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 이장호 영화에서 음악은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이장호 감독] 이장호 영화에서 음악은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 오광수(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24.04.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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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음악은 〈별들의 고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장호 감독이 거쳐온 1970년대는 밥 세 끼를 해결하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그 시대의 청년들은 시대정신과 낭만이 있었다. 70년대 청년문화를 통기타와 청바지로 정의한 건 문학평론가이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김병익이었다. 그가 ‘청년문화의 기수’로 꼽은 이들 중에 작가 최인호와 영화감독 이장호가 있었다. 두 사람의 서울고등학교 후배가 가수 이장희였다. 이장호 감독은 한쪽에는 최인호, 또 한쪽에는 이장희를 포진시키고 영화 〈별들의 고향〉을 만들었다.

신필름의 조감독으로 잔뼈가 굵은 이장호는 두 시간이면 영화음악을 뚝딱 만들어내던 시절에 잘 나가던 가수 이장희에게 OST를 맡겼다. 지난 시절의 감독들과 달리 영화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장희는 소설 『별들의 고향』을 수십 차례 읽으면서 가사를 쓰고 악상을 떠올렸다.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그룹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 강근식이 편곡에 참여했다. 친구인 조원익 등이 연주를 맡았다. 플루트를 전공했던 레코드회사 사장도 ‘뭔가 작품을 만들어보자’면서 흥분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 아무것도 몰라요 / 괜히 겁이 나네요 / 그런 말 하지 말아요 / 난 정말 몰라요 / 들어보긴 했어요 / 가슴이 떨려 오네요 / 그런 말 하지 말아요 / 난 지금 어려요 / 열아홉 살인 걸요 / 화장도 할 줄 몰라요 / 사랑이란 처음이어요 / 웬일인지 몰라요 / 가까이 오지 말아요 / 떨어져 얘기해요 / 얼굴이 뜨거워져요

〈난 열아홉살이에요〉는 이장희 대신 10대 소녀가 필요하다는 결론 끝에 가수를 물색했다. 그때 여고를 갓 졸업하고 미8군 패키지 무대서 노래하던 긴 머리 소녀가 나타났다. 나이도 열아홉. 훗날 〈열애〉로 인기가수 대열에 오른 윤시내였다. 소설이나 영화의 성공 못지않게 이 앨범도 불티나게 팔렸다. 또 함께 수록됐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휘파람을 부세요〉 등 거의 전곡이 히트곡이 됐다.

‘한 소녀가 울고 있네 / 가냘픈 어깨가 들먹이네 / 싸늘한 달빛이 비춰주네’. 영화 속에서 사랑하던 남자가 배신하고 결혼식을 올릴 때 여주인공이 낙태하는 장면에서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흘렀다. 그야말로 영화관은 눈물바다였다.

청년감독 이장호는 이장희가 만든 노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효과를 극대화했다. 영상과 노래가 따로 놀지 않고 훌륭한 보조재로서 역할을 한 것이다. 대화체의 노랫말도 획기적이었다, 한국영화의 OST는 〈별들의 고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는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당시 이장희도 새로운 음악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누구보다 컸던 터라 다양한 시도를 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만들어서 사랑의 테마로 사용했다.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과감하게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음악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기만만했던 청년들은 하루아침에 몰락한다. 1976년 이장호 감독과 가수 이장희는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활동을 금지당한다. 또 이보다 앞서 1975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표로 〈난 열아홉살이에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금지곡이 됐다. 가사가 선정적이고 특히 〈난 열아홉살이에요〉는 미성년자 약취 강간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해금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아주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여있어야 했다.

이장호 감독의 영화에서 음악은 중요한 장치였다. 〈바보 선언〉, 〈바람 불어 좋은 날〉,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서 늘 문제적 영화음악을 선보였다. 민요나 판소리에서부터 록 음악과 재즈에 이르기까지 그 장르도 다양했다. 1986년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던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흥행은 물론 영화 음악도 대박이 났던 작품이다.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원작으로 최재성과 이보희, 안성기가 출연했다. 정성조가 만든 영화 음악은 정수라, 김도향, 윤시내가 참여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주제곡인 정수라의 〈난 너에게〉는 KBS 〈가요톱10〉의 1위 자리를 5주간 차지했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엄지를 향한 까치의 대사를 노랫말로 옮겨 여심을 사로잡았다.

젊은 시절 이장호 감독은 하길종, 김호선 감독 등과 ‘영상시대’를 결성해 뉴 시네마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충무로의 기존 관습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세대, 젊은 감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뉴시네마 운동의 중심에는 주제의식과 영상, 음악 등 왕년의 문법을 허물고 새로 건설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별들의 고향〉에서 출발하여 〈바보 선언〉, 〈바람 불어 좋은 날〉 등에서 그는 영화 문법을 달리하면서 파격적인 음악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주제의식과 더불어 새로운 영화음악의 문법을 만들어갔던 이장호 감독의 시도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오광수 시인이자 대중문화평론가이다. 시집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를 비롯하여 다수의 동인지, 에세이집을 냈다.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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