화로 명명된다.

화천공사 제공.

1970년대 청년문화는 〈바보들의 행진〉(1975), 〈영자의 전성시대〉(1975)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영상시대라는 에꼴을 결성하여 예술로서의 영화를 사유했다. 영화 외곽에는 한글세대 젊은 비평가인 문학주의자 김병익, 김현이 이끄는 《문학과지성》 편집위원 그룹이 한 날개를 이루고 다른 날개는 민중주의를 실천하는 염무웅, 백낙청의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이 포진했다. 문학주의와 민중주의의 학익진에 의해 이장호 감독은 지적인 열매를 섭취하고 염무웅의 저서 『민중시대의 문학』(창작과 비평, 1979)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염무웅은 “훌륭한 예술작품의 놀라운 점은 그것이 작가로부터 나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작가가 살고있는 사회현실 자체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는 리얼리스트이면서 민중주의자였다.

1980년대 담론 앞 자리에 민중과 민족이라는 명사가 늘 자리했다. 민중영화는 동시대 한국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어 사회변혁을 이끌어야 한다는 당위의 문장에 충실하였다. 이장호 감독은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으로 성실히 화답하였다. 소설가 이문구와 소설가 송기원이 화성에서 작업실을 마련할 때 그곳을 방문한 이장호 감독은 ‘농촌의 실상과 농민들의 살아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새로운 연출 방향에 눈을 뜬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새로운 바람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는 제목이지만 원작은 최일남의 소설집 『춘자의 사계』에 수록된 중편 「우리들의 넝쿨」이다. 덕배, 춘식, 길남은 서울 변두리에서 중국집 배달원과 이발소 종업원 그리고 여관 종업원으로 살아가면서 사랑하고 꿈을 키우다 좌절하는 서울 주변부 사건을 담아낸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변혁의 열기로 들떠있던 한국사회에 영화에서 도시노동자 청년세대를 중심인물로 부각하여 동시대 군상을 직격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정신에 부합한다. 이 작품은 1980년대 한국영화가 1970년대와 결별하는 일종의 선언문 같은 영화였다. 1970년대 청년 영화의 유효기간이 지나고 민중 현실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고 타파하려는 리얼리즘 영화가 소환되었다. 1970년대에 위축된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계보가 민중영화의 호명을 통해 1980년대 리얼리즘 영화의 물길을 터놓게 된다.

화천공사 제공.
화천공사 제공.

1960년대 한국 리얼리즘은 유현목의 〈오발탄〉(1960)을 경유하여 이만희의 〈삼포가는 길〉(1975)로 이어지면서 1980년대 〈바람 불어 좋은 날〉과 1990년대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으로 이어진다.

노동자가 주인공으로 부상한 것은 한국영화의 변화의 바람이며 이장호 감독의 관심은 기층 민중의 생활이 도시 중산층의 생활보다 우선시된다. 이와 같은 행보는 최인호의 소설 세계에서 이철용의 르포스타일 작품으로 이동과 궤를 함께 한다. 이철용은 도시 빈민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체화하여 르포에 가까운 작품을 집필하였으며 흥행소설 『어둠의 자식들』을 원작으로 한 〈어둠의 자식들〉(1981)로 확장된다. 〈어둠의 자식들〉은 서울역 부근의 집창촌을 로케이션 장소로 촬영하였으며 나영희를 캐스팅하여 ‘카수 영애’의 신산한 개인사를 집약하여 한국에서 타자인 성매매 노동자의 생존 투쟁을 핍진하게 담아낸다. 가수 영애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등장하여 성매매 노동자의 생활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문제를 반영하거나 항변하거나 가족주의로 봉합한다. 〈어둠의 자식들〉은 한국사회의 모순을 반영하는 것에 충실하며 구조적 모순의 타파를 위한 실천적 노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관객의 성찰에 맡기고 있다. 변혁 의지보다 현실의 반영에 충실한 이장호의 입장은 〈과부춤〉의 도시 변두리 과부들의 생활로 확장된다. 〈어둠의 자식들〉과 〈바람 불어 좋은 날〉의 한국리얼리즘 정신의 복원과 1980년대 이후 한국 리얼리즘의 흐름에 덧붙여 간과하면 안 되는 부분은 마당 정신의 영화적 수용과 복수의 주인공들이 견인하는 다층적 서사 형식으로 선취한 새로운 형식의 창출이다. 〈과부춤〉은 도시 변두리 서민들의 다층적인 삶에 카메라가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첫 장면에서 손의 클로즈업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의 거대한 손 클로즈업의 전조로 주목된다. 〈과부춤〉에서 홍말숙(이보희 분)은 위장결혼 상담소를 통해 사기 행각을 벌이다 본인이 경찰의 함정에 빠져 구속되고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자기 함정에 매몰된 인물이다. 도시 변두리의 산동네의 풍경과 여기에 걸맞은 그들의 가난한 삶이 핍진하게 프레임에 담긴다. 음악은 서양음악과 국악이 공존하고 환경미화원 동식의 부친은 교통사고를 당해 승천하는 장면은 꿈을 통해 여행을 떠나는 장면으로 몽타주한 것은 이장호의 영화언어에 대한 독창성이 돋보인다.

화천공사 제공.
화천공사 제공.

이장호의 리얼리즘은 한국현실의 반영에 충실하는 것보다 실험적 형식을 통해 예술의 장을 개진한다는 점에 독창성이 자리한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세 인물은 상경한 도시노동자이며 〈과부춤〉의 말숙과 동식 모친은 도시 빈민층이며 〈어둠의 자식들〉의 가수 영애와 성매매 노동자들도 세상에 내몰린 인물들로 민중 계급을 대표한다. 민중 영화를 지향하지만 생경한 현실 반영과 변혁의 의지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 지향성보다는 마당 영화의 개방성과 몽타주 형식을 통해 예술적 표현과 발언에 무게중심을 둔다.

이장호의 리얼리즘은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적자이면서 동시에 1980년대 이후 현실반영의 책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화 형식의 개방적 실험과 실천을 통한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층위를 두껍게 한다. 1980년과 1990년으로 이어지는 한국 리얼리즘은 이장호 감독의 작품을 매개로 하여 그 물길이 넓어지고 코리안 뉴웨이브의 현실 반영의 엄숙주의를 무력화하고 형식적 전위주의를 접목하였다. 이장호의 청년문화와 1980년대 리얼리즘은 모두 코리안 뉴웨이브라는 강물을 거침없이 흐르게 하는 동력이다.

 

 

 


문학산 (본명 문관규)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전 한국영화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부산대 영화연구소 소장. 현재는 동아시아 영화의 에피스테메와 네트워크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불교 영화에 대한 저서를 집필 중. 저서로 『거장의 나무』 『한국독립영화감독연구』 『10인의 한국영화 감독』 『동아시아 영화정신의 무늬』, 공저로 『부산영화촬영지답사기』 『부산영화사』 『다시 한국 영화를 말하다』 등이 있다.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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