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 화가의 그림 속 나목처럼
[Gallery] 화가의 그림 속 나목처럼
  • 김명해(화가)
  • 승인 2020.12.2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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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구 〈박수근미술관〉

  늘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멀다는 이유로 계속 미뤄왔던 장소였기에 마음이 설레고 기분을 들뜨게 하는 곳이 있었으니 <박수근미술관>이다. 설악산이나 강릉은 몇 번 가본 적 있지만 나에게 있어 강원도 양구는 아는 지인도 없고 특별한 연고(緣故)도 없어 쉽사리 여행지로 선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해부터인가 박수근미술관이 생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언젠가는 가리라∼’는 마음으로 지내다 이제야 실행하게 되었다.

  T-map으로 목적지를 찍으니 대구에서 양구까진 쉬지 않고 달려 3시간 51분, 반나절이다. 날씨는 흐렸지만, 오랜만에 강원도로 여행 가서인지 기분은 최고다.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군위, 안동, 영주를 거쳐 단양휴게소에서 점심 먹고 <단양적성비>를 보고 가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미술관에 도착하니 오후 3시였다. 박수근미술관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 고즈넉한 미술관 흰 돌담과 붉게 단풍든 담쟁이,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미술관을 보고 앉아있는 박수근 화가 동상이다. 비 오는 평일 오후이자 코로나19 때문인지 관람객이 별로 없었다. 마치 미술관 측에서 오늘 오면 조용하고 분위기도 좋고 볼 것도 많으니 오라고 초대한 것 같다.

 

  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1914-1965) 화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박수근기념 전시관(2002)과 다양한 주제로 기획전을 전시하는 현대미술관(2005), 근현대미술을 소장한 박수근 파빌리온(2014) 등이 있다. 특히 박수근기념 전시관은 내가 국내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외벽으로 지어져 있었다. 흰 돌로 기존 건물을 둥글게 감싸듯 외벽을 쌓아 새 둥지를 연상케 했고 어떤 고성(古城)의 일부를 보는 듯했다. 입구를 찾기 위해선 누구나 건물 주위를 자연스럽게 한 바퀴 돌기 마련이다. 휘감은 듯한 건물 안쪽은 포근함 그 자체이다. 작은 개울이 건물 아래로 조용히 연결되어있고 귀엽고 앙증맞은 삼층석탑이랑 박수근 화가의 작품 이미지로 만든 벤치, 외벽과 마찬가지로 붉게 물든 담쟁이 넝쿨이 안쪽에도 건물을 감싸며 뻗어있다. 그리고 기념관 입구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박수근 화가의 입체상(像)의 모습이 평화롭다. 지금의 기념관이 있는 이곳이 바로 박수근 화가가 태어나고 자라고 결혼하기 전까지 지낸 생가터라고 한다. 전시관에는 그의 미술 작품 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어서 당시의 생활 모습과 가족관계를 엿볼 수 있었으며 사용하던 미술 도구들, 화가가 그린 그림이 기재된 책, 친필 원고나 스케치장도 전시되어 있어 작업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박수근 화가는 1914년 산세가 험한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평생 가난한 생활로 미술 도구나 재료를 살 돈조차 마련하기 힘들었지만,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하면서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특유의 회화 표현기법으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친 작가이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평면적인 질감과 어두운 색상을 사용한다는 점인데, 어두운 색은 당시 서민들의 삶의 무게를 생각하게 해 주며 박수근의 삶도 힘들었던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평면적인 질감은 그가 ‘가난한 서민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림 내용은 그 당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을 그렸다. 빨래하는 여인들, 맷돌질하는 아낙, 나물 캐는 소녀들, 농악놀이 하는 사람들,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아주머니, 동생을 업고 있는 아이, 마을 어귀에 모여 대화하는 어르신들 등이 등장하며 인물들 곁에는 잎이 없는 나목(裸木)이 든든한 버팀목처럼 위풍당당 그려져 있다. 화가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할 뿐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라고 얘기했다.

  또 작품에서 나목은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면서 새봄을 기다리는 나무들로 현재의 삶은 힘들어도 묵묵히 견디면서 희망을 잃지 않은 그런 나무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70-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도 유년기 동네 사람들이나 친구, 가족들의 생활 모습들이 아련하게 생각나고 추억할 수 있게 만들며 절제되고 소박한 화면을 바탕으로 향토적이고 일상적인 풍경에 대한 작가의 진실 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작품표현에 있어 돌의 표면 같은 거칠고 두터운 마티에르(matiere)는 그 대상이 영원히 변치 않고 거기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더 깊이 있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서 표현한 것이라 한다. 박수근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한 당시 주한 미대사관 부인인 밀러 여사가 그의 예술세계를 알리고자 1965년 한 잡지에 글을 올린 것이다. 작품의 제작과정을 그에게서 들은 대로 설명한 것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화가, 박수근>
  “나는 그림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 번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사이의 각층을 말리면서 층위에 층을 만든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과감하게 검은 윤곽선을 이용하여 대상을 스케치 넣는다.”

 

  바깥 풍경을 보면서 이동하는 옆 전시실 복도 입구에 <박수근 선생 작고 55주기 추모 특별전-나무와 두 여인>이란 전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어! 여긴 또 어떤 사연과 인연들로 이뤄진 전시일까?’하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전시실 입구에는 박수근 화가의 대표작 <나무와 두 여인> (하드보드 위 합지에 유채, 27×19.5㎝, 1950년대 중반) 작품이 오래된 액자 틀에 끼워져 있다. 이 작품은 국내 주요 언론과 비평가들을 통해 여러 번 언급된 작품으로 박수근의 모든 작품을 대표하는 사례로 대중들에게 인지되고 있다. 오광수(전 국립현대미술관장)는 그의 글에서 박수근 예술의 가장 전형을 보여주는 나무와 여인 작품은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상징하는 가난한 시대의 돌아가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삶의 염원이 팽팽하게 아로새겨지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78년 이후 단 한 번도 미술시장에 나오지 않았던 이 작품은 한 가족이 42년간 소장하여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만큼 이 기회에 볼 수 있어서 행운이다. 그리고 이 작품과 함께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대표 장편소설 『나목』 출판본과 도예가 황종례의 색면회화적 도예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연인즉, 세 분은 1952년 당시 동화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내에 있던 미8군 기념품 판매점 내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한 적 있는 사이였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서울의 중심에서 어렵게 얻은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 그곳에서 함께 일했던 세 명의 예술가는 지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 소설가, 도예가로 명성이 자자한데 미술관 측은 이 특별전을 통해 70여 년 만에 재회하는 박수근·박완서·황종례의 예술가로서 삶과 인간으로서의 삶, 그리고 그들의 뿌리 깊은 예술세계가 더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었음을 재조명하고자 전시를 기획했다고 한다.

 

  박완서 작가는 이 시절 박수근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쓴 소설 『나목』을 집필했으며 소설은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 그들의 삶과 박수근의 작품세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속의 고목(古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박완서 소설 『나목(裸木)』에서 발췌

 

  이런 사연과 인연으로 어려운 시기에 잠시나마 세 분이 함께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보니, 작품표현 양식은 제각각 다르지만-그림, 소설, 도자- 그 당시 작품을 제작할 때 스며든 감정이나 내포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 가을 정취가 정말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단풍도 예쁘게 물들었지만 자연 속에 어우러진 미술관 건물들도 감탄사가 절로 나게 한다. 산지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자연스레 연결된 계단 따라 우뚝 솟은 현대미술관 건물의 통유리 전시실도 멋지고, 포근한 엄마 품처럼 따뜻한 이미지로 자리 잡은 어린이 미술관도 좋았다. 특히 어린이 미술관 기획전시실에 전시된 위인전과  동화삽화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가난한 시절, 어린 자녀들에게 동화책 한 권 사 줄 형편이 녹녹지 않아 박수근 부부가 직접 그림 그리고 글을 적어서 만든 수제 동화책. 손때 묻은 흔적이 빛바랜 사진 마냥 정겹고 자녀를 향한 부모의 애틋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늦은 평일 오후라 관람객이 없어 딸이랑 둘이서 신나게 작품감상도 하고 느긋하게 체험 활동도 하는 호사를 누렸다. 이번 탐방은 박수근 화가의 유년시절 생활했던 곳을 직접 방문함으로써 그의 작품의 영감(靈感)과 작품제작의 의도를 알 수 있었고 따뜻하고 정이 많으셨던 박수근 화가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으며 화가 작품의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 필자의 잃어버린 감성을 충족시켜주었던 좋은 기회였다. 가을 낙엽이 다 지면 나목만 남은 겨울이 되겠지. 화가의 그림 속 나목처럼. 하지만 희망적이다. 봄에의 믿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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