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 이장호 감독의 ‘판영화사’ 시절 작품들
[이장호 감독] 이장호 감독의 ‘판영화사’ 시절 작품들
  • 김시무(영화평론가)
  • 승인 2024.04.01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흥영화사에서 제작한 〈무릎과 무릎 사이〉(1984)와 〈어우동〉(1985)의 잇단 흥행성공에 고무된 이장호 감독은 1986년에 ‘판영화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제작과 연출의 전권을 갖게 된 것이었다. 판영화사의 첫 작품은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이현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장호의 외인구단Lee Jang-ho's Baseball Team〉(1986)이었다.

‘까치’라는 별명의 오혜성(최재성 분)은 비록 불우하게 자랐지만, 야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혜성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돌봐주었던 엄지(이보희 분)를 연모戀慕하게 되지만 그녀가 전학 가게 되면서 헤어져야만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된 두 사람은 야구장에서 재회하지만, 엄지는 화성고의 천재타자 마동탁(맹상훈 분)의 애인이 되어 있었다. 고교 졸업 후 두 라이벌은 각각 다른 프로 구단에 입단하여 맹활약을 펼치지만, 투수인 혜성은 심한 어깨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된다. 혜성이 실의失意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기인奇人 손병호 감독(안성기 분)이 찾아와 복귀를 종용한다. 그는 도태된 선수들을 설득하여 외인구단을 만들고 오지奧地에서의 지옥훈련을 통해 최강의 선수진용을 갖추게 된다.

한편 혜성이 외인구단에 들어가 지옥훈련에 열중하는 사이 마동탁은 100게임 연속 안타를 치겠다고 호언장담한다. 목표 달성을 한 다음 엄지에게 청혼하겠다는 것이었다. 혜성과의 연락이 두절된 사이 동탁은 그 목표를 달성하고 약속대로 엄지와 결혼한다. 그리고 손병호에 의해 철인鐵人으로 단련된 혜성과 동료들은 새롭게 서부구단에 편입하여 프로야구계를 평정하기 시작한다. 경이로운 50연승으로 시즌을 마감한 서부구단(즉 외인구단)은 2위인 해태구단과 결승전을 남겨 두고 있다. 코리안 시리즈를 앞두고 혜성은 엄지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 늘 꽃다발을 보내주던 열성팬인 현지(엄지의 동생)를 엄지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절망적인 상태가 된 혜성은 그동안 오로지 우승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온 자신의 처지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손 감독은 최후까지 미친 듯이 싸우라는 지시를 내리고, 마침내 엄지를 사이에 두고 혜성과 동탁의 최후의 일전이 펼쳐진다.

영화의 전편에 “난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줄 수 있어!”라는 가사의 노래가 깔리면서 작품의 주제의식을 고양시키고 있는데, 치열한 승부근성과 절대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오혜성의 캐릭터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흥행대박을 거두었다. 제23회 대종상에서 음악상(정성조), 편집상(현동춘), 신인연기상(최재성)을 수상했다.

두 번째 작품은 〈Y STORY(와이의 체험)Y’s Experience〉(1987)이라는 다소 낯선 제목의 영화였다.

X라는 여학생(이보희 분)이 옆집 사는 유명 감독 Y(이영하 분)에게 필이 꽂혀 무려 12년 동안 짝사랑을 한다는 것이 영화의 중심 얼개다. Y는 대단히 쿨하고 능력이 있는 감독인데, 바로 그러한 점에 이끌린 여고생 X가 온 마음을 바쳐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X는 매일 상상 속에서 Y와 함께 있는 꿈을 꾸는데, Y는 X를 그저 옆집 사는 꼬마로만 대할 뿐이다. 몇 년이 지나 어엿한 숙녀가 된 X는 우연을 가장하여 Y와 재회하는데, 그날로 그와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Y는 전처럼 장기 영화촬영을 떠나면서 X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X는 임신했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홀로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외롭게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던 X는 의학박사 W(신충식 분)의 도움으로 아이를 낳고 거처도 얻는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잣집 아들인 대학선배(진유영 분)와 재회한 X는 그로부터 청혼을 받게 된다. 그는 애까지 딸린 그녀에게 아파트도 마련해주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쳐 정략결혼을 해버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W 박사가 X에게 정식으로 청혼한다. 아이의 장래를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마침 Y도 아이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X는 과연 누구를 아이의 아버지로 택할 것인가 고민하던 터에 아들이 그만 뇌종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리하여 X는 Y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감독의 데뷔작인 〈별들의 고향〉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뒤집은 듯한 이 영화는 그러나 흥행은 물론이고, 평단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이에 이장호 감독은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이때 제작자로서 시련을 딛고 나온 영화가 바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A Wanderer Never Stops on the Road〉(1987)이다. 1985년 1월호 《현대문학》에 발표되어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이제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시종 몽환적인 풍경과 시적인 이미지가 스크린을 채우는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어느 날 수종(김명곤 분)이라는 한 남자가 몇 년간 벽장에 보관해 두었던 아내의 유골을 꺼내 동해로 향한다. 이북출신인 아내의 유골을 뿌릴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 남자가 사흘 동안 죽은 아내의 환영幻影을 따라서 낯선 고장을 헤매고 다닌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 얼개다. 이 남자는 여행 도중 세 명의 여자와 만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빼고는 모두 죽은 아내와 닮았다. 그가 처음 만난 여자는 직업적 창녀였는데, 원인 모를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이내 사망하고 만다. 경찰의 조사를 피해 여관을 빠져나온 수종은 다른 주막에서 묵던 중 또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차림새로 보아 상중喪中에 있는 듯하다. 그녀는 주막에 들른 남자들을 상대로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하고 있었다. 수종은 아내와 꼭 빼닮은 그녀의 외모에 이끌려 동침하게 되는데, 이튿날 그녀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수종은 또 한 여자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녀는 치매癡呆에 걸린 노인의 병수발을 들고 있는 간호사 최 씨였다. 그녀는 북쪽이 고향인 노인의 청에 따라 역시 동해를 헤매고 있었다. 여행목적이 비슷한 두 사람은 곧 서로의 흉금을 터놓게 된다. 그리고 마치 천생연분의 짝을 찾은 듯 행복감에 빠져든다. 하지만 선착장 근처에서 굿판을 구경하던 최 간호사는 돌연 신내림來臨을 당하여 무녀巫女가 되고, 결국 남자는 홀로 배를 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비록 흥행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국제무대에서 호평을 받음으로써 감독의 연출 역량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제2회 동경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FIPRESCI Award을 수상했고, 제4회 영평상에서 촬영상(박승배)을 수상했다. 하지만 판영화사에서 네 번째로 만든 〈미스 코뿔소 미스타 코란도Miss Rhino and Mr. Korando〉(1989)의 흥행 참패로 이장호 감독의 영화적 모험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김시무 영화평론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거쳐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장호영화연구회’ 회장이다. 2015∼2016년 한국영화학회 회장, 2015∼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지냈다. 1997년 제2회 PAF비평상(영화평론부문)을 수상했다. 저서로 『스타 페르소나』 『홍상수의 인간희극』 『Korean Film Directors: Lee Jang-ho』 『영화예술의 옹호』 등이 있고, 역서로 『문화연구를 위한 현대 사상가 50』 『영화이론의 개념들』 『영화의 해부』 등이 있다.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