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지금 - 이곳의 21세기 시론: 정끝별 『시론』
[북리뷰] 지금 - 이곳의 21세기 시론: 정끝별 『시론』
  • 양진호(본지 에디터)
  • 승인 2021.09.04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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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 대한 사랑만을 오롯하게 담은 시론집

  198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해 『자작나무 내 인생』 『와락』 『은는이가』 등의 시집으로 주목받았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되어 평론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해온 정끝별 시인이 시에 대한 30여 년의 애정을 담아낸 시론집 『시론』을 펴냈다. 오랜 시간 꾸준하게 축적해온 지식과 체험들의 블록으로 쌓아 올린 ‘경험 시론’을 이번 시론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시라는 단어 앞에 어떠한 관용구도 붙이지 않은 ‘시론’이라는 제목은 그 어떤 치우침도 없이 시와 시론 그 자체를 다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 하나하나 쌓아 올린 시론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번 시론집은 여성 시론 연구자가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에 출간된 귀하고 반가운 책이다. 저자는 김준오, 오규원 등이 펴낸 기존의 시론들과 깊이 대화하고 때로는 대결하면서, 특유의 균형감 있는 시선으로, 꼭 필요한 것들만으로 충분히 방대하게, 새 시대의 새 시론을 제시한다.

  나만의 시를 찾고-갖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열두 계단을 제시하다

  저자는 시가 무엇인지 막막할 때, 자신이 진심으로 쓰고 싶거나 읽고 싶었던 시라는 것에 대해 알고 싶을 때 기존의 시론을 뒤적여보았노라고 말한다. 그 깊은고민이 이 책의 첫 문장을 쓰게 한 원동력이다. 성찰과 고백, 화자와 목소리, 반복과 병렬, 이미지의 운동성과 영상성, 은유의 맥락성과 구조, 환유와 인접성, 상징과 풍자와 알레고리, 아이러니의 이원화와 다원적 지평, 패러디와 패스티시와 키치, 환상과 그로테스크, 상징과도상과 형태, 영향과 모방과 표절. 이는 시를 쓰거나 접하기 어렵게 된 지금에도 시의 주변을 지키는 독자들이 ‘한 편의 시’를 찾고 또 갖게 하기 위해 정끝별이 마련해놓은 시의 열두 계단이다.

  시는 목소리들이 집결되는 기관이자 목소리들이 거주하는 거처다.
  이런 목소리는 성별, 성격, 인격 등을 비롯해 어조, 리듬, 장단, 심지어 이미지나 비유에도 영향을 미쳐 개성적인 성색(聲色)을 빚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화자를 파악하는 일이란 곧 목소리를 이해하는 일이다. 시의 화자를 선택하고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빚어내는 일은 시가 시작되는 지점이며,

  개성적인 목소리들의 출현과 더불어 창조적인 화자의 기능에관한 관심은 새로운 시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 「창조적 화자와 다성의 목소리」(본문 33~34쪽)

  저자는 기존 시론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바탕으로 시에 작동하는 원리, 실제 시 분석을 통한 정의, 기능 및 실현의 실제, 유형 분류, 실현과 전개 양상을 꼼꼼하게 살핀다. 익숙한 개념들도 자기만의 관점으로 세심하게 풀고, 복잡하거나 난해한 개념들도 추상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설명하는 성실함을 선보인다. 특히 시 창작의 기본이 되는 ‘고백’에 대한 파트는 시인 정끝별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부분으로, 그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발아-발화의 시작 지점과 고백의 원리를 시인의 내밀한 목소리로 건넨다. 또한 우리 문학에서 가장 손대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인 ‘표절’에 관해서도 모방의 다양한 양상을 비교·분석함으로써 명쾌하게 설명하고, 창작은 발명이 아닌 발견이라는 시인으로서의 신념까지 그 설명과 해석의 말미에 덧붙인다.

  잃어버린 시에 대한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모은 ‘21세기 시론’

  윤동주, 백석에서부터 진은영, 백은선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에서부터 21세기 새로운 시의 양상을 설명하기 위한 낯설지만 중요한 시인들의 작품이 이 책의 적재적소에 담겨 있다. 『시론』의 큐레이션 자체가 한 권의 현대시 앤솔러지라고 할 수 있으며, 『시론』을 읽는 이가 익히고 차별화해 꼭 넘어서야 할 작가들의 목록까지 이 책에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현장과 이론의 장을 자유자재하게 넘나들며 마름질한 시론. 그리하여 시를 읽고, 쓰고, 가르치는 모두에게 부족함이 없는 시론. 작가는 이 책을 행운에 빚진 ‘가까스로’의 시론이라 표현했지만, 이를 ‘이제 한창’ 또는 ‘지금 바로’를 의미하는 ‘바야흐로’의 시론으로 바꾸어 읽는 건 어떨까. ‘나만의 시-한 편의 시’에 다다르게 할 바야흐로의 『시론』이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며 또다시 수많은 아름다운 시어들과 마주하게 될 독자들에게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미지는 주로 시각 이미지를 지칭하지만 그렇다고 이미지를 시각 포함의 감각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이미지란 감각이자 경험이고, 물질이자 상상이다.
  기억이자 사유고, 정동이자 정치다. 또한 그림이나 사진처럼 순간적으로 정지된 것이면서, 영상이나 홀로그램처럼 지속해서 움직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에 관한 연구 또한 감각적인 것과 사유적인 것, 매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들 사이에서 실현되는 인간의 모든 표현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이미지 역시 재현과 표현, 신체와 물질, 감각과 상상, 기억과 자유, 순간과 지속, 정지와 운동,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실현체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
  - 「이미지의 운동성과 영상화된 이미지」(본문 93쪽)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해오고 있는 저자는 유심작품상, 소월시 문학상, 청마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시학서로 『패러디 시학』, 교과서 시 다시 읽기 책으로 『시심전심』, 평론집으로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시 해설집으로 『밥』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돈 詩』 등이 있다. 현재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쿨투라》 2021년 9월호(통권 8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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