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장호 감독] 한국영화사에 빛나는 〈별들의 고향〉 50년: 데뷔 50년 맞은 이장호 감독 인터뷰
[인터뷰 - 이장호 감독] 한국영화사에 빛나는 〈별들의 고향〉 50년: 데뷔 50년 맞은 이장호 감독 인터뷰
  • 손정순(본지 발행인)
  • 승인 2024.04.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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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70년대 청년문화를 선도했던 최인호 원작, 이장호 감독의 영화 〈별들의 고향〉(1974)이 개봉한지 50년이 되었다. 더불어 영화 〈별들의 고향〉으로 화려하게 입봉하여 1970-80년대의 대표적 감독으로 부상한 이장호 감독 또한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필자는 이장호 감독이 태어난 북아현동에서 1990년대부터 30여 년 이상을 동고동락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근현대문화예술의 현주소인 북아현 동네에서 골목을 거닐며 영화와 문화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감독님의 더 깊은 팬이 되었고, 저서 『이장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2013, 작가) 출간은 물론 이장호영화연구회 발족까지 앞장서게 되었다.

이장호영화연구회 발족을 앞둔 2016년 11월 초에는 런던한국영화제 초청 이장호 감독 특별전에 동행하여 영국 영화인들과 팬들을 만나는 기쁨을 함께 누렸으며, 캠브리지대학 초청,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시사회에서는 영국의 영화학자들과 학생들이 보여준 한국영화에 대한 토론과 애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후 발족한 이장호영화연구회는 매달 감독님을 모시고 그의 영화를 한 편씩 다시 보며, GV도 진행하고 열띤 토론의 결과물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이장호 감독 회고전과 핸드프린팅을 진행하며,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청년영화를 선도한 이장호 감독을 깊이 재조명했을 때, 그때의 뭉클했던 감동 또한 잊을 수 없다.

〈별들의 고향〉 개봉 50년을 맞아 당시 문화아이콘이었던 이장호 감독을 쿨투라 편집실에서 만났다. 데뷔 50년이라는 세월이 물색하게 그는 여전히 ‘청년’ 이장호였다. 그의 시대로 여행을 떠나본다.

〈별들의 고향〉 50년, 데뷔 50년 맞는 이장호 감독

올해는 〈별들의 고향〉이 50주년이 되는 해이자 감독님이 데뷔 50년을 맞는 뜻 깊은 해입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국영화사에 빛나는 명작 〈별들의 고향〉 50주년을 맞아 감독님이 여느 해보다도 더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계실텐데요. 감회가 어떠신지요?

벌써 50년이라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영화감독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학교에 다니다가 아버지 권유로 영화판에 뛰어들었고 신필름에 들어가 영화 조감독 생활을 8년 했지. 처음부터 영화감독 하겠다는 생각으로 영화에 대한 준비를 했던 사람이 아니었고, 영화감독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을 때 운 좋게 기회가 왔어요. 최인호 작가가 『별들의 고향』이라는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그것이 굉장히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또 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우선권을 가질 수가 있어서 영화감독이 되었던 거지. 그래서 사실은 조금 당황스러운 데뷔였어.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영화감독을 했기 때문에 성공을 했는데도 그다음에도 영화를 만들면 그 아마추어적인 게 때를 벗지 못하고 계속 드러나고 그러거든. 근데 그게 다행히 그때만 해도 매너리즘에 빠진 한국영화에서 그런 아마추어적인 방법이 사람들한테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

이장호 영화연구회 모임.

나는 나이도 어렸거든.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별들의 고향〉 만들고 나서 텔레비전이고 신문이고 나를 그냥 놔두지 않았어. 아마 그 당시에 요즘 연예인 예능프로그램이라면 〈아는 형님〉이나 〈유 퀴즈 온 더 블록〉 그런 데까지 출연했을 거야. 쇼프로란 쇼프로는 다 나오게 하더군. 지금 감독들은 텔레비전 출연하라고 하면 굉장히 꺼리거든요. 근데 나는 텔레비전 출연하는 것을 좋아했어. 그 당시 사람들은 조금 체면을 지키는 때인데 텔레비전 출연해서도 나는 뭐든지 털어놓기를 좋아했다고. 나는 내가 느낀 것을 꾸밈없이 얘기하는데, 이를테면 노골적으로 공부 못했다는 얘기, 뭐 내가 영화 만드는 것 때문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싸운 얘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다 재밌어 했어. 너무 어린애가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니까 나는 숨기는 게 별로 없었어요. 밑바닥까지 다 텔레비전에서 털어놓으니까 그게 더 상승효과를 가져와서 연예인처럼 여기저기 불려 다녔어. 그래서 나는 일생 동안 영화 몇 편 안 만들었는데도 지금까지도 내 또래들은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 알아보는데 젊은 사람들은 ‘아 저 사람 저기 단역 탤런트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저번에 장진 감독, 봉준호 감독 만나 선배 감독들을 어떻게 보냐 물었더니 “저는 이장호 감독 보면 연예인 같아요.” 그러더라고. 감독 같지 않다고. 그런 얘기를 할 정도로 팔려 다녔어요. 그러니까 어떤 게 생기냐면 아주 심한 열등감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유명해지니까 어리석게 점점 뭐라 그럴까, 교만해지고 교활해지기 시작한 거지. 그 방식으로 계속 자라다 보니까 이젠 연륜이 필요한 때인데도 아직도 철부지라는 생각 때문에 내 스스로는 결코 성공적인 필모그래피를 못 갖췄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늘 과분하게 평가받고 사랑받았던 것이 50년 영화인생에서 큰 축복이에요.

 이장호 영화연구회 발족식.

최인호 원작, 이장호 연출로 빚어낸 명작 〈별들의 고향〉
당시 46만 관객, 현재로 보면 천만 관객 동원한 흥행작

감독님의 어린아이 같은 ‘철부지’ 마음이 ‘늘 청년’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요? 〈별들의 고향〉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이장호 감독님은 최인호 작가와 함께 70년대 문화를 선도한 문화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초중고 친구였던 두 분이 영화 〈별들의 고향〉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감독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당시 감독님은 스타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징표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태어나 문화의 자양분을 받으며 자란 세련된 도시성이라고 할까요? 그 새로움은, 기존 한국 문화에 없었던 진짜 새로운 감수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별들의 고향〉 연출 시절이 궁금합니다.

〈별들의 고향〉은 제 첫 작품 데뷔작입니다. 스물여덟 살에 감독이 돼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사실 지금은 영화를 감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학교나 영화아카데미 같은 데서 습작도 하고 영화 경험이 있는 채로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하니까 시간이 굉장히 단축되는데…. 나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데뷔한 거예요. 뭐만 믿고 했냐면 동세대 최인호가 갖고 있는 모든 감수성이나 감각이나 이런 것에 기대었죠. 최인호나 나나 서울 장안 서대문에서 태어나서 초·중·고 시절을 함께 보내고, 그리고 대학도 신촌에서 보냈기 때문에 정말로 완전히 도시인이죠.

나는 〈별들의 고향〉의 원작자 최인호하고 친구였던 덕에 최인호가 소설을 대학노트에다 써서 보여주는 게 너무 좋았어. 당시에 김승옥이란 작가가 우리 시대 때는 천재였고, 그 다음에 그와 같은 소위 번역문체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최인호가 유일하다고 생각했지. 편견인진 모르지만 난 그 당시에 제일 좋았던 게 그런 번역문체였어. 한국의 토속적 냄새가 나는 것은 싫어했어요. 나는 서울서 태어나서 서울서만 자랐고 그렇게 뺀질뺀질한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전라도 사투리가 나온다든지 가령 이문구 선생, 또 최일남 선생, 이런 식의 소설은 이상하게 싫었어.(우리는 그때까지는 몰랐는데 조금 자라면서는 또 다른 새로운 열등감이 생겼는데 우리는 도시만 아니까 소위 구수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토속적인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서투르잖아. 그래서 익숙하지 못하니깐 오히려 그런 토속적인 정서를 갖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조금 열등감을 갖게 되었어요.)

뺀질뺀질한 소설들만 좋아하다보니까 최인호의 왕팬이 된 거지. 최인호가 쓰기만 하면 나는 감탄을 해. 나는 글 잘 쓰는 최인호가 좋았던 거예요. 막 써 가지고 따끈따끈한 걸 보여주면 나는 읽고 100% 막 감동하고 좋다 그러고.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최인호가 신문소설을 쓰게 됐어요. 그 당시에 신문소설이란 늘 대가, 즉 나이 많은 소설가들, 정비석 선생, 이병주 선생 이런 분들 차지였거든. 그런데 지금 막 스물대여섯 살 된 청년작가가 조선일보에 계약을 한 겁니다. 이게 『별들의 고향』이죠. 처음에 최인호는 제목을 ‘별들의 무덤’이라고 했어요. 왜냐면 당시 청년의 감각으로 인호에겐 무덤이 고향보다 더 심각했죠. 아마 젊은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별들의 무덤’ 하면 기성사회에 뭔가 저항적 암시도 있고 의미도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조선일보 편집회의에서 뭐라고 했냐면, 아니 조간신문인데 아침에 신문을 딱 폈을 때 무덤이 나오면 되겠냐고. 그래서 반대의 이미지이면서 같은 느낌의 ‘별들의 고향’으로 바꾸었죠.

 

런던한국영화제 이장호 회고전.

『별들의 무덤』에서 『별들의 고향』이 되었군요. 저는 익숙해서인지 바꾼 제목 「별들의 고향」이 훨씬 상징성도 있어 보입니다. 감독님은 어떠신가요? 이 소설은 연재 후에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가 되었죠. 책이 너무 많이 팔려서 그때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았던 출판사 사장이 그전까지 진 빚을 다 갚고, 빌딩까지 올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또한 대뱍이 났습니다. 한국영화사에서 영화 〈별들의 고향〉은 흔히 “경아라는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와 동시대 청년문화의 감수성과 호스티스 영화의 절묘한 결합을 낳은 당대 최고의 흥행작”으로 묘사되곤 하는데요. 1974년 4월 2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105일 동안 46만 명을 동원했고 속편이 두 번 만들어졌습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 했던 이십 대 청년이 갑자기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게 지금으로 치면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흥행 대박을 친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첫 연출인데 두려움 같은 건 없으셨나요?

‘별들의 고향’이라는 제목을 당시에 처음 들었을 땐 촌스러웠어요. 소설은 괜찮은데 ‘별들의 고향’이란 제목은 왠지 촌스러웠다고. 그런데도 어쨌든 그게 너무 인기가 있는 거예요. 인기가 있으니까 영화판권에서도 경쟁이 심했는데 나는 최인호 친구 덕에 그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배운 그대로, 아니 배웠다기보다 신상옥 감독님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 신상옥 감독님 밑에서 8년을 조감독 했으니까 아무리 바보라도 신상옥 감독님이 영화 만드는 방법을 저절로 익히게 되는 거죠. 눈감으면 신 감독님이 어디서 어디까지 커트를 나눌 거라는 게 너무 빤할 정도로…. 그런 기술만 갖고 영화 〈별들의 고향〉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데 정말 과연 영화적 재능이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죠.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가 따로 있지만 그 당시에는 멜로드라마에 익숙한 작가가 썼기 때문에 원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또, 각색 과정에서 한국식 멜로드라마에 익숙한 각색을 했기에 난 그런 시나리오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죠. 그런 이유로 나는 소설 원작을 보고 다이제스트해서 연출을 했고, 최인호 역시 그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드니까 자기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어요. 최인호는 시나리오를 항상 쉽게 쓰는데, 이 〈별들의 고향〉도 한 5일 만에 썼어요. 그것을 토대로 해서 영화를 만들었기에 작품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죠.

<별들의 고향> 개봉 50년을 맞아 70년대 문화아이콘이었던 이장호 감독을 쿨투라 편집실에서 만났다.

 

〈별들의 고향〉을 만들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촬영한 사람한테 전적으로 의지를 해야 하는 거였어요. 나는 화면을 보지 못하고, 내가 좀 다혈질이어서 연기자들한테 직접 설명을 해야 되는데, 연기자들이 신인이니깐 신인감독한테 신뢰를 못할 거라는 강박관념 그런 게 있었어요.

재밌는 이야기는 안인숙 씨가 촬영을 할 때였어요. 라스트신을 먼저 찍으려고 첫날 촬영 스케줄을 갑자기 바꿨어요. 아침에 눈을 떠 보니깐 눈이 하얗게 온 거예요. 1974년 4월 개봉인데, 1974년 새해 들어서 자칫하면 눈이 안 올지도 모른다, 라스트신을 찍어야 되는데 그런 공포감이 있었거든요. 촬영 첫날 크랭크인을 정해 놓았는데 너무 다급해져서 그날 촬영하려던 걸 취소하고 “이거 촬영하자. 눈 촬영하자. 라스트 촬영을 하자”로 갑자기 바꿨어요. 회사에서는 신인감독이 스케줄을 정해놓고 그걸 뒤엎으니깐 그것부터 좀 엉뚱하게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장소를 어디로 할 거냐? 헌팅도 안 했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제가 그 당시에 처갓집이 천호동이라서 광나루를 넘나들면서 그 하얀 벌판에 눈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광나루로 정하고, 그래서 부랴부랴 가서 찍는데 갑자기 엉뚱한 스케줄을 잡으니깐 분장이고 뭐고 준비한 게 하나도 없어요. 안인숙 씨는 자기가 이제 타락한 장면인데 어떻게 분장을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보는데, 갑자기 준비를 안 한 상태에서 그 말을 들으니깐 꼭 시험당하는 것 같았죠. 어린 배우한테 내가 테스트 당하는 것 같아서 썩은 얼굴을 만들라고 했더니 분장사도 없으니깐 자기가 과감하게 막 썩은 얼굴을 만들려고 해요.

나는 또 뭐가 겁나냐면 전부 다 테스트를 하는 것 같아. 촬영기사는 촬영기사대로 저 신인감독이 제대로 하나, 조감독들도 나한테 테스트하는 것 같고, 제작부장도…. 나는 눈 내린 벌판을 계속 돌아다니는 거예요. 발자국 내면 또 촬영 못 하니깐 뱅 둘러서 했는데 겨우 안심 되는 건 카메라가 멀리 있으니깐 그렇게 행복하더라고. 옆에 있으면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해. 그래서 옳지 배우를 저기 세워놓고 롱샷으로 찍어야겠다, 이 생각을 한 거예요. 그리고 버스에 가서 보니깐 안인숙 씨가 얼굴을 이상하게 만들어놨어요. 그래서 그건 아니다. 다시 지우라고 했어요. 차라리 화장 없는 걸로 가자. 그 당시엔 짙은 화장이 유행일 때라 화장을 말끔히 지우니깐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이걸로 간다, 해서 촬영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묻기에 저기 멀리 가서 서 있으라고. 거기까지 안내해 주고 카메라로 왔어요.

그러고선 ‘레디고’를 어떻게 하지? 역사적인 순간인데 서툰 게 나타날까봐 굉장히 두려웠는데 어느 틈에 보니깐 벌써 ‘레디고’를 해버렸더라고, 이미 집중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멀리 있다가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안인숙 씨한테 카메라를 치켜 올리니깐, 이미 내가 감독인지 조감독인지 모르는 경지에서 한참 촬영을 하고 있더라고. 다행히 그 장면들이 라스트 장면으로 성공을 했던 것 같아요.

서정민 촬영감독과 이장호 감독.

두 천재가 만든 〈별들의 고향〉 주인공
세련되고 당돌하고 발칙한 ‘경아’ 캐릭터

〈별들의 고향〉 시나리오를 5일 만에 썼다니 최인호 작가는 정말 천재인가 봅니다. 촬영 첫날 하얗게 내린 눈을 보고 계획된 촬영을 취소하고 “눈 속에서 안인숙 씨가 수면제 먹으면서 흐느끼다 죽는” 라스트 명장면으로 촬영으로 바꾼 것을 보면 감독님 또한 연출 천재이신 것 같습니다. 저는 〈별들의 고향〉 원작소설도 읽어보고 20여 년 영화수업을 하다보니 수업시간과 영상회를 통해 수십 번은 본 것 같은데요. 소설의 첫 장면은 주검을 수습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영화는 문오가 바에서 술을 마시러 가서 발칙하고 당돌한 여주인공 경아를 만나는 데서 시작합니다. 영화의 캐릭터 중에서 특히 경아 역을 맡은 안인숙 배우의 발칙함이 당시로서는 굉장히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주인공의 캐스팅 과정도 궁금합니다.

경아는 그 시대에 흔히 만날 수 있었던 캐릭터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는 막 신혼 시절인데 내 아내의 모습에서도, 최인호의 아내에게서도 경아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런 익숙한 모습들이 주변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최인호가 연애소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썼어요. 최인호는 번역 문체거든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헤밍웨이라든지 그런 영문학에서 영향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대사 감각이 놀라워요. 근데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더니 지난 시간에 작문 쓴 것들을 가져오셔서 최인호한테 공격하는 거예요. ‘이거 진짜 네가 쓴 거냐?’ 그러니까 최인호가 자기가 썼다고. 그러니까 선생이 믿지를 못하는 거야. 그러면서 한번 반 아이들 모두 있는데서 읽어보게 하더라고. 우리가 낭독하는 걸 들어 보고 정말 놀랐어. 중학교 1학년 때 우리는 아직 어린아이였거든.

<별들의 고향> 화천공사 제공.

그런데 최인호 소설 속에 진짜 시침 뻑가고. 연애하는 중학생 얘기가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어이가 없었지. 하지만 나는 최인호가 썼다는 걸 100% 믿었어. 아니나다를까 최인호는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신춘문예에 입선을 했어요. 그때 당선작 없이 입선자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 고등학교 2학년한테 당선작 주는 게 그 시대에는 좀 묘해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이 됐다고…. 그런데 최인호의 재능이 드디어 제대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거지. 1973년 이제 본격적으로 『별들의 고향』이라는 연애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게 된 거야. 그런데 『별들의 고향』에 등장하는 주인공 경아를 보면서 나는 자꾸 느낌이 최인호가 이거 자기 마누라 얘기 쓰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 시대에는 우리 연애소설이 감각적으로 밀착돼 있는 표현을 못했는데…. 가령 블루스를 못 추는 시대의 사람들인데 경아를, 남자가 자기 발 등 위에다가 여자 발을 올려놓고 둘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 누구나 한두 번은 그렇게 해 보지 않았을까 생각했지. 인호가 그거 쓰기 전에 나도 집에서 종종 그랬거든, 그래서 이거 인호가 틀림없이 마누라를 대상으로 쓰고 있구나. 읽다 보면 인호 마누라나 내 마누라나 과거 경아의 모습에 부분 부분 공감하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요. 그래서 아마 더 새로운 세대에게 실감나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경아는 그때 어느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냐면, 신문에 연재되자마자 그 서울 시내에 샐러리맨들이 아침에 출근해서 딱 처음 얘기하는 게 경아 얘기. ‘야 어제 경아 어떻게 되었지?’로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주변 가게 이름들이 하나 둘 ‘경아’ 이름으로 늘어났어.

경아 역의 안인숙이란 배우를 내가 처음 본 것은 KBS에서였어. 무슨 일이 있어서 갔다가 껑충한 아이가 어린이 프로그램 준비를 하는 모습을 봤어. 근데 그 아이가 내가 조감독 하는 사이에 벌써 성인이 된 거예요. 처음 〈별들의 고향〉에 나는 신인 배우를 쓸려고, 경아 역에는 아주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다 생각해 가지고 신인 공모로 죽 오디션을 했는데 처음에는 마음에 안 들었어요. 매니저를 통해서 안인숙이가 제작자한테 경아 역할을 노 개런티로라도 꼭 하고 싶다고 해서 제작회사에서 오케이 한 거예요. 그때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그 어렸을 때 보던 아이가 이제 성인이 돼서 첫 번째 성인 역할로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신인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좋다고 했죠.

 

당시 ‘청년’ 문화 이미지와 현상
70년대 청년문화에서 BTS까지 이어져왔다

〈별들의 고향〉에 등장하는 ‘경아’ 캐릭터가 당시에 흔히 만나게 되는 캐릭터였다니 감독님과 최인호 작가님은 도회사람이 맞는 거 같습니다. 저는 지금 봐도 경아의 모습이 70년대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혹스럽고 발칙합니다. 다시 최인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독님은 〈별들의 고향〉을 연출할 시기 최인호와 북아현동에 함께 거주하며, 동고동락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최인호는 19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에 선 작가입니다. 한국문화사를 새롭게 쓴 영원한 청년작가라고 할 수 있지요. 소설가이자 시나리오작가였으며, 작사가로 문학, 영화, 드라마 등 한국문화에 끼친 최인호 작가의 영향은 신선하고 거대합니다. 작년에는 최인호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최인호청년문화상’을 제정 ‘제1회 시상식’과 ‘최인호원작영화 특별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요. 그 당시 ‘청년’이라는 문화가 감독님께 어떤 이미지였는지 궁금합니다.

청년문화는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당시의 청년문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때 70년대 최인호의 ‘청년문화 선언’을 통해서 무척이나 긍지를 느꼈어. 나는 1945년생이라 소위 식민지가 끝나고 대한민국이 남쪽만 건국하면서 미국식, 서구식 민주주의 교육이 도입되어 가지고 그 첫 수혜자라고 볼 수 있지. 우리가 미국 팝송이라든지 그런 것이 익숙해지면서 자라고, 또 하나는, 나의 것에 대한 것에 굉장히 열등감이 많았어. 한국 연필을 쓰다 보면, 칼로 깎다 보면, 계속 심이 부러져 가지고 정말 국산품이라는 것에 대해 저주가 생기고 그랬는데, 어느 틈에 크니까 우리가 팝송 부르는 시대가 되었잖아요. 그런데 우리 선배들은 팝송에서 더 벗어나질 못했어. 그런데 내 또래들은 슬그머니 한글화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작곡도 이장희나 또 조영남이나 윤형주, 송창식 이런 친구들이 팝송에서 벗어난 발라드로 한글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니까 독특한 창작 시대인데 거기에 가장 앞장선 게 최인호죠. 최인호는 노래 가사도 쓰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최인호가 처음 팝문화에 대해 단편을 쓴 것이 「침묵의 소리」. 〈Sound of Silence〉 유명한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예요. 그 때부터 우리시대의 감각이 대표적으로 사회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 같아.

그래서 〈별들의 고향〉이 히트해서 사회적으로 ‘아 새로운 세대가 사회에 등장하고 있다.’는 인식을 준 다음에 최인호의 글에 대해서 서울대학 쪽에서 비판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최인호가 반론을 쓰면서 청년문화 선언을 했죠. 물론 영화 〈별들의 고향〉이 나오고 히트한 다음이지. 그 다음에 우리 또래들이 청바지, 통기타, 장발, 이런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기성세대의 압박 속에서 숨어 다니고 지하 언더그라운드처럼 지내다가 그 다음부터는 우리의 긍지를 보여주고 자랑을 보여주자. 그런 시대, 그러니까 청년이라는 단어를 양성화시킨 것이 우리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니 우리가 어떤 청년문화의, 한글 전용 세대의 제일 시조처럼 된 거지. 이후로 태어난 한글문화 전용 세대가 가요라든지 뭐 연예계 쪽이라든지 영화라든지 이런 쪽으로 상당히 독특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면서 그 이전에 외국문화에 대한 선호도를 갖고 있었던 관객들이 점점 한국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고 봐요. 그런 모든 시초가 최인호의 청년문화 선언 이후에 생긴 거라고 생각을 했고, 이런 ‘청년문화’가 점점 이어져 발전하다가 BTS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작년에 최인호 10주기를 맞이하면서 ‘청년문화상’이라는 이름으로 상을 제정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잊혀지기 전에 ‘청년문화’의 정신을 현재의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되살리면 좋겠어요.

〈별들의 고향〉 OST의 인기

70년대 청년문화에서 BTS까지 이어져왔다고 생각하니 청년문화의 저력이 느껴집니다. 특히 〈별들의 고향〉은 시각적 스타일이나 영화의 소재도 신선했지만 음악이 아마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별들의 고향〉 OST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나는 지금 세대의 음악성이라든지 이런 문화를 보면서 우리가 지금 세대의 어떤 진짜 살아 있는 조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때부터 문화가 바뀌어가지고 그것이 세대에 맞게끔 변화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그 전의 한국영화는 음악을 어떻게 했냐면 역시 나이 많은 작곡가들이 스튜디오를 2시간 빌려서 2시간 안에 모든 연주를 끝내는 게 영화음악이 되었거든. 그니까 젊은 사람들이 할 수가 없었어요. 근데 이장희 씨에게 영화음악을 시킨다니깐 이장희 씨도 당황했죠. 싱어송라이터이긴 하지만 영화음악을 할 정도는 아니고, 그래서 자기 친구 중에 당시 베테랑 기타리스트 강근식이라는 친구를 우리한테 소개해줘서 그쪽에서 이장희 씨 노래의 편곡을 하기로 했어요. 〈별들의 고향〉은 이장희한테 영화 음악을 맡기면서 신세계 스튜디오의 사장이 플루트 연주자였는데, 플루트를 연주하는 사람이니까 자기 스튜디오에서 영화 음악을 처음 하는 거죠. 자기네들은 영화음악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니까 처음으로 식스 채널 녹음 방식으로 더빙을 입히고, 입히고 하는데, 그것을 두 시간 안에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연주하면 또 거기다 입히고, 입히고 하면서 그 사람들이 아마 한 달 정도 걸려 만들어 내서 저한테 테이프를 넘겼어요. 영화를 다 만든 다음에 영화를 보고 음악을 한 게 아니라 자기네들이 소설만 읽은 것 갖고, 연출을 하고 노래를 만든 거죠. 그 많은 분량을 우리가 마음 놓고 사용할 수가 있었어.

그 당시에 음반은 식스 채널까지 가능했거든. 여섯 번을 계속 입히니깐 나중에. 이 신시사이저라는 게 처음 나올 때이고 그래서 굉장히 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 같은 음악을 만들어 냈어. 그러고서 우리가 촬영을 다 끝내니깐 그때는 벌써 음반 비즈니스를 해놓은 상태라 방송을 통해서 음악이 나가기 시작했지. 방송에서 반응이 금방 왔어요. 〈별들의 고향〉 주제가라면서 나가는데, 그 당시의 영화음악 주제가와는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음악이 월등하니깐 음악시장에서도 크게 히트를 쳤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별들의 고향〉 주제가가 매우 새롭게 느껴졌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한 영화에 삽입곡이 그렇게 많은 영화가 그전엔 없었던 거예요. 요즘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조금만 사랑하는 느낌이 나오면 노래가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의 시작이 아마 〈별들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감각이 젊어지면서 영화감독, 영화음악이 대폭 젊은 사람으로 바뀌다보니 이제 나이 많은 사람들의 수입이 떨어지기 시작한 거죠. 〈별들의 고향〉이 그런 분기점이 되었다고 봐요.

 

좋아하는 감독과 영화에 대한 철학

〈별들의 고향〉을 통해서 오늘날 흔히 이야기하는 비주류 아마추어리즘의 성공신화를 만드신 거네요. 어쩌면 당시 그런 것들을 갈망하던 문화대중들과 만났던 거겠죠. 감독님은 데뷔부터 거장 감독님이 되셨는데 ‘나는 이런 영화가 좋다’ 아니면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감독님만의 연출 철학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내가 좋아하는 감독 이야기를 하자면 외국 감독으로는 우리 시대 때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라고…. 〈벤허〉 뭐 이런 영화들 있죠? 대작들 많이 하고 그 사람 또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흑백영화 시절에서부터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말하자면 신 같은 존재죠.
영화하는 사람들한테는 데이비드 린도 그렇고. 그 사람들 정말 다 좋았는데 내가 깜짝 놀란 영화는 밥 포시라는 사람의 〈올 댓 재즈〉, 〈카바레〉, 또 그 사람이 만든 영화를 보면서 야 뮤지컬을 저렇게 마치 문학 의식의 흐름처럼 만들 수 있구나. 우린 할리우드의 뮤지컬이나 브로드웨이 뮤지컬만 생각하고 미국식 뮤지컬은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올 댓 재즈〉 같은 거, 〈카바레〉 같은 거 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한동안은 저런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굉장히 애를 쓰다가 뮤지컬 공부도 안 하고 시도를 한 게 〈그래그래 오늘은 안녕〉…. 크게 참패했죠. 음악과 상관없이 영상으로만 뮤지컬을 만들 수 있다고 착각을 했어요. 그리고 그 가난한 모습과 리얼한 것들이 결국은 내 어렸을 때 본 전후의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의 화면들이 떠올라서 결국 내 최초 리얼리즘 영화의 시도가 되어 버렸어요.

한국감독으로는 우선 내 스승님이었던 신상옥 감독님 통해서 영화를 많이 배웠고 그 다음에 김기영 감독님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따라다녔고, 유현목 감독님은 뭐 또 아버님하고 친구였으니까 영상시대 때 유현목 감독님 사무실에서 우리가 모여서 일을 했지요. 그리고 내가 21살에 본 이만희 감독님의 〈만추〉는 충격적이었어요. 이만희 감독은 천재임에 틀림없어요. 〈만추〉는 정말 영상미가 대단했으니까. 그 당시 한국영화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어떤 시츄에이션에서는 정적 속에서 다음 쇼트, 다음 쇼트, 이 정적이 계속됐는데, 그게 이 사람의 의식을 나타내는, 말하자면 그 영상들이 드라마와 상관없이 우리한테 전달을 해줘. 나는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별들의 고향〉에서도 플래시백으로 과거로 갈 때, 신성일이가 담배를 던졌는데, 떨어지는 건 볼펜이 떨어지고, 또 스틸처럼 멈춰 가면서 쇼트를 진행하고, 내 영화의 그런 신들이 아마도 이만희 감독한테서 영향을 받아서 발전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상옥 감독.

내가 이만희 영화를 처음 보고 반했던 것처럼, 틀림없이 이 사람은 영화감독의 기질과 센스가 있다고 생각한 첫 번째 이름은 〈오아시스〉의 이창동이야. 마지막에 가로수 자르는 장면은, 그거는 진짜 세계 모든 훌륭한 영화들의 그런 에센스라 할 수 있는 영화적인 표현이야. 그때 아, 이 친구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다음에 김기영 감독 같은 류의 성격이 김기덕. 〈수취인불명〉에서 엄마가 아들 잡아먹는 이야기. 김기덕 영화 보면서 또 쇼크였어. 김기덕 영화에서 가장 걸작이고 영화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빈집〉이야. 〈빈집〉 보면서, 아, 이 영화는 진짜 이창동과 비슷한 그런 센스가 흐르고 있다, 라고 봤지.

이단아는 홍상수고. 홍상수는 어떻게 저렇게 스토리텔링과 상관없이, 어떻게 저런 연기를 끌어내고 저런 걸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괴물이야 홍상수. (잠시 생각) 박찬욱도 시나리오가 섬세하고 연출력이 뛰어났어. 박찬욱을 좋아하는 국내외 젊은 영화마니아들이 많다는 것은 그의 잠재된 매력과 개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인데 나는 특별히 우리 세대와 구별되는 점은 못 느꼈어…. 뭘까? 박찬욱의 영화는 숙제 같아. 그리고 봉준호는 나랑 가까이 지냈거든. 얘기를 해보면 다른 감독들과 다른 게 나이가 어린 데 나이 많고 적고 상관없이, 이 사람은 다 대화가 가능해. 우선 인문학을 공유할 수가 있어. 다른 감독은 수줍어서 말을 안 하거나, 우리한테 거리를 두거나 그러는데, 봉준호는 자연스럽게 소통이 가능하고 교류가 가능해요. 그리고 옛날영화를 그렇게 많이 아는 놈이 없어. 그래서 이 친구는 아직까지도 클래식으로 남을 수 있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얘기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신상옥 감독 기질 쪽으로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신상옥 감독 부부와 함께(왼쪽부터 이장호, 김홍준, 최은희, 신상옥).

영화는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

감독님의 이야기에 심취되어 예정시간보다 시간이 훌쩍 초과되었는데요. 앞으로도 계속 영화 만드실 거죠? 마지막으로 감독님의 앞으로의 계획을 여쭙습니다.

그럼 당연하지. 영화는 죽을 때까지 하고 싶지. 건강만 허락한다면…. 그거는 이제 하나님이 언제까지 이렇게 일할 수 있게 해 주시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아. 우선 현재 촬영 중인 다큐영화 〈하보우만의 약속〉을 잘 마무리하여 올해 개봉할 거예요. 청소년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작품으로 남기고 싶어. 컴퓨터그래픽 등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영화적 감각으로 보여주려고 해요.

이 영화는 어쨌든 내 영화 50주년에 가장 반성하는 자기 고백이고 그 고백을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다큐멘터리로 담는 그런 영화가 될 거예요. 여기에는 미래도 들어가 미래가 내가 예측하는 대한민국의 미래인데 대한민국을 이렇게 보니까 대한민국의 모습이 예수를 닮았어.

그리고 일생 동안에 제일 큰 축복은 ‘성경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거야. 나한테 유일한 희망이고 구원이지. 앞으로도 늘 감사하며 살아가려고 해요.

 

에필로그

팔순의 이장호 감독님은 인터뷰 내내 솔직 담백하게 당신의 영화 인생을 풀어놓았다. 어떤 꾸밈이나 포장 없이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고 유쾌하게 들려주셨다. 드라마처럼 70년대 이야기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그 필름 속에는 20대 초반 8년 간의 신필름 연출부 시절을 거친 뒤 데뷔작 〈별들의 고향〉으로 문화아이콘이 된 청년 감독 ‘이장호’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데뷔하자마자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되었지만 스스로 감독이 아닌 조감독 같았다는 표현은 나에게도 서늘한 비수를 꽂았다. 〈별들의 고향〉 성공 후 교활해졌다며 냉정하게 자신을 반추하며 부끄러워하는 거장 감독의 모습에 고개가 숙여졌다. 〈별들의 고향〉 이후 연출한 이장호의 영화들과 한국영화사를 관통하는 많은 영화 얘기들을 나누었지만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별들의 고향〉 개봉 50주년을 맞는 오는 4월 26일에는 '별들의 고향' 50년과 거장 이장호 감독의 데뷔 5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논현동 건설회관 비스타홀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 《쿨투라》 2024년 4월호(통권 11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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